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의 스캔들 1
필리파 그레고리 지음, 허윤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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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어린 시절, 기억에 남는 사극으로 ‘인현왕후’가 있다. 인현왕후는 조선 후기 숙종 때 왕비였으나 왕자를 출산하지 못한다. 소의[조선 때, 내명부의 정2품 품계]였던 장씨에게서 왕자 균(경종)을 낳은 숙종은 균을 세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봉한다. 이후 인현황후를 폐위시키고 원자를 낳은 장희빈을 왕비로 올리면서 균의 세자 책봉은 불가능하다고 한 송시열등과 장희빈의 왕비 등극에 반대한 상소를 올린 박태보 등 80여명은 모두 독약을 먹어 자결하게 하거나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된다.

  이러한 일이 국가의 절대 권력자에게는 비일비재 했다는 것을 ‘천일의 스캔들’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인현왕후와 캐서린 왕비, 장희빈과 앤 불린의 일생이 어쩌면 그렇게 비슷한지 놀라울 따름이다. 15세기 영국의 헨리 8세는 형의 죽음으로 왕권을 계승하고, 형의 아내였던 캐서린 왕비를 아내로 맞는다. 현숙했던 캐서린 왕비는 여러 번의 임신과 출산으로 아이들을 낳지만 훗날 블러디 메리로 불리는 딸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고 만다. 왕자를 출산하지 못한 것 때문에 강제 별거와 치욕스런 이혼을 맛보는 불운의 여인으로 남는다.

  천일의 스캔들은 나방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고 등잔불에 달라붙듯이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찬 불린家 사람들이 자식들을 이용해 굳건한 입지를 다지고자 했으나, 결국 모두(아니, 현명한 메리만 빼고)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비극을 그리고 있다. 집안의 이익을 위해 열두 살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한 메리는 불행하게도 헨리 8세의 눈에 띄고 만다. 사랑을 위해 주변의 극심한 반대를 극복하고 형수를 아내로 맞이했던 헨리 8세는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하는 왕비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젊고 매력적인 메리를 정부로 삼는다(나는 버젓이 남편이 있는 어린 여자를 마음 내키는 대로 취할 수 있다는 것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메리를 향한 헨리 8세의 사랑과 메리의 거듭된 출산으로 가족들은 차기 왕비의 자리를 노리게 되고, 출산준비를 위해 메리와 동거하지 못하는 왕이 다른 가문의 여자들에게 눈길을 줄까 염려해 언니인 앤을 왕 가까이게 심어둔다. 미모와 재치를 겸비한 앤은 왕의 시선을 단 한 순간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게 성공하지만, 메리에게도 돌아가지 못하게 자신의 영향력 아래 왕을 두고 좌지우지 한다. 앤은 왕과의 잠자리를 쉽게 허락해 동생과 같이 밀려나는 것보다, 왕비의 자리에 올라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하고자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을 종용한다.

  결국 이야기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헨리 8세가 교황에게 캐서린 왕비와의 결혼무효를 신청하면서 또 한 번 교황과 대립하게 되고 이 일은 영국 종교개혁의 발단이 된다. ‘천일의 앤’으로 불리는 앤 불린은 캐서린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나, 앤의 왕을 향한 집착과 왕의 불안(앤은 엘리자베스만을 낳았기에 대를 잇지 못하다는)으로 간통과 근친상간의 오명을 쓰고 오빠 조지와 함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왕의 연인이었을 때조차 권력을 쟁취하기보다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자신의 품에 안아 키우고 싶어 했던 메리만은 진실한 사랑을 찾아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무언가에 중독이 된다는 것은 중독된 자와 그 주변인들을 파멸로 몰고 간다. 앤은 왕의 사랑을 원한 게 아니라 자신이 갖게 될 절대 권력을 사모하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정적을 없애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권력을 쟁취한 후 가진 자의 후덕함으로 주변 사람들을 챙겼더라면 목숨은 부지하지 않았을까? 훗날 처형당한 앤 불린의 딸인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등극해 영국의 전성기를 마련했다는 사실을 앤 불린이 살아서 볼 수 없었다니 참 안타깝다. 앤의 부모 역시 가문의 영광을 위해 자식들을 왕의 정부로 떠미는데 적극적이었고, 단두대에서 두 자녀가 처형되었을 때에도 부모로써의 애틋한 심정 따위는 일지 않는다. 귀족의 피는 서민이 피와 다른 것일까? 씁쓸하다.

  뉴욕타임스가 20세기를 마감하면서 지난 천 년 동안 가장 유명한 스캔들로 헨리8세와 앤 불린의 로맨스를 선정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책의 제목이 ‘천일의 스캔들’인 것은 납득이 안 간다. 왜 ‘천일’을 고수하고 싶어 했는지 모르나 ‘천일’을 제목에 쓰고자 했으면 ‘천일의 권좌’ 정도가 어울리지 않았을까? 앤 불린이 왕을 자신의 합법적인 남편으로 만들기 위해 공들인 시간은 8년에 가까운 세월이기 때문이다. 결혼해서 살았던 기간이 스캔들이 아니라 왕의 관심을 받고 결혼에 이르기까지 보여주었던 그들의 행동이 스캔들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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