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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ㅣ 높새바람 25
한박순우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11년 3월
평점 :
책을 읽으면서 지난 몇 년간 나와 함께 한 지역아동센터의 아이들이 생각났다. 길게는 5년 가까이 보아온 아이들이 차츰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한 걸 보면 이 아이들에게 정이 많이 든 것 같다. 남녀를 막론하고 사용하는 욕설에 툭 하면 주먹부터 나가고, 세상에서 자신들이 제일 힘들다고 말하는 요즘 아이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아이들이 때론 화가 나고 안타깝기도 하지만, 여전히 생기발랄하고 언제 어느 때든지 사랑스런 모습으로 변신이 가능한 귀한 존재이기에 생각하면 웃음부터 난다.
아이들과 만나면서 가장 피부에 가깝게 와 닿는 문제는 안정되지 않은 가정과 가난이다. 지역아동센터를 드나들며 아쉽게 생각되는 점은 센터의 중요한 역할이 아동을 보호하는 것이기에 위와 같은 문제로 인해 나타나는 크고 작은 현상들을 가장 가깝게 체감하면서도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고 시행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다.
[거지소녀]의 화자인 해민이 역시 마음이 건강하지 않은 엄마와 가출한 언니, 자신들을 향한 동정의 시선 등 평범하지 않은 일상 속에서 부끄럼 많은 성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어느 날 방송국에서 공부방을 취재하러 온 후 해민이의 언니에게 쏟아진 부담스런 관심과 금전적 지원에 심약한 엄마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더 많은 돈을 후원받으려는 욕심을 부리면서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받은 언니는 가출을 하고 만다.
언니에게 가해진 것들이 비록 선한 명목 하에 이루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일어서려고 하는 언니가 원한 것이 아니었기에 결코 약이 될 수 없었던 것을 어렴풋이 깨달아 가는 해민이는 언니를 연상케 하는 ‘거지소녀’가 그려진 그림을 보며 당당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 언니를 기다린다.
엊그저께 저녁때 센터에서 만난 중학교 2학년생인 J는 복지사 선생님이 “넌 매일 뭐가 그렇게 힘드냐?”고 물으니 “선생님도 학생 돼 봐요.”하고 대답했다. 말투도 꼭 싸움을 걸듯 불퉁하니 평소 아이들을 예뻐하시며 뭐든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하시던 선생님도 화가 나신듯 해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내가 중학교 다닐 땐 학교 갔다 오면 집안 청소와 빨래, 동생 돌보기, 주말엔 농사일도 도왔는데?”
꼭 가난 때문이 아니라도 다양한 문제로 인해 위축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더 크게 어깃장을 놓는 아이. 그래서 준비해 간 수업을 하는 것보다 마음읽기가 먼저 필요한 듯해 내 학창시절과 졸업 후 불안한 시기에 내가 걸어왔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며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상태에서 수업을 진행했다. 다행히 불퉁한 모습이 사라지고 수업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 “지금 이 순간 최고의 선택 즉,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하는 것을 선택한 J에게 박수!!”하면서 칭찬을 해줬다. 모두가 가고 없는 깜깜한 공간에서 문단속까지 마무리하며 집으로 향하는 아이를 보며 물질적인 지원 역시 적절한 방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주 작은 마음의 여유만 있어도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예쁜 모습을 보여주는구나 하는 깨달음에 감사했다.
아마도 해민이의 언니 역시 내가 만나온 센터의 아이들처럼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힘으로 자존심을 되찾고 되돌아 올 것이다. 그렇게 돌아올 언니를 기다리는 해민이 역시 스스로의 힘으로 당당히 세상 앞에 우뚝 선 존재가 되었다는 걸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