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1월에 북까프까스에서 주민들이 대거 도망쳤던 일을 누군가 기억하고 있는가? 그것은 세계 역사에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주민들은, 특히 농촌의 주민들은 승리를 한 자기 나라에 남고 싶지가 않아, 패주하는 이방인의 적병들과함께 무리가 되어 도망쳐 갔다.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는1월의 엄동 속에 짐마차의 길고 긴 행렬이 계속되었다!
- P45

부띠르끼 형무소의<역>에서 우리는 1949년에 투옥된 신참들과 함께 있었다. 그들의 형기는 전부 달랐다 ㅡ통상적인<10루블짜리>가 아니라< 25>루블짜리였다. 여러 번 거듭되는 점호 때 그들이 자신의 형기 만료가 되는 시기를 대답하는 것이 마치 잔인한 농담같이 들렸다.<1974년 10월!><1975년 2월!>

*역ㅡ기차역이 아니라 호송 죄수의 집결 감방 - P61

한 시골 노파가 닫힌 우리의 창문앞에 멈춰서, 창문에 낀 밖의 철창과 중간 철창 너머로 열차침대 상단에 비좁게 있는 우리를 찬찬히 바라보고 있었다. 노파는 우리 러시아 국민이 언제나 <불행한 자>를 바라볼 때의그 동정 어린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노파의 뺨으로 이따금 눈물이 흘렀다. 이 허리가 굽은 노파는 한자리에 선 채, 우리 중에서 당신 자식을 찾기라도 한 듯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할머니, 보면 안 돼요." 호송병이 그녀에게 부드럽게 주의를주었다. 그러나 노파는 듣지 못한 체했다. 그녀 곁에는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서 있고, 그 머리에는 흰 리본이 묶여있었다. 이 소녀는 아주 진지한 눈초리로 그 나이에 비해 비탄에 젖어 크게 뜬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아니, 너무나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어서 아마 우리의 모습이일생 동안 그녀의 망막에 새겨졌으리라. 열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파는 때 묻은 손을 들어 마음을 다해, 서둘지 않고 우리에게 성호를 그었다.
- P63

그리고 또 이런 작업도 있었다! 매일 110명에서 120명이묘혈을 파려고 나갔다. 두 대의 미제 자동차 스튜드베이커에골조만 있는 관으로 시체를 운반하는데 그 관에서 손발이 삐져나왔다. 1949년 여름에 날씨가 좋은 시기에도 매일 60명에서 70명이 죽었고, 겨울이 되면 1백 명씩 죽었던 것이다(시체안치소에서 일하는 에스토니아인들이 세어 본 숫자다).
(다른 특수 수용소에서는 이렇게 많은 주검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곳은 식량 사정은 좋았지만, 작업은 훨씬 어려웠다.
역시 폐병 환자와는 다르다는 것을 독자 여러분도 스스로 알것이다.)

이러한 모든 일은 1949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 10월 혁명이 일어난 지 32 년째에, 2차 대전이 끝나고, 전시의 여러 가지엄격한 제도가 종지부를 찍은 지 4년 후, 뉘른베르크 재판이끝나 인류가 나치 독일의 수용소에서 있었던 야만 행위를 알고, 이런 일이 이제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겠지! 하고 안심하며 3년이 지난 때의 일이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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