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외부 환경의 노예다. 태양이 환한 날은 좁은 골목길의카페에 앉아서도 넓은 들판에 있는 것처럼 느끼고, 하늘이 흐린 날은야외에 있어도 문 없는 집 같은 우리 자신 속으로 몸을 웅크린다. 

아직 낮의 사물들 안에 있을지라도, 밤의 왕림은 이제 쉬어야 한다는 내밀한 의식을 천천히 펴지는 부챗살처럼 펼친다.
- P48

이제 동반자도 평화도 없이 불면이 기다리는 침대로 돌아가, 향수와 적막의 운명이 만나는 검은 밤의 바닷물 같은, 나의 혼란스러운 의식의 밀물과 썰물에 몸을 맡겨야 하기에.
- P49

신앙의 망령에서 이성의 망령으로 가는 것은 감방을 옮기는 일과 같다.  - P49

전쟁, 생산적이고 활동적인 노동,
다른 이를 돕는 일들...… 내게 이 모든 일은 그저 주제넘은 행위일 뿐이다. 

내 영혼이라는 지고의 현실 앞에서,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꿈의 순수하고 절대적인 위대함 앞에서, 모든 실용적이고 외부적인 것들은 그저 시시하고 하찮을 뿐이다. 

꿈이야말로, 내게는 더욱 중요한 현실이다.
- P50

초라한 셋방의 더러운 벽도,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의 낡은 책상들도, 오래된 시가지의 가난한 풍경도 매일 마주하다보니 언제까지고 변치 않을 것 같고 개선의 여지도 없어 보인다. 그렇기는 해도 이들은 삶의 누추한 일상 속에서 자주 느끼는 역겨움의 원인은 아니다. 역겨움을 느끼게 하는 건 바로 사람들이다. 일상적인 접촉과 대화를 통해 나를 알고는 있지만 사실은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로 인해 내 영혼의목구멍에 생리적인 혐오감으로 침이 뭉친다. 외관상으로 볼 때는 내삶과 나란히 있는 그들 삶의 추악한 단조로움이, 내가 그들과 같은 부류일 거라고 믿는 그들의 확신이 내게 죄수복을 입혀 감옥에 가두고나를 사기꾼, 거지와 같은 신세로 떨어뜨린다.
- P51

시인의 목에 전혀 어색하지 않게 둘려 있는 사무원풍의 외투깃을 세우고, 항상 들르는 상점에서 구입한 장화를 신고 차가운 빗물이 고인 물웅덩이를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늘 그렇듯이 영혼의 자존감과 우산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에 조금 신경쓰면서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 P52

한구석에 던져진 물건 같고, 길에, 떨어진 넝마쪽 같은 천덕스러운 존재인 내가 삶 앞에서 그렇지 않은 척한다. - P53

죽은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죽음이란 길을 떠나는 일 같다고 생각한다. 시체는 그가 떠나면서 남긴 옷과도 같다. 누군가 떠났고 그동안입고 있던 유일한 겉옷은 그에게 더이상 필요가 없었다.
- P57

언제나 똑같고 변화 없는 내 삶을 지속하는 무기력,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덮고 있는 표면에 붙은 먼지나 티끌처럼 남아 있는이 무기력을 나는 일종의 위생관념의 결여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몸을 씻듯 운명도 씻어주고, 옷을 갈아입듯 삶도 갈아줘야 한다. 먹고 자는 일처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존중하기 때문에 그리해야 하고, 그것을 우리는 위생이라고 부른다.

스스로 위생적이지 못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대수롭지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한편 둔감하게 늘 똑같은 상태로 사는 이유가 그것을 원해서도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어 순응했기 때문도 아니고, 지성에 내재된 역설로 인해 자의식이 무뎌졌기 때문인 사람들도많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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