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경제 깡패들
테드 네이스 지음, 김수현 옮김 / 예지(Wisdom)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기업은 힘이 세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이 나돌아 다닌 지도 이미 오래 전이다. 아예 '기업국가'라는 말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나가는 어떤 기업은 조사하러 나온 국가공무원에게 대놓고 무력을 행사하며 출입금지를 시키기도 한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이 기업을 10년 연속 가장 취업하고 싶고, 훌륭한 기업으로 손꼽는다. 특히 요즘 들어 함량 미달의 경제민주화 정책들이 거론되자 자꾸 이렇게 못 살게 굴면 대한민국 기업들이 해외로 모두 떠날 것이라며 국민들을 윽박지르고 있다. 그야말로 많은 기업이 갑이고, 국가와 국민은 을인 세상이다

 

   그렇다면 기업은 언제부터 이렇게 ''의 위치에 오른 것일까. 저자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중세 길드와 영국 동인도회사의 발자취를 통해 미국 기업 제도의 뿌리를 살핀다. 이에 따르면 현대의 기업은 중세 길드를 모태로 하고 있으며, 14세기경에 이르러 대항해 시대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공동출자 방식으로 조달하는 등 무역회사의 특징들을 일부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 공동출자 방식을 가장 발전시킨 것이 1600년에 설립된 영국 동인도회사였다. 공동출자 등의 개념은 기업이 그 소유주로부터 분리되어 개별적인 법적 존재를 갖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닌다. 즉 기업은 언젠가는 죽게 마련인 소유주의 한정된 수명에 구속받지 않는 불멸성, 소유주들이 기업의 과실, 범죄, 부채 등으로부터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유한책임 등 기업 특성의 가능성을 열었다.

 

  영국이 동인도회사를 통해 식민지 미국의 경제력을 장악하려 하자, 미국인들은 이에 반발해 독립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의 승리로 어렵사리 독립한 미국은 동인도회사의 예처럼, 기업이 권력을 축적하면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때문에 당시 미국 정치인들은 기업의 자유보다는 기업에 대한 민주적 통제에 초점을 맞춰 법을 제정했다. 즉 기업을 만들고 운영하는데 있어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것이다.

 

  몇 가지 예만 들어보자. 우선기업에 대한 설립허가기간을 규제했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20~30년 만에 한 번씩 신규 허가를 취득해야 했다. 삼성그룹이 일정한 기간이 되면 국회로부터 설립 존속 여부를 허가받아야 한다는 것을 상상해보라!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와 권력을 축적하여 거대해지려는 기업의 속성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다.기업의 유한책임을 인정하는 데에도 매우 인색했으며, 기업은 설립허가에 명시되지 않은 어떠한 활동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기업은 다른 기업의 주식을 소유할 수 없었으며, 기업이 조달할 수 있는 자금에도 제한을 두었다. 허가가 난 지역 이외에서 운영하는 것도 금지했으며, 인허가된 활동에 직접적으로 필요치 않은 토지를 소유하는 것 역시 금지되었다. 한마디로 불과 2세기 전만 해도 기업은 국가 의지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국민의 눈치를 보는 나약한 존재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가히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미국을 처음 세운 선구자들이 만들어 놓은 기업에 대한 규제들이 하나씩 풀리더니 마침내 기업은 인간과 같이 헌법의 보호를 받는 인격체로 거듭나기에 이른다. 그것은 온갖 규제에도 불구하고 점점 거대하진 기업들과 정치인, 법조인, 로비스트들의 결탁하여 만들어낸 정경유착의 결실이었다. 이 과정은 너무나 단순하고 또한 친숙하다. 기업들은 대통령을 포함하여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있는 정치인들로 하여금 친기업적인 판사들을 연방과 각 주의 대법관에 임명하도록 하고, 그 대법관들은 기업의 이익을 위한 판결들을 쏟아냈다.

 

  그 결과 미국 기업은 법적으로 인간과 같은 권리를 획득하기에 이른다. 원래는 해방 흑인 노예들을 위해 제정된 수정헌법 속 적법절차와 동등 보호의 권리, 자유의 권리, 재산권을 보장받을 권리,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 등을 엉뚱하게도 기업에게까지 확대되었고, 기업들은 이를 근거로 법정 의무노동시간을 지키지 않고 노조를 무력화하며 주 정부의 가격 규제를 무산시키는 등 시장을 완전히 장악한다. 국민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던 기업들이 어느새 국민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 탈바꿈한 것이다. 나아가 이제 기업권력은 초국적 기업이라는 미명 아래 국경을 넘어 전 세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처럼 무섭게 내달리는 기업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 책에 따르면 그 시작은 기업이 누리는 여러 가지 권리는 자연권이 아니라, 국민들에 의해 부여된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데서 비롯된다고 한다. 기업권력은 결국 국민들이 용인한 것이므로 얼마든지 이를 제한하거나 취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경제민주화가 진전되고 성숙되어야 기업권력을 제어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러한 결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대통령이 먼저 나서서 경제민주화를 이루겠다는 대선공약을 헌신 버리듯 내팽겨 던지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답답하고 한심스럽다. 후안무치한 기업권력을 내버려두고도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될 수 있을까. 계층간 양극화가 최소화된 복지국가로 도약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어떻게 해서 미국 기업의 이익이 인권에 우선하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분석해 내고 있다. 우리 삶에 가하는 기업의 통제에 맞서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하워드 진의 소개처럼, 이 책은 영혼도, 형체도 없는 기업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인간의 지위에 올라서고, 또 어떻게 인간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지에 대한 역사를 조망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경제민주화는 결코 신세계를 만들자는 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이미 150여 년 전에, 그것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판치는 미국에서 실현된 바 있었으며, 그 결과도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이 무척 반갑다.

 

  물론 그 당시와 현재의 상황이 많이 다르다. 기업의 역할과 공로도 인정해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처럼 약자를 괴롭히는 깡패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는 기업들은 더욱 많다. 기업이 탐욕의 화신이 아니라 좀 더 선한 존재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관심과 비판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이 말은 두고두고 기억할 필요가 있는 명언이 아닐 수 없다.

 

"기업법인 설립허가 제도는 민주주의가 융성하고 민주 권력이 기업 권력을 압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달리 말하면, 민주주의가 공공영역에서만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시야 안에 개인만 있고 기업은 고려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진실로 허약한 것이다."(8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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