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꿀라끄였던 사람이 자기의 10년 형을 거의 다 마쳐 가고 있었다. 그는 수용소의 어린 수소와 함께 일하면서 그 소가 굶주림에 시달리고있는 것을 보고 몹시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그는 그 어린 수소에게 사탕무를주었는데 그 대가로 8년 형을 선고받았다. (자기 자신이 먹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물론 <사회적 친근 분자>라면 그 수소에게 먹을 것을 줄 리가 만무했겠지만! 바로 이와 같이 우리 나라에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인민이 둘로, 즉 살수 있는 자와 살 수 없는 자로 갈려 있었던 것이다.
- P54

그다음에는 형사범들과 제58조에 의한 장기수들, 즉 중대 정치범들을 보내왔다. 도둑들은 이 중대 정치범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25년의 형기를 받고 있어서, 전후의 상황하에서 파렴치범을 죽인다 해도 그 이상 형기는 연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는 이미 그런 행위를 해도 계급의 적의 행위(운하 건설 때처럼)라고는 보지 않았던 것이다.
- P113

제58조 해당자 중 보통 일꾼들은 거의 모두가 이러한 징벌 수용 지점으로부터 살아서 돌아올 수 없었다.
북방 철도 건설 수용소(소장은 끌류치낀 대령)의 징벌 출장소에서는 1946년과 1947년에 인육을 먹기까지 했다. 즉,
사람을 죽이고 그 고기를 끓여서 먹었던 것이다.
우리 인민의 천지가 진동할 역사적 대승 직후에 이런 일이있었다.
- P114

로빈 후드로부터 오페레타의 주인공에 이르기까지 더없이 고결한 도적들로 찬양되어 왔다. 그들은 동정심  많은 자들이어서 부자의 재물을 약탈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인정되어 왔다. 오, 카를 모어와 더불어 공을 세운 고매한 투사들이여! 오, 강한 반항심의 로맨티스트 첼까시여! 오, 베냐 끄리끄여, 오데사의 떠돌이들이여, 오데사의 방랑 시인들이여!
그러고 보니 세계의 문학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이무뢰한들을 찬양해 온 것이 아닐까. 

프랑수아 비용은 물론이거니와 빅토르 위고도, 발자크도 이 길을 그냥 지나쳐 버리지는 않았고, 뿌시낀으로 말하면 그의 집시들 가운데서 무뢰한의 근성을 칭송하고 있다. (그리고 바이런은 또 어떠했던가?)그렇지만 소련 문학만큼 폭넓게 목청을 합해서 한결같이 그들을 찬양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 밑바닥에는 고리끼와 마까렌꼬뿐 아니라 더 차원 높은 이론적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 P115

1917년에 몇백만 명의 탈주범이 쏟아져 나온데 뒤이어 내전을 통해 모든 인간의 욕망이 해방되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고삐가 풀린 것은 도둑들의 욕망이었다. 그자들은 더 이상목에다 쇠사슬을 쓰려 하지 않았고 되쓰지 않아도 된다는 선언을 받아 냈던 것이다. 도둑들은 사유 재산의 적이다. 따라서혁명 세력으로 간주하는 편이 유리하다. 그러니까 그들을 프롤레타리아트의 흐름에 합류시켜야 하며 이것은 결코 어려운일이 아니다, 라는 식으로 되어 갔던 것이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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