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일지 몰라도 반드시 때가 온다. "안녕"이 반기는 인사가 아니라 작별 인사가 되었구나 깨닫는 때가 온다. 그리고 죽음, 그것은 삶이라는 임시직 후에 찾아오는 상근직이다. 이제는 애써 고개를 틀지 않고서는 반대쪽을 바라볼 수가 없으니, 죽음이 다가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머리로야 납득하고 있어도 당장의 현실은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고통 속에서 때어나고, 자신의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
요람은 심연 위에서 흔들거린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건대, 우리는 단지 영원이라는 두 어둠 사이 잠시 갈라진 틈으로 새어나오는 빛과 같은 존재다.
그 어떤 심오한 철학보다 더 큰 지혜가 육체에 담겨 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전환이다.` 이 말은 모두에게 위안이 되었다. 디키는 영원히 사라진 게 아니다. 디키는 공수전환을 뛰고 있을 뿐이다.
시도가 실패한다고 해도 무슨 상관인가? 모든 인생은 결국에는 실패한다. 우리가 할 일은 시도하는 과정에서 즐기는 것이다.
인생은 세가지 사건이 전부이다. 태어나고, 살고, 죽는 것. 우리는 태어나는 것은 스스로 알지 못하고, 죽을 때는 고통 속에 떠나고, 사는 것은 잊어버린다.
누구나 죽어야 하지만 나는 늘 나만은 예외일 것이라고 믿었다.
세상의 하고많은 놀랄 일들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무엇이냐? 사람이 주변에서 남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은 죽지 않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앎은 고통에서 얻어지고 삶은 죽음으로 완성된다.
아이들이 물었다, 인생의 의미는 죽음에 있어요? 나는 말했다, 아니, 인생의 의미는 인생에 있단다. 그러자 아이들이 물었다, 하지만 죽음이, 가장 근본적인 전제로서, 일상의 지리멸렬함을 초월하게 해줄 도구가 아니던가요? 나는 말했다, 그래, 어쩌면. 아이들이 말했다, 마음에 안 들어요.
나는 세상을 떠나면서 아무런 후회도 쓰라림도 없다. 나는 멋진 인생을 살았다. 그대들 모두에게 평온한 미래가 있기를. 샬롬.
삶은, 내가 10세부터 줄곧 말해온 대로, 무지무지하게 흥미롭다. 44세인 지금의 삶은 24세일 때보다, 굳이 말하자면, 더 빠르고, 더 통렬하고, 뭐랄까, 더 절박하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향해 달려가는 강물처럼. 죽음도 새롭게 보게 된다. 죽음은 활동적이고, 긍정적이고, 다른 것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고, 신난다. 그리고 무척 중요하다. 하나의 경험으로서.
제가 보기에 삶은 단순하고 비극적이에요. 그리고 기이하리만치 아름다워요.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 어떻게 보면 바로 그런 자세였다. 기존의 지혜를 의심해보라는 것, 스스로 본 시각을 고집하라는 것, 언어를 운동장처럼 생각하라는 것, 운동장을 천국처럼 생각하라는 것. 아버지는 내 입과 내 타자기에서 흘러나오는 단어들을 사랑하라고 알려주었고, 내가 내 몸에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사랑하라고, 다른 누구의 거죽이 아니라 내 거죽에 담겨 있는 사실을 사랑하라고 알려주었다.
"죽음은 언제나 추해요. 언제나. 존엄한 죽음 따위는 없어요. 존엄하게 살 수 있을 뿐이지." 언젠가 나도 죽겠지만, 그 언제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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