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고래
김형경 지음 / 창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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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이 너무 깊을 때는... 그 슬픈 일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쳤을 때는... ‘어떻게든 내게 남은 생을 잘 살아봐야지’ 하는 생각 따윈 들어오지 않는다. 다만 슬픔의 무게에 견줄만한 존재가 있을 땐 어거지로 몸과 마음을 추슬러 슬픔을 마음 깊은 곳에 켜켜이 쌓아둔다. 하지만 지금 닥친 슬픔의 무게와 견줄 무언가가 없다면, 고스란히 슬픔에게 온 몸을 맡겨 내 의지가 아닌 슬픔에게 인생을 운전하도록 내버려두게 된다.

  니은이가 그랬다. 주민등록증이 나왔지만 성인이라 하기에도 청소년이라 하기에도 어중간한 지대에 머무른 열일곱 살의 이른 봄 날, 엄마아빠를 교통사고로 모두 잃고 공황상태에 빠진 니은.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지자 이미 돌아가셔서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할아버지 댁 처용포로 내려간다. 아빠가 사랑과 열정으로 지치지도 않게 끊임없이 이야기해주시던 고향 처용포에서 왕고래집 할머니와 장포수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슬픔의 무게를 조금씩 줄여나간다.

  태어날 때부터 저승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던 왕고래집 할머니의 전설적인 이야기와 50년 세월을 포경에 몸담아 포경 역사의 산 증인인 장포수 할아버지. 어떤 생명도 내 손에서 죽어나가는 꼴 보지 않는다며 야생의 개와 고양이를 먹이시는 왕고래집 할머니와 포경이 금지된 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포경선을 자식 다루듯 고이 지키시는 장포수 할아버지의 과거와 현재를 듣고 보며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니은.

  포경이 금지된 이후 급격히 쇠락한 처용포를 관광단지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장포수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포경선을 타고 바다에 나가고 싶다는 조건을 걸고 포경 도구와 포경선을 넘겨주기로 한다. 북위 38도 14분, 동경 138도 29분. 바다에 나오는 것이 마지막이 될 줄 몰랐던 20여 년 전 그날, 할아버지가 던진 작살을 맞고 피눈물을 흘리던 귀신고래를 혹시라도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을까? 어떤 고래는 140년 전에 만들어진 작살을 몸속에 지니고도 살았다고 하니...

  이후, 장포수 할아버지는 너무도 덤덤하게 포경도구와 그에 관련된 추억들을 모두 내어주고 지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고마움을 표시하고는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니은이에게도 행방을 알리지 않고 고래배와 함께 사라지고 만다. 마치 신화처럼.

  모든 이별이 등 뒤로 조용히 다가와 뒤통수를 치고 지나가는 것 같다는 니은이의 생각처럼 우리 삶은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다가온다. 그래도 니은이는 잘 견뎌냈다. 장포수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언젠가 신화처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때, 처용과 황옥 놀이를 즐겨 하시던 엄마아빠도 이야기 속에 살을 붙일 것을 상상하면서...

  니은이가 왕고래집 할머니와 장포수 할아버지에게서 배운 결정체는 ‘오는 것을 잘 맞이하고 떠나는 것을 잘 보내는 것’이었다. 나 역시 알지 못하는 것이 내게 다가올 땐 두려움이 크고, 익숙한 것이 떠나려할 땐 그 상실감에 몸부림을 친다. 이는 내가 아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다. 평생에 걸쳐 잘 맞이하고 잘 떠나보내는 것을 연습하면서 초연해짐을 배우는 것이 어른이 되는 것인가 보다.

 

책 속에서..

기억하는 일은 애 중요해요?
그것을 잘 떠나보내기 위해서지. 잘 떠나보낸 뒤 마음속에 살게 하기 위해서다.
-236쪽 니은이와 장포수 할아버지의 대화

 

내가 지금 두렵고 답답하다면 처음 혼자 서는 순간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처음은 거듭 찾아올 것이다. (중략)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 두려워하기보다는 그 일들을 잘 맞을 준비를 하기로. 몸속에 작살을 꽂고 다니는 백사십살 먹은 고래한테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247쪽

 

나는 이제 어른이 된다는 것의 핵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나이를 먹고 몸이 커지고, 고래배를 타거나 시집을 가는 것 말고, 엄살, 변명, 핑계, 원망 하지 않는 것 말고 중요한 것이 그것 같았다. 자기 삶에 대한 밑그림이나 이미지를 갖는 것. 그것이 쨍쨍한 황톳길을 땀 흘리며 걷는 일이든, 미끄러지는 바위를 한사코 굴려 올리는 일이든, 푸른 하늘에 닿기 위해 발돋움하는 영상이든.

할아버지, 나이가 들면 세상이 어떻게 보여요?
여든 살이 돼도 맘속에는 모든 나이가 다 있다. 열 살 때 생각을 하면 열 살이 되고 마흔 살 때 생각을 하면 마흔 살이 되지. 열 살처럼 세상을 보다가, 마흔 살처럼 세상을 보다가 한다.” - 257쪽 니은이와 장포수 할아버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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