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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슬립 - 전2권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이수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시간이동 < 2001년 9월 12일 오지마 겐타 -> 1944년 9월 12일 이시바 고이치 >
게임크리에이터가 꿈인 오지마 겐타는 현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이다. 꿈이 있긴 하나 적극적으로 매달리는데 인내와 노력이 부족하다. 대학을 포기하고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유난히 자신을 마뜩잖게 생각하는 홀 책임자 야마구치에게 술을 끼얹고 나온다. 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여자 친구 미나미와의 전화 통화로 어수선해진 머리와 마음을 달래려고 서핑을 하러 바다에 온 겐타는 갑작스럽게 밀려온 파도에 휘말려 정신을 잃게 되고 다시 깨어났을 때에는 생김새와 체격, 글씨체와 취향까지도 닮은 가즈미가우라 항공대 비행연습생 이시바 고이치의 대역을 맡게 된다. 무절제한 생활의 표본인 겐타가 규율이 엄격한 그것도 전시상황의 군인으로서 행동하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지만 21세기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꼭 살아 있어야 했기에 인내를 가지고 하루하루를 견뎌낸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을 역사로 배워 알고 있기에 그동안 살아만 있다면 다시 시간이동을 할 수 있다고 믿은 겐타는 항공대가 아닌 특공대로 착출 되어 인간어뢰 훈련을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만난 사관 가모시다와 파도에 휩쓸렸을 때 도와준 청순한 여인 후미코가 여자 친구 미나미의 조부모임을 알게 되고 잠수정에서 바다에 떨어져 익사 직전에 구해 준 정비병 오지마가 자신의 할아버지임을 알게 된다. 무슨 일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과거로 돌아와 자신이 꼭 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깨달은 겐타는 패전 소식에도 군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함장에 의해 인간어뢰에 탑승하게 될 가모시다를 제지하고 스스로 죽음의 길(타임 슬립의 공간을 찾아)을 떠난다. 그 때가 1945년 8월 16일이다.
별세계 <1944년 9월 12일 이시바 고이치 ->2001년 9월 12일 오지마 겐타 >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여동생 이후에 이시바 고이치의 소망은 비행사가 되는 것이다. 어렵게 가즈미가우라 항공대 비행연습생으로 첫 비행을 나선 날, 알 수 없는 이유로 기체에 결함이 생겨 낙하하면서 정신을 잃고 만다. 다시 깨어났을 때에는 사람도 건물도 물건도 모두 생소한 별세계에서 오지마 겐타라 불리는 닮고 싶지 않은 자가 되어 있었다. 사실을 말하지만 모두들 사고의 충격으로 인한 기억상실이라 생각하고 더 각별히 애정을 쏟으며 돌보아주는 겐타의 부모와 여자 친구 미나미로 인해 피끓는 애국전사 이시바에서 겐타로 살고 싶은 소망을 갖게 된다. 하지만 어려서 죽은 동생의 묘를 찾아 갔다가 비행연습에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지 않고 일본 패망 직후에 사망한 것을 알려주는 자신의 묘를 보고 겐타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게 된 후 시공간을 다시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노렸다. 미나미와 함께 떠난 휴가지 바닷가에서 잠수를 하며 겐타를 부르던 고이치는 산호초에 옷이 걸리면서 바다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그 때가 2002년 8월 16일이다.
타임 슬립은 쌍둥이처럼 닮은 두 청년 겐타와 고이치가 서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겪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그려 놓았다. 맥없는 인생을 사는 것 같았던 겐타가 과거로 가서 끔찍한 전시상황에 던져졌어도 유머와 재치(정신봉에 미리 금을 내어 쉽게 부러지게 만든다던가 엉덩이 사이에 탈지면을 끼워 충격을 덜어주는 일 등)를 잃지 않고 오히려 인내와 용기를 배워가는 과정과 전시의 긴장감과 빈곤에서 갑자기 풍요로운 시대에 던져진 고이치가 현대에 적응해가는 과정(달나라 여행에 버금가는 놀라운 발견인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낼 수 있고 치킨과 콜라에 길들여지게 된다)에서 긴장을 늦추고 젊은이다운 열정을 발산하는 과정을 재미있게 펼쳐진다. 항상 생명을 위협받는 겐타와는 달리 재미있는 부모님(아버지의 모습은 앤서니 브라운의 ‘행복한 미술관에 나오는 아빠의 캐릭터와 정말 많이 닮았다. 특히 썰렁한 농담을 즐기는 면에서)과 상상할 수 없는 과학기술의 발명으로 모든 것들이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고 그것들을 익혀가면서 고이치가 점점 겐타화 되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소설이 타임 슬립이라는 재미있는 주제로 위와 같은 스토리만을 담고 있다면 그다지 마음에 남는 작품이 되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로의 여행과 미래로의 여행에서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좀 무겁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참 많다.
고이치가 본 미래의 모습에서는 넘치는 것이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50년 뒤의 일본은 너무 많은 물질과 욕심과 소리와 빛과 색의 세상이었다. 다들 자신의 모습을 봐달라고, 자신의 소리를 들어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겸허도 수치도 겸양도 규범도 안식도 없었다.’ p.254
소설의 곳곳에서 전쟁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고통 받게 했는지, 전쟁은 침략당하거나 지배당한 나라만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침략국의 힘없고 무지한 백성과 교묘하게 애국심을 자극해 지원하거나 착출당한 군인들에게도 그만한 고통을 동반하게 만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작년에, 옆 동네 지주 집 셋째 도련님이 육군 유년학교에서 도망쳤다가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우. 열다섯 살밖에 안 되어서 그대로 다시 끌려갔지만, 육군도 체면 때문에 쉬쉬했재.’
p. 120
‘쓰네오 말로는 그러다가는 적하고 싸우기도 전에 먼저 죽어버릴 것 같다고 그러더구먼.’
p. 120
‘아직 변성기도 끝나지 않은 어린아이들의 목소리였다.’ - 겐타가 끌려간 항공대에서 구타를 당할 때 물을 떠 온 병사들 p.192
‘한 때의 광기에 들떠서 아무런 견식도, 예측도 없이 전쟁을 벌였다.’ p. 219
‘남자라는 이유로 죽을 날과 장소를 기다려야 하고, 그것이 언제 어디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 계속 - ’ p. 241
‘식사는 죽과 매실장아찌, 삶은 달걀이 전부였다. 소박하기는 했지만 기요 할머니가 차려준 밥상만큼 가혹하지는 않았다.’ - 민간인이 처한 상황 - p. 257
‘기량과 도량에 따라 적을 공격하는 것이 항공대이련만, 군사령부는 비행기 탑승원을 단지 비행기를 조종하는 기계로만 보는 것 같다. -중간생략- 결국 조종간을 쥐어본 적도 없는 군사령부 녀석들이 책상 위에서 만들어낸 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 녀석들 머리에 머리띠를 둘러서 조종석에 처넣고 그 잘난 놈들부터 먼저 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 p.303
‘인간어뢰. 별칭 그대로 말도 안 되는 병기다. 한번 발사되면 멈출 수 없다. 돌아올 수도 없다. 가미카제 특공대보다 더 심했다.’ - p.410
‘본 군대는 병기는 치졸해도 마음을 부추기는 기술만큼은 교묘했다.’ p. 436
‘모두 죽음이라는 말을 명예와 동의어라고 믿었다.’ p.456
'내가 말하는 당신은 천황 폐하가 아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사는 곳에 공습을 하루라도, 한 번이라도 막을 수 있다면, 무엇이 아까우리요 미천한 목숨도.‘ p.467
'8월 16일.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교과서에는 이렇듯 전쟁을 그만두지 않으려는 인간들이 있었다는 이야기 따위는 실려 있지 않았다. 연사 연표에는 단 한 줄. 1945년 8월 15일 종전이라고 쓰여 있지만, 생각해보면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전쟁이 이벤트 종료일처럼 오늘까지만, 감사합니다라는 한마디로 끝날 리 없었다.‘ p.520
‘타임 슬립’을 읽고 나니 한 시도 평안을 누릴 수 없었던 전시가 더 나쁜 것인지, 오로지 물질만 풍요로운 현 시대가 더 나쁜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직접 빠르고 효과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과 서서히 영혼을 고갈시키는 것의 차이일 뿐이란 생각을 해 보았다. 앞으로 정리해야할 숙제가 쌓여있는 기분을 느끼게 한 책, ‘타임 슬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