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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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하여 학교 기숙생활의 경험은 없지만 그 시절 주인공인 것처럼 이야기속으로 빠져들었다. 시대상은 몇 년 차이가 나는데 회사 생활할 때 기숙사에 있어봐서 학교기숙사는 이렇구나 상상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중년 여인 김유경이 김희진의 소설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를 읽으며 시작된다. 그들은 대학 동창이면서 가장 친하지도 않고 끊어진 사이도 아닌 묘한 관계의 오랜 친구이다.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전혀 다르게 묘사된 소설 속 기숙사 생활을 읽으며, 기억을 더듬어본다. 1977년과 2017년을 무대로 이야기는 펼쳐진다.

 

첫날을 기억한다. 기숙사 철문으로 들어서자 오른쪽에 수위실이 나타났고 눈앞으로 넓은 잔디밭이 펼쳐졌다. 3월의 잔디는 아직 누런색이었다. 잔디가 끝나는 곳에는 앙상한 등나무 퍼걸러와 벤치가 있었는데 그 뒤로 날카로운 가시철망을 두른 높은 담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 맞은편에 베이지색과 자주 색이 배합된 4층 기숙사 건물이 남쪽으로 난 수많은 창문으로 거느리고 세련된 자태로 서 있었다.p28

 

40년 전 1977년 지방에서 올라온 김유경은 서울 여자 대학교에 입학 하여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된다. 기숙사에서 중요한 것은 룸메이트다. 네 명이 한방을 쓰는데 국문과 1학년 김유경이 배정 받은 322호는 3학년 최성옥, 2학년 양애란, 1학년 오현수가 있다. 최성옥과 절친인 송선미의 417호는 2학년 곽주아, 1학년 이재숙, 불문과 김희진. 두 방 사람들은 종종 모이기도 한다.

 

회사를 처음 입사 할때 낯설고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기숙사도 마찬가지다. 먼저 들어온 선배가 군기를 잡고 기숙사의 규칙을 말해주기도 한다. 기숙사로 걸려 오는 전화를 사무실에서 받아 메모를 해준다. 방 룸메이트가 대신 받아주기도 하고, 점호 시간이 가까워지면 기숙사가 소란스러워진다. 사무실 창문 앞에 붙어 있는 메모지를 확인한다. 점호 시간에 늦으면 혼자만 벌을 받는게 아니라 같은방 룸메이트 모두가 사감실로 불려 간다. 꾸지람을 듣고 벌칙으로 청소를 해야 한다. 귀가증을 끊어 나갔다가 새벽에 여관길에서 남자와 팔짱을 낀 모습이 목격돼 사생들의 입방아를 견디지 못해 퇴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가 기숙사 생활을 할 때 제일 기억나는 일은 세탁이었다. 일이 끝나면 좋은 자리(일명 빨래터)를 맡아 빨래를 해야 했다.

 

대학생활의 꽃인 5월의 축제가 열리고, 이성 친구도 만날 수 있는 미팅도 주선한다. 주인공 김유경에게는 말을 더듬는 약점이 있다. 심한 말더듬이는 아니라서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대개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매사에 튀지 않고 모범생으로 된 것도 말더듬증이다. 고등학교<교련>시간에 구령 외치기를 강요당하고부터 트라우마가 생겼지만 친구들은 소극적인 모범생에서 소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는 몰랐겠지만 세 번째 공주를 다방에서 뛰쳐나가게 한 것은 무엇보다 그런 두려움과 불안이었다. 약점에 대처해왔던 방식 그대로 나는 노력하고 준비해야만 나를 드러낼 수 있었고,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으며, 그리고 피해버렸다.p179

 

소설 속 사생들을 공주로 지칭하며 이름은 영어 알파벳 대문자로 표시하였다. 예를 들어 양애란은 Y공주, 곽주아는 K공주. 김유경은 어느 대목에서 책을 덮었다. 익숙한 이야기였지만 읽기 쉬운 글은 아니었기에 소설 속의 많은 이야기가 김유경이 공유한 경험에서 나왔다는 점도, 그 중에서 미쳐 보지 못했던 쪽을 조망하고 있다는 점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김희진의 낭독회에 참석을 하였는데, 30대로 보이는 여자가 색이 바랜 책을 내밀며 이름은 적을 필요 없고 사인만 해달라고 말했던 독자가 궁금했었다. 독자는 작년 겨울에 돌아가셨고 딸이 엄마의 유품이라며 가지고 나온 것이다. 어렴풋이 그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이 소설을 읽는 연령층은 다양하겠지만 젊은 사람들은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고 중년으로 가는 사람들은 과거로부터의 소환 학창시절의 추억들을 되새기게 될 거 같다. 새의 선물이 나오고 은희경 작가님을 좋아하게 되면서 작품 전부는 아니라도 출간 즉시 읽었다. 오래 전 이경자, 신달자, 양귀자 작가님의 소설이나 산문집을 읽다가 신경숙, 공지영, 김형경, 은희경 작가님으로 옮겨 가면서 책을 읽던 생각이 난다. 빛의 과거를 읽으면서 나의 소실적 추억들도 가만히 꺼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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