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전쟁 중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에게 <가령 불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지금 당신이 가장 바라는 유일한 희망은 뭐냐?〉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다음과 같았으리라.<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검은 빵을 배불리 실컷 먹고 싶다. 그다음에는죽어도 좋다.> 전쟁 중 여기에 매장된 사람들의 수는 결코 전선에 뒤지지 않았다. 그저 시인들에 의해서 찬미되지 않았을뿐이다. <허약자 그룹>에 끼어 있던 L. A. 꼬모고르는 1941년에서 1942년에 걸친 겨울 동안 가벼운 노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넉 장의 판자로 만든 구멍투성이 속에 두 사람씩 벌거벗은시체를 처넣었다. 그런데 그것이 매일 서른 상자씩이었다(아마 수용소가 도시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상자에 넣었으리라). - P164
적어도 2개의 직선이 교차해야 점 하나가 생기듯이, 어떤사건이라도 그것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개의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 - P178
몸이 쇠약해서 죽는다는 위험은 도스또예프스끼와 그 동료의 유형수들에게 한 번도있지 않았다. 그들의 형무소에서는(즉, 구내에서) 거위가 놀고 있었다(!) 그런데 죄수들은 그 거위를 잡아먹지 않았다. - P262
철학자, 심리학자, 의학자, 작사가들이라면 우리 나라의 수용소에서 인간의 지적 또는 정신적 시야가 좁아져 가는 특별한 과정을, 또 인간이 동물로 전락하여 살아 있으면서 죽어가는 과정을 어디서보다도 면밀히, 다수의 실례를 가지고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용소에 갇힌 심리학자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것을 관찰할 여유가 없었다 ㅡ 그들 자신이인격을 똥이나 먼지로 바꿔 버리는 흐름에 몸을 내맡겼던 것이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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