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쓴 글씨 - 남아프리카공화국 문학 다림세계문학 34
베키 압테커 지음, 강수정 옮김, 김은경 그림 / 다림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며칠 전, 인터넷에서 생활고를 비관해 24층 아파트에서 잠자는 아들을 던져 죽인 비정한 엄마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그 기사 끝에는 그와 유사한 기사들이 쭉 올라와 있어 몇 가지 기사를 더 클릭해 보았는데, 너무 기가 막힌 내용들이라 하루 종일 기분이 언짢았었다. 사람이 한계에 닥치게 되면 정말 못하는 짓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두려웠다.

만약 내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내 주변에 나를 도와줄 이가 하나도 없다면, 나 역시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혐오스러워할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되지 않을까, 아마도 눈앞에 먹을 것이 보였을 때 그것을 훔쳐 먹는 것은 오히려 애교스러운 행동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마흔이 다 된, 어느 정도 세상을 살았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내게도 굶주림과 같은 비극적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는데, 그 상황에 처해진 아이들이라면 오죽할까...

처음 접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책 「물에 쓴 글씨」는 위에서 내가 상상만 했던 처지에 직접 놓인 아이들에 관한 아픈 이야기이다. 엄마와 아빠가 돌아가셨고 하나뿐인 형마저도 병에 걸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속에서 노엘은 고단한 현실을 살아내는 것 말고도 이상적인 삶에 대해 고민하느라 더 힘이 드는 생각이 깊은 아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쁜 패거리에 속해 도둑질을 일삼는 큰 아들의 모습을 보고 슬퍼하시며 노엘에겐 꼭 정직하게 살 것을 당부하셨기에 배가 고파도 형이 범한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한다. 그 노력 가운데 얻어낸 것은 ‘시’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우연히 들린 도서관에서 만난 젊은 남자에게서 시집을 선물 받고 그가 남긴 알듯말듯한 이야기를 가슴에 담아두게 된다.

  

“어떤 아름다운 것을 보거나 행복한 일이 생기면 전에 느꼈던 슬픔 때문에 그게 더 아름답게 보이고, 더 행복하게 느껴지는 거지. 그 아름다움과 행복이 더 소중해지는 거야. 슬픔은 마음을 깎아 내서 행복이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넉넉하게 담을 수 있게 큰 그릇으로 만들어주거든. 내가 슬픔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건 그게 내 행복의 일부이기 때문이야. 많이 슬플수록 더 많이 행복해질 수 있어.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거야.” -158쪽 
 

젊은 남자가 건넨 위와 같은 말은 깊은 슬픔을 경험해 본 자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깨달음이었으니, 이미 사색적이고 고단한 삶과 배고픔을 지치도록 경험한 노엘이었기에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특별히 다가왔을 것이다.

급식으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영어 작문 시험을 치루는 노엘의 글은 이러한 깨달음과 시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빛나는 글이 되었다.

 

시를 생각하면 이제 음식이 떠오른다. 영혼의 음식. 그 남자가 내게 준 시들은 내 마음의 양식이 되었다. 그 사람은 내게 얼마든지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주었다. 내게 시란 바로 그런 것이다. 주변의 사람들과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음식. 이제 나처럼 굶주린 사람들의 가슴을 채우는 데 시를 사용할 수 있다. 살아가면서 이 양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줄 수 있다면 내 삶은 훌륭한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254쪽 
 

상담 교사로 재직하면서 만난 아이들과의 경험을 「물에 쓴 글씨」에 풀어 놓은 베티 압테커의 글은 일부러 눈물샘을 자극하려 감정적인 글을 늘어놓지 않고도 노엘을 비롯한 아이들의 생활과 생각을 잘 표현해 감동을 준다. 수많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노엘이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으며, 가치 있는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있음을, 오히려 슬픔으로 인해 더 커진 그릇을 가지고 더 나은 삶을 꿈꾸는데 주저하지 않는 아이들을 보여준다.

이 한권의 책이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이만큼 힘들어 본 적도 없으면서 세상의 모든 걱정과 근심을 껴안은 듯 엄살떨던 내가 부끄럽고 노엘과 같은 아이들을 너무 자주 잊고 사는 것도 부끄럽다. 내가 당장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기보다 세상을 향한 관심을 게을리 하고 있었던 것이 부끄럽다. 내 심장이 내가 속한 세계가 아닌 세상을 향해 두근거리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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