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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만화 - 그림쟁이 박재동이 사랑한, 세상의 모든 것들
박재동 글.그림 / 열림원 / 2008년 1월
평점 :
십여 년 가까이 정기구독을 하고 있는 ‘좋은생각’의 표지 뒷면을 보면 늘 따뜻한 그림 세상을 만날 수 있다. 판화가로 유명한 이철수님의 정겨운 판화와 함께 몇 마디 안 되는데도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그림에 붙인 글들을 볼 때마다 ‘참 대단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생태화가 이태수님의 정밀화와 붙인 글도 마찬가지다. 그 뿐인가? 단 한 컷으로 우리나라와 세계 곳곳에서 이슈가 되는 문제를 명쾌하게 표현해주는 신문의 시사만화를 보면 내 나름대로 이름붙인 ‘압축의 미학’에 감탄할 때가 많다.
책을 펼치면 앞뒤로 책을 소개하는 글이나 의도가 많이 나와서 지루해질 때가 있는데, 박재동 선생님의 ‘인생만화’는 짧은 양력을 제외하고는 너무도 깔끔하게 본론으로 들어간다. 한겨레신문 창간호부터 8년에 걸쳐 한 컷짜리 만평을 연재하셨다고 하는데, ‘인생만화’에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아닌 나와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출근길 하루도 빠짐없이 휴지를 줍는 할머니를 보며 휴지가 아닌 세월을 쌓는 것이라 생각되는 건 박재동 선생님처럼 내게도 쌓아서 아름답게 완성될 그 무언가를 소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동네만 해도 휴지를 모으고 다니시는 할머니들을 열 명 넘게 안다. 정말 생활이 궁핍해서 다니시는 분들도 있지만,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시간을 때우려 일을 시작하신 분도 있다. 그러고 보면 휴지를 줍는 것은 세월을 쌓기도 하고 버리게도 만드는 것이구나. 정년퇴직을 한 달 앞두고 몸이 아파 회사를 그만 두신 친정엄마가 자식들에게 용돈 받아쓰는 게 미안하다며 몇 달 전부터 빌딩 청소를 다니시는데, 갑자기 신문 보던 것 버리지 말고 모아달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유를 물으니 ‘빌딩 청소하면서 나오는 폐지를 모아 팔았더니 돈이 조금 되더라. 이제는 종이 한 장도 모두 돈으로 보인다.’고 하신다. ‘죽으면 썩어질 몸 아껴서 무엇 하냐?’면서 늘 쉬지 않고 일하시는 부모님에게서 어렵게 사는 자식들에게 행여나 부담주지 않을까 하는 속내가 빤히 비쳐지기에 폐지 모으는 엄마의 모습은 내 마음을 아릿하게 만든다.
오십도 안 되어 하얘진 머리카락 때문에 꼬마들에게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서글픔은 피곤한 날 예민하게 빈자리를 찾으며 흰머리를 방패로 노약자석에 앉을 때에는 슬그머니 사라진다. 왜 안 그럴까? 나도 임신했을 때 버스에 오르면 ‘누가 자리 좀 양보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나온 배를 한껏 더 내민 경험이 있기에 백번 이해하고도 남는다. 하하하.
‘아들이 열여섯 살이 되면 친구로 대하라’는 인도 성현의 말처럼 아들을 친구로 대하려는 박재동 선생님의 노력의 결과(?)로 컵라면 용기에 수북이 쌓아놓은 담배꽁초더미를 ‘바벨탑’이라 부르며 내 보기엔 억지인 것 같지만 ‘감각이 있다’라고 표현하는 대목에선 어이없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세상 그 어떤 부모가 자식 앞에서 객관적일 수 있을까? 절대,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모를까.
진달래가 피면 진달래를 그려야 하고, 개나리가 피면 개나리를 그려야 하고, 목련이 피면 목련을 그려야 하는데, 또 매화가 피었다. 그림 그리는 게 업인 박재동 선생님은 참 복이 많은 분이구나. 그려야할 소재를 고민하지 않아도 철마다 '날 그려주세요‘하고 벙긋벙긋 웃는 꽃들이 있으니 그 기쁨을 ’내가 천년을 살아야 하는 이유‘에 담아 놓으셨다.
도심 속의 너구리도, 매미도, 터진 감과 단풍도 난지도 같은 방마저도 모두 그림의 소재가 되고 생각의 물꼬가 트이게 하는 것은 아마도 박재동 선생님만이 가지고 계신 ‘눈’일 것이다. 그 이전에 누구에게나 똑같이 보이는 것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채색할 수 있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 온 뒤에 짙은 색으로 변하는 나무 등걸이나 깨알같이 작고 예쁜 꽃을 보고 감동할 수 있는 준비된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만화’는 내내 손에 들고 시간과 정성을 들여 보아야 하는 책이 아니다. 손닿기 쉬운 곳에 두고 생각 날 때마다 아무 곳이나 펼쳐 놓고 읽을 수 있는 편안함과 잠시라도 사색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준다. 그래서 더 좋은 ‘인생만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