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혁명이 도형을 폐지한 26년 후에, 스딸린은 다시 그것을 도입했다. 그것은 스딸린이 자신의 내리막길이 끝난 것 같다고 느낀 1943년 4월의 일이었다. 스딸린그라뜨에서의 국민적 승리가 가져온 최초의 국민적 결실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ㅡ철도의 군사화에 관한 정령 (소년과 여자를 군법 회의에 회부한다), 그리고 하루 지나서 (4월 17일)도형과 교수형의 도입에 관한 정령. (교수대도 역시 훌륭한고대의 장치이며 권총으로 총살하는 것과는 다르다. 교수대는 죽는 과정을 시간적으로 길게 하고, 모여 있는 군중에게자세히 보여 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후, 승리가 계속되면서, 도형지나 교수대로 죽음이 선고된 사람들이 보내졌다.  - P16

북부에서는 통상 가로 7미터 세로 20미터 크기의 <천막>에서 살았다.널빤지로 싸고, 톱밥에 싸인 그 천막은, 마치 간이막사와 같았다. 이러한 천막의 정원은, 바곤까(조립 침상)일경우는 80명이고, 침상을 빽빽이 좁히면 1백 명이었다. 그러나 도형수의 경우에는 2백 명을 넣었다.
- P17

주거구역에서는 한 번도 환기시킨 일이 없는 천막, 즉 창문이 없는 막사에 감금된다. 겨울에는 악취가 풍기고, 눅눅하고 시큼한 공기가 농축된다. 이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단 2분도 참을수 없는 공기였다. 도형수에게는 주거 구역이 작업 구역보다.
더 들어가기 어려웠다. 그들은 변소에도, 식당에도, 위생부에도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모든 용무는 변기통이나 음식 차입구에서 했다.  - P17

(귀가윙윙거리는 듯 몽롱한 그들의 머릿속에서 예전 사회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고, 이 암흑의 북극의 밤 속에서, 자기들의노동과 막사 이외의 모든 것은 사라져야 했다).
그리하여 도형수들은 점점 쇠약해졌고, 이내 죽어 갔다.
최초의 보르꾸따 수용소의 <알파벳>– 28자인데 각 문자에는 1에서 1천까지 번호가 붙었다 — 은, 즉 보르꾸따 수용소 최초의 2만 8천 명의 도형수들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불과 1년 사이에 모두 땅속으로 사라졌다.
그 기간이 1개월이 아닌 것이 놀라울 뿐이다.
- P19

노릴스끄시의 제25 코발트 채굴장으로, 코발트 광석을 싣기 위하여 화물 열차가 출입하고 있었다. 도형수들은 조금이라도 빨리 고통에서 해방되려고 그 열차에 깔렸다. 절망한 나머지 24명 정도의 도형수들이 툰드라 지대로 도주했다. 그들은 비행기에 발각되고 사살되어, 그 시체는 작업 출장 나가는곳 가까이에 쌓아 놓았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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