한번은 잠시 북부 이탈리아로 출장을 가야 했는데, 역에 배웅 나온 그녀가 그렁그렁고인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그때는 에밀리아가 슬퍼한다는 것을 모른 체했지만, 출장내내 슬퍼하던 그녀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아 혼자 온 것을 후회했다. 그날 이후 그녀와 함께 가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일을 포기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나갔다 온다고 해도 그녀는 예전처럼 슬퍼하거나 같이 가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않았고, 대개읽던 책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알았어, 저녁때 봐, 식사 시간에 늦지마" 라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가끔은 오히려 내가 좀 더 오래 집을 비우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 P16

침대 한쪽에는자신의 잠옷을 잘 펴서 개고 그 옆에 내 잠옷을 놓았으며,
이부자리를 잘 정돈하여 그 위에 베개를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아침에는 항상 나보다 먼저 일어나 주인집 부엌에서아침을 준비해 쟁반에 받쳐서 들고 왔다. 

그녀는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신중하고 조용하게, 그러나 온 정성을 다해 모든 일을 처리했는데, 그런 모습이 마치 임무에 몰두한 열정 넘치는 스파이 같았다.
- P20

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방 안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책상 위에는커피 잔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말쑥하게 차려입고 출근한 작가들은 저녁이 가까워질수록 마치 고집 센 여인을겁탈하려 마구 뒹군 듯 옷이 구겨지고 땀에 찌들어 형편없이 흐트러진 상태가 되고 만다. 

틀에 박힌 형식의 영화제작 현실은 영화에 흥미와 매력을 느껴 큰 결심으로 이계통에 나선 시나리오 작가들을 강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 P49

"훌륭해. 자넨 유능한 작가야."
"그 생각, 꼭 자네 시나리오에 넣어야 해."
이런 말을 들으면 모욕감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리그런 마음으로 내키지 않는 일을 한다 해도 시나리오 작가로서 의무를 저버리진 못했다. 

시나리오를 쓴다는 것은 사륜마차에 비유할 수 있다. 네 마리 말 중 기운 센 한두 마리가 힘차게 끌면, 나머지 말들은 함께 끄는 척하지만 실은 끌려가는 것이다. 나는 이 작업이 환멸을 느낄 정도로 싫었지만 언제나 마차를 끄는 힘센 말이 되곤 했다.
- P50

나는 병이 생겼는데도 의사에게 가기를 망설이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 P52

그 무렵 내가 처한 상황을 직시할 용기가 있었다면, 나는 분명 하던 일을 그만두고사랑 역시 포기했을 것이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내 인생은의미 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난 용기가 없었다. 마음속으로 시간이 흐르면 다 해결되리라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되지 않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불안감까지 생겨났다. 에밀리아는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않았으며, 나는 일에 대해 염증을 느끼며 따분하고 우울한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P53

"꼭 말해주고 싶은데 리카르도, 자넨 마치 마구간 냄새로 집을 찾아가는 말과 같아. 난 사흘 정도는 걸려야 끝낼것 같은 일을 두 시간 만에 해내다니 놀라워. 돈을 더 많이벌려고 하니 영감이 막 떠오르나 봐?"

사실 파세티는 외모와 달리 심하게 둔한 성격이었는데,
그런 그가 싫진 않았다. 그와 나의 관계는 보상을 주고받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서로 도움을 주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파세티는 신경질적이진 않았지만 상상력이부족했고 그런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으며, 기본적으로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상상력도 풍부하고, 병적이라 할 만큼 예민하고 복잡한 성향을 지녔다.
그의 어색한 농담조를 흉내 내려 나도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감독님 말이 맞아요. 
돈이 생기니까요."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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