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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도 1
김석범 지음, 김환기.김학동 옮김 / 보고사 / 2015년 10월
평점 :
일제시절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살던 남승지는 해방과 함께 새로운 조국에 대한 희망을 안고 귀국한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한반도는 좌우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남승지는 곧 조국에 찾아온 해방이 환상이었음을 깨닫고 학우들과 투쟁에 나섰다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다. 한반도 전역에서도 반미, 반이승만 기운이 강했던 고향 제주로 내려온 남승지는 남로당 당원이 되어 남조선 단독선거를 막기 위한 조직 활동에 전념한다.
제주지역에서 손꼽히는 재력가의 아들인 이방근은 일제말기에 사상범으로 체포돼 1년간 복역 경험이 있는 민족주의자이다. 어느 날 남로당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국민학교 동창 유달현으로부터 이제 곧 제주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날 거라는 사실을 듣게 된다. 유달현은 이방근을 비밀 당원으로 포섭하기 위한 일환으로 이 비밀을 알려준 것이다.
이방근은 밤늦은 술집에서 행패를 부리는 악명높은 서북일당을 쓰러뜨리고 경찰에 연행되어 하룻밤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된다. 그곳에서 남로당 간부인 강몽구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리고 그가 남승지의 친척 형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다.
"...당시에는 저도 미국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었어요. 적어도 우리에게 독립을 안겨준 것은..., 으-음, 일본을 패망시킨 건 미국이 틀림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대신해서 그대로 눌러앉으려 하고 있단 말입니다. 겉으론 이승만을 내세우며 말이죠... 감탄할 만할 일이지요. 그들은 우리 민족을 미개한 야만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민'자도 모르는 종족으로 말입니다. 그들에게 공산당은 '서북' 놈들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자들에 불과합니다. 아니, 그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앙군정청의 조선인 관리들은 모두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관리를 했던 자들이니까요. 중앙군정청의 어떤 미군 장교가 자국의 신문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군정청에 고용되어 있는 조선인들은 참기 어려운 부정한 음모를 꾸미는 선수들이다. 우리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부리고 있는 이 자들은 과거에는 기꺼이 일본과 손잡고 더러운 짓을 해 온 자들이다, 사실 현재의 경찰 가운데에는 민족주의자를 잔인하고 열성적으로 탄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자들도 있다...라고 말입니다. 정말이지 그 미군 장교의 말이 딱 맞습니다." 263~264쪽
"형체를 낮추며 태양 밑을 지나가는 바람 저편에 보이는 것-수만 군중의 행진, 만세와 구호를 외치는 소리. 3.1 독립운동 28주년 기념 인민대회를 저지하려는 경찰. 기관총을 든 기동대와 기마대의 호령. 총성, 비명, 분노의 외침, 학생들의 투석, 군중의 격렬한 흐름에 땅이 기울어질 듯 성내가 흔들리고 또 흔들리고... 아버지가 그 건물 2층에서 보고 있었을 식산은행 앞에서 한 소년이 사살당했다. 아니, 그 소년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경찰의 발포로 여섯 명이 죽고 십여 명이 중상, 시체를 메고 총구 앞으로 나아가는 성난 파도와도 같은 항의 데모..., 사상자들이 흘린 피를 비추는 3월의 하얀 태양. 작년의 3.1절 집회 저지를 지휘한 사람은 군정청의 미군 장교였다. 이방근은 당시 본토를 여행 중이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도 정세가 갑자기 악화되 것을 집으로 돌아온 뒤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1946년 12월에 서울에서 결성된 '서북청년회'의 횡포가 심해졌다. 반공 투쟁의 선봉, 반공투사, 멸공부대를 자처하고 행하는 그들의 테러와 폭력 행위가 경찰력을 업신여기며 무법화되는 것을 이방근은 지켜보았다." 2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