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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 완역본 ㅣ 하서 완역본 시리즈 4
에밀리 브론테 지음, 한명남 옮김 / (주)하서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학창시절에 읽었던 책들 중 내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작가들은 주로 여성들이었다. 루이제 린저의 ‘다니엘라’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설렘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나 역시 평탄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브론테 자매의 불행한 삶에 특히 맘이 쏠려 그다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앤 브론테의 ‘아그네스 그레이’를 일부러 찾아 읽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몇 년 전에 영화로 ‘오만과 편견’을, 현대문화센터에서 새로 출판된 책으로 ‘제인 에어’를 다시 읽었는데 나름 어른이 된 시점에서 다시 보고 읽으니 주인공들의 말과 행동에서 마음을 울리는 부분이 더 많았고 잠시나마 소녀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에 즐거웠다.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도 다시 한 번 읽어보리라 마음먹었는데, 마침 하서에서 완역본으로 출간되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1년 내내 따뜻한 바람이든, 시원한 바람이든, 거센 폭풍이든 바람을 받고 서 있는 ‘워서링 하이츠’와 같은 사람 히스클리프. 이 집을 닮은 듯한 그의 인생과 사랑도 늘 바람 부는 언덕의 고독한 건축물처럼 쓸쓸하고 위태로웠다. 그가 받았던 고난과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못내 아쉬워 성년이 지나서도 내 마음의 연인으로 담고 살았던 히스클리프를 다시 만났으니, 캐서린이 하녀 넬리에게 감추고 있으면 터져버릴 것 같은 위압감으로 히스클리프를 향한 연정을 털어놓았을 때 이를 엿듣고 행방이 묘연해졌다 수년 만에 나타난 히스클리프를 다시 만났을 때의 기쁨보다야 못하겠지만, 분명 내 가슴도 콩닥콩닥 뛰는 게 느껴지니 아직도 소녀시절 감성이 다 사라지진 않았나 보다.
어느 날 주워 온 아이 히스클리프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을 보고 친 아들인 힌들리가 독을 품어 그 아이에게 온갖 서러움을 안겨주나 그 누이동생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서로를 영혼의 반쪽이라 여길 만큼 사랑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둘의 처지가 너무 차이난다는 캐서린의 자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히스클리프는 떠나고, 이웃한 집의 건실한 청년 에드거와 결혼을 한다. 이후 다시 돌아온 히스클리프가 복수에서 비롯된 격정의 칼날을 휘두를 때 그 누구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거칠 것 없던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그가 사랑한 캐서린의 딸과 증오의 대상이었던 힌들리의 아들 사이에 흐르는 따뜻한 기류를 보고는 그 의지가 꺾이고 만다.
“내가 그렇게 맹렬하게 노력한 것이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끝장난단 말인가? 두 집을 부숴버리려고 지렛대며 곡괭이를 장만해 놓고, 헤라클레스와 같은 괴력을 낼 수 있도록 내 자신을 훈련했는데 - 중략 - 어느 쪽 집에서도 기와 한 장 들어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으니 말이야!”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향해 가는 모습은 즐거운 소풍을 준비하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참 신기하게 생각되었던 것은 오래전에 읽을 땐 느끼지 못했던 유머가 곳곳에서 묻어난다는 점이었다. 비극적 상황의 연속으로 모두가 죽고 난 이후 스러시크로스 저택 역시 히스클리프의 소유가 되어 이곳을 임대한 록우드라는 인물의 생각과 하녀 넬리가 들려주는 이야기 곳곳에서도 웃음이 묻어난다. 누가 보아도 기피하고 싶어 하는 히스클리프를 처음 대면할 때 그 자신이 사람을 싫어하기에 히스클리프의 데면데면한 모습마저도 호감도를 높였다는 표현부터 이 우울한 기억속의 책을 재미나게 읽겠구나 하는 예감을 했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에밀리 브론테가 서른의 나이에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폭풍의 언덕’에 견줄만한 작품이 세상에 많이 남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느끼게 하는 작가해설까지 마음을 움직인 이 책으로 며칠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책을 좋아하는 딸아이에게 이 책을 언제쯤 권해줄까 하는 즐거운 생각도 함께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