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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비밀 정원 ㅣ 레인보우 북클럽 12
T. H. 화이트 지음, 김영선 옮김, 신윤화 그림 / 을파소 / 2009년 6월
평점 :
아이에게 재미난 옛이야기를 들려줄 때 마무리로 “끄〜읕”을 선언해도 “그래서?”,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는데?”하고 난감한 질문을 계속해대는 통에 난처했던 경험이 많다.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거기까지라고 아무리 말해도 막무가내로 “더, 더”를 외치는데 질린 엄마가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아이들의 그러한 소망이 작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는지 요즘 출판계에서 명작의 뒷이야기나 페러디가 상당히 많이 눈에 띈다. 그렇게 세상에 선보인 책들을 읽으면서 어른인 나도 아이 못지않게 재미난 이야기의 뒷이야기를 꽤나 궁금해 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너선 스위프트의 풍자소설 ‘걸리버 여행기’를 패러디한「마리아의 비밀정원」은 ‘걸리버 여행기’의 마지막 장 이후로 독자들(특히 어린 독자들)이 궁금해 했을 만한 것을 작가의 번득이는 재치로 풀어낸 책이다. 우리가 사는 동시대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소인을 발견하게 된다면 어떨까? 300년 전, 걸리버가 다녀온 소인국의 위치가 선량하지 못한 사람(이 책에서는 걸리버를 구해준 선장)에 의해 발견되고, 그들을 단지 크기가 작을 뿐, 똑같은 인격을 지닌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고 큰돈이 될 만한 존재로 여겨 꼭두각시로 전락시켰으나 목숨을 건 탈출 이후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살고 있다면?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해 한동안 가슴의 통증과 호흡곤란 증세를 겪고 있지 않을까?
책 속의 주인공 마리아는 으리으리한, 그러나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 거의 다 쓰러져 가는 대 저택 ‘말플라크’를 물려받은 고아소녀다. 후견인인 고약한 목사와 그가 마리아의 가정교사로 임명한 역시나 고약한 브라운 양으로 인해 보통의 소녀들보다 더 불행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인 마리아지만 다행히 다정다감한 성격과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그 나이 또래의 소녀들과 별 차이가 없다.
마리아는 우연히 걸리버가 방문했던 릴리퍼트 제국에서 끌려온 소인들이 300년간 숨어 살아온 작은 섬을 발견하고, 어린 마리아에게 사실은 어마어마한 재산이 상속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목사와 브라운양은 그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마리아의 커다란 몸집, 어린 소녀다운 다듬어지지 않은 생각과 마음씨로 릴리퍼트의 소인들이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마리아의 정신적인 지주라 할 만한 괴짜 교수의 충고를 깊이 새겨 그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며 우정을 쌓아나간다.
목사와 브라운양이 릴리퍼트 인들을 발견해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마리아가 감금되기도 하지만 릴리퍼트 인들과 괴짜 교수 그리고 말플라크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인 요리사와 함께 위기를 극복하는 장면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마리아가 마냥 어리기만 한 소녀에서 생각이 깊은 소녀로 거듭나는 과정과 옛 이야기에 상상의 날개를 단 「마리아의 비밀정원」은 근래 쓰인 작품일거라는 내 생각과는 달리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쓰인 작품이었다. 60여 년 전에 쓰인 책에서 보여주는 놀라운 상상력은 또다시 내게 도전이 되었다. '걸리버 여행기‘란 책을 모르고 읽어도 큰 무리는 없지만(릴리퍼트의 교장 선생님이 마리아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로도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미리 읽어 사전 지식이 충분한 상태에서 읽는다면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기에 순서가 뒤바뀌긴 했지만, 어린이용이 원작 ’걸리버 여행기‘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이에게만 상상을 권유할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도 상상연습이 필요함을 느끼게 됐다.
책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작다고 해서 그들을 폭력적으로 다룸으로써 자신을 위대한 존재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얘야, 너는 그냥 너 자체로 위대한 사람이야. 그러니 네가 위대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한테 주인 행세를 할 필요는 없어.” - 릴리퍼트 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싶어 하는 마리아에게 교수가 한 말. 42쪽.
“사랑이 어려운 이유는, 뭔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진다는 데 있어. 그렇지만 너는 감정을 잘 조절해야 하고, 항상 심술궂은 행동을 자제해야 해. 이건 정말 어려운 일이야.” -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리아에게 교수가 한 말. 1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