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수
김민영 지음 / 효월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꽤 오래전에 방영된 오락 프로그램에서 노부부가 나와 퀴즈를 푸는 게임이 있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 둘 중 제시된 단어를 보고 상대방이 맞힐 수 있도록 설명해 주는데, 할아버지가 “당신과 나 사이!”라고 힌트를 주니 할머니가 “웬수!”라고 답해서 배꼽을 잡게 만들었다. “아니, 그거 말고 네 글자로 뭐라고 하지?” “평생 웬수!” 배꼽을 잡다 못해 쓰러지게 만든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부로 산 수십 년의 세월동안 ‘사랑’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 ‘응어리’를 가슴에 품고 살았을 우리 시대 할머니들의 지난 세월이 느껴지는 대목이어서 웃음 끝이 씁쓸했던 기억이 난다.

김민영의 장편소설 「웬수」를 집었을 때, 아마도 오랜 세월 동안 삶을 같이 한 노부부의 이야기려니 하고 생각했다. 사랑 없이 부모님이 맺어 준 인연으로 부부로서 한 평생을 같이하며 이제는 서로를 원망하고 후회하기 보다는 ‘정’으로 화한 아름다운 이야기쯤으로... 하지만, 이게 웬 대박이냐? 동네 비디오가게에서 빌려보는 시시한 로맨스 소설들 중에서 어쩌다 ‘포도밭 그 사나이’, ‘커피프린스 1호점’, ‘김치만두 다섯 개’와 같은 준수한 책을 만났을 때 느끼는 그 기쁨을 「웬수」에서 느끼다니...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로맨스소설을 무척 좋아하는 내게 콩가루와 팥가루가 마구 뒤섞인 것 같은 집에서 의연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사랑을 이루는 민주의 모습은 참 아름답게 보였다.

아버지는 온갖 비리를 일삼고도 승승장구하는 국회의원, 어머니는 대한민국이 알아주는 복부인, 하나밖에 없는 쌍둥이 언니는 학교의 일진이니 철이 들면서부터 가족들로 인해 쥐구멍 속에 숨고 싶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민주. 열네 살 이슬처럼 청초하고 꿈 많은 시기에 아버지의 보좌관으로 들어온 12살 연상의 동화 속 왕자님 같은 석현을 만나면서 연정을 품게 된다. 그렇지만 사사건건 아버지와 부딪히는 민주와 비리정치인의 보좌관인 석현이 가까워지기란 쉽지 않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대학생이 된 민주에게 새롭게 떠오른 문제는 다름 아닌 아버지 나돈만 의원의 ‘대선출마’.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아버지의 비리를 폭로하지만 결국 부패하고 게으르며 변화를 두려워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은 나돈만 의원을 대통령으로 만든다.

절망적인 시선으로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석현이나,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라고 외치는 민주에게서 서로 다른 길을 가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모두가 행복한 좋은 세상임이 분명하다.

정당의 목소리를 관철시키기 위해 국회에서 폭력도 서슴지 않는 나돈만 의원의 모습은 요즘 해외 주력일간지의 1면을 장식할 만큼 뒤떨어진 우리 국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회의실 문을 부수는 해머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때리고 제 머리와 가슴을 때리는 것 같이 아팠다"

“아빠, 요즘 학교에서 애들끼리 싸우면 친구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너희들이 국회의원이냐, 여기서 싸움질이나 하게’라고 하거든. 재밌지?”

“교과서에서는 입법부가 국민을 위해 정책을 만들고 예산을 심의하는 곳으로 배웠는데 지금 국회의 모습은 권투경기장 같습니다. 싸움을 하고 싶으면 폭력배가 되거나 권투선수가 됐어야죠.”

이명박 대통령이나 철없는 초등학생, 국회의원에게 편지를 보낸 중학생이 생각하는 것 역시 모두 같을 것이다. 어린아이부터 한 나라의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고 있는 것을 국회의원들은 왜 모를까? 말 그대로 「웬수」가 따로 없다.

민주와 석현의 가슴 설레는 사랑이야기와 희망이 없는 우리나라의 정치현실을 한 번 더 되돌아보게 만드는 재미있고도 뒷맛이 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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