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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평점 :
사람이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해서 존경심이 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의 인생이 감동적인 것도 아닐 것이다. 가끔 버스를 탈 때, ‘아,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란 생각이 들게 만드는 어르신들이 있는가하면, 너무 추해서 외면하고 싶어지는 경우도 있다. 등이 굽어 서 있는 자세가 불안해 보이긴 해도 깔끔한 옷차림에 선한 미소를 지닌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해 드리려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어르신께서는 존댓말을 써 주시며 몇 정거장 안 간다며 학생도 힘들 텐데 그냥 앉아 있으라고 하는 예가 전자의 경우요, 늙은 이 특유의 냄새를 독하게 풍기면서 빈자리가 눈에 띄지 않으면 요즘 젊은 것들은 노인을 공경할 줄도 모르는 싸가지도 없는 것들이라며 앉아 있는 모든 사람과 서 있는 사람들까지도 불쾌함에 눈살 찌푸리게 하는 예가 후자의 경우다.
70이 넘어서도 가슴을 울리고 생각의 물꼬를 트게 만드는 글을 쓰시는 작가 박완서님을 버스에서 만나게 된다면, 아마도 전자와 같은 어르신의 모습으로 다가서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박완서님이 평소 버스를 자주 이용하시는지는 잘 모르겠다.) 20대 초반에 처음 박완서님을 만난 건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였다. 그다지 길지 않은 중편정도의 소설을 읽으면서 치를 떨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 때에도 어쩌면 사람의 마음과 소소한 행동들을 이렇게 잘 묘사해 놓았을까,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이 일게 만드는 책이었다.
이제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다시 박완서님의 ‘친절한 복희씨’를 앞에 두었다. 아홉 편의 짧기도 하고 적당히 길기도 한 소설들이 재미있는 제목 아래 함께 모여 읽는 이의 반응을 살펴본다. 너무 빨리 읽어서 이 재미난 소설집을 하루나 이틀 새에 모두 읽어 책장에 꽂히는 게 아까울 만큼 아홉 편의 이야기는 소름끼치게 재미있거나 슬프거나 화나게 한다.
그 중 몇 편을 소개해 본다.
잘 배우지도 못하고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그나마 늙은 남편이 죽기 전에 많이 아파서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 만만하지 않은 세상을 향해 욕도 하고 투정도 부릴 만한데, 사랑 하나도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긍정과 바지런함으로 새로운 행복을 찾아 나선 이의 따뜻한 이야기, 그리움을 위하여.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 전쟁이 나서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70대 노인의 첫 사랑을 기억할 수 있게 만드는 ‘그 남자네 집’은 분명 박완서님의 젊은 시절을 회상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작가의 약력에 일치한다. 이 글을 읽고 남편에게 들려주니 글 쓰는 이의 경험이 들어가지 않은 책을 쓰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을 한다. 나 역시 공감하는 바이고. 앞으로 태어날 자식들을 위해 낡은 둥지에 안주할 수 없었다는 말 역시 깊이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머니 된 자들의 공통된 성향이 아닌가 싶다.
오남매의 중간으로 태어나 빈곤함이 젖은 옷처럼 달라붙어 답답하던 차에 미국으로 이민 갔다 고국에서 신붓감을 찾는 남자에게 시집을 간 ‘앤’. 자신의 성을 버리기 싫어 ‘안’과 발음이 비슷한 ‘앤’으로 개명하고 풍요로운 미국생활에 기쁨을 느낀다. 어린 시절부터 언니들과의 사이에 있었던 경쟁에서 우월감을 느끼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아버지의 부음에 모두가 살만해진 한국으로 잠시 다녀 온 앤은 예전처럼 미국생활이 기쁘지 않다. 모든 것이 시들해진 사이 어머니의 치매 소식을 듣고 다시 한국을 찾은 앤은 어머니가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와중에도 무쇠 솥에 밥을 지어 ‘후남아, 밥 먹어라’라고 하는 소리에 지금까지 자신을 짓누르던 긴장을 놓게 되며 휴식을 취하게 된다. 못 살던 시절에 ‘밥’이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그냥 이름만 부르지 않고 꼭 ‘밥 먹어라’를 붙여서 자신을 부르던 어머니를 이해하게 된다.
‘자식 키워놓아야 말짱 헛것이다’란 말이 실감나는 ‘촛불 밝힌 식탁’. 시골 학교의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하고 손자들 재롱 볼 생각에 서울 사는 아들네와 매끄럽지 못하게 서로 바라보는 아파트로 이사를 한다. 경우 바르다(?)는 중학교 선생인 며느리와 예의바른 손자들. 지척에 두고 수시로 보고 싶어 하는 늙은 부부의 마음이 아들 가족에게 짐이 되는 것을 알아차리고 돌아서는 그 모습은 굳이 글로 표현하지 않아도 무겁다.
박완서님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가벼운 터치에 묻어나는 진중함이다. 쉽게 읽혀지는 것에 비해 그 여운은 너무도 길고 깊다. 이제 언제라도 생각나면 아무데나 펼쳐서 읽을 수 있는 좋은 작품집이 있으니 뿌듯하다. 부자가 된 것 같다. 이야기만으로 부자가 될 수 있는 나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