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가 쓴 소책자의 초판은 익명으로 나왔다. 존슨은 거의 무명의여류 작가가 명망 높은 하원의원을 비방하고 나선 글이 잘 나가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남성의 권리 옹호》는 1791년 초 재판을 찍어야 했고, 이번에는 표지에 저자 이름이 실렸다. 

이렇게 유명세를 얻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이듬해 두 번째
"옹호"를 내놓았다. 버크의 여성상 작고 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은 첫 번째 "옹호"에서 이미 그녀의 강력한 이의를 유발한 터였다. 그리하여 1792년 여름 메리는 그런 생각을 글로 옮기기 시작했고, 6주 만에 그녀를 불멸의 여성으로 만들어준 글을 탈고했다. <여성의 권리 옹호> 가 바로 그것이다.
- P132

1980년대 초 중국을 여행하던 미국의 여류 문예학자 패트리샤 마이어 스팩스는 영어를 아주 잘하는 젊은 중국 여성을 만났다. 그 중국 여성은 영국 소설을 많이 읽었노라고 말했고,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나는 질문에 망설이지 않고 제인 오스틴이라고 대답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몽땅 다 읽었으며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읽고또 읽었다고 했다.
패트리샤 마이어 스팩스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스팩스가 생각하기에 제인 오스틴의 세계는 문화혁명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이곳 중국 사회와는 멀어도 너무나 멀어 보였기 때문이다.  - P145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사랑받는 소설가인 제인 오스틴은생전에 그 이름이 지면에 실린 일이 딱 두 번 있었다. 그리고 두 번다 그녀가 쓴 소설의 표지에 실린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쓴 소설은그저 "By a Lady" 라고만 표기되었다. 1811년 나온 처녀소설 《이성과 감성 sense and Sensibility》이 그러했고, 1813년 나온 두 번째 소설인《오만과 편견》의 경우는 "이성과 감성을 쓴 여류 작가"라고 표기되었으며, 네 번째이자 생전에 출판된 마지막 작품인 1816년에 나온 《엠마Emma》의 표지에는 "오만과 편견 등을 쓴 여류 작가"라고 되어 있었다. 

여류 소설가의 명성은 그녀의 이름이 아니라 성공한 소설 제목에 근거하는 것이었고, 소설 제목을 언급하는 것이 가장 좋은 판매수단이었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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