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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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던 날은 몹시 추웠다..(중략) 발인날은 더욱 추웠다. 아버지의 관이 내려갈 때 나는 내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지는 않기로 작심했다. 내 아버지가 조국이라는 운명을 저주했듯이 나는 내아버지의 시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너무나 슬퍼서 조국을 버리고 싶다던 내 아버지의 젋은 날의 글을 읽으면 지금도 나는 목멘다.

지난 한식 때 심은 잔디가 잘 퍼져 있다.
기도한다.

주여 망자에게 평안을 주소서.

주어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허상은 헛됨으로써 오히려 완강할 테지만 실체는 스스로 자족하므로 완강할 이유가 없을 것이었다.

밥벌이도 힘들지만, 벌어놓은 밥을 넘기기도 그에 못지않게 힘들다. 술이 덜 깬 아침에, 골은 깨어지고 속은 뒤집히는데, 다시 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김 나는 밥을 마주하고 있으면 밥의 슬픔은 절정을 이룬다. 이것을 넘겨야 다시 이것을 벌 수가 있는데, 속이 쓰려서 이것을 넘길 수가 없다. 이것을 벌기 위하여 이것을 넘길 수가 없도록 몸을 부려야 한다면 대체 나는 왜 이것을 이토록 필사적으로 벌여야 하는가. 그러니 이것을 어찌하면 좋은가. 대책은 없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적대적이거나 우호적이지 않지만 인간은 우호적이지 않은 자연을 적대적으로 느낀다. ‘무위‘는 자연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손댈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열대의 밀림은 가르쳐주었다.

내가 일을 싫어하는 까닭은 분명하고도 정당하다. 일은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부지런을 떨수록 나는 점점 더 나로부터 멀어져서, 낯선 사물이 되어간다. 일은 내 몸을 나로부터 분리시킨다. 일이 몸에서 겉돌아서 일 따로 몸 따로가 될 때, 나는 불안하다.

그러나 누구의 삶인들 고달프고 스산하지 않겠는가. 나무통이 좁아서 뿌리가 비어져나온 옥수수를 들여다보면서 나는 새로운 슬픔으로 지나간 슬픔을 위로한다.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 나는 이 무사한 하루하루의 순환이 죽는 날까지 계속되기를 바랐고, 그것을 내 모든 행복으로 삼기로 했다.

인간은 보편적인 죽음 속에서, 그 보편성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이 혼자서 죽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이다. 다들 죽지만 다들 혼자서 저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하는 것이다. 죽음은 보편화되지 않고 공유되지 않는다.

인간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고, 인간만이 인간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인간만이 인간을 위로할 수 있다는 그 단순명료한 진실을 나는 질주하는 소방차를 보면서 확인한다.

삶은 풍화이며 견딤이며 또 늙음이다. 살아서 무엇을 이룬다는 일도 그 늙음과 견딤 속에서만 가능하다. 삶은 그림보다 무겁고, 그림보다 절막하고, 그림보다 힘들다.그리고 삶은 그림보다 초라하다. 그림보다 꾀죄죄하고 그림과는 비교할 수 없이 훼손되어 있는 것이 삶의 올바른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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