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의 철학 - 2019 청소년 교양도서 선정
송수진 지음 / 한빛비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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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철학
을의 철학
저자
송수진
출판
한빛비즈
발매
2019.03.15.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고, 각자 행복을 누릴 권리를 가진다. 그런데 현실은 답답할 정도로 갑을 불평등 구조로 이어진다. 왜 그럴까? 누구나 자유를 누리려 하지만, 타인의 고유한 영역을 침해할 수 없다. 방종과 자유를 구분짓기 위한 잣대로 사회적 규칙인 법이 도입된다. 결론적으로 이 법 자체가 결코 사회적 인식의 흐름을 제대로 쫓아가지 못할 수록, 안좋은 선례가 당연한 관행으로 새겨질 뿐이다. 또한 현대의 시스템은 그 사회 구성원의 합의보다는 힘의 논리가 답습되어 대를 거듭한 것이 많다. 원인과 결과가 혼동된 사회현상의 결과물은 '책임전가'의 사회를 야기시켰다. 사회적 약자에 속할 수록 억울함을 구제받을 합리적인 수단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불합리한 사회 시스템을 마주할 때가 많아진다. 분명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하고, 한번 실수를 재차 반복하지 않도록 늘 반성해야 한다고 기성세대로부터 들어오며 자랐다. 그런데 '성인'연령에 진입하고 비로소 어른나이가 된 이후엔 늘 어떤 것이 '아이'와 '어른'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기준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말과 행동이 엇갈리는 이중적인 상황을 거듭하는 모습, 존경하고 싶지만 전혀 존중조차 꺼려하게 하는 낯부끄러운 모습들 속에 혼돈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그러함에도 세상엔 좋은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말로 부정적인 생각을 다독거릴 때가 많다. 비단 몰지각한 유형의 사람들이 특정 계층에 국한하지도 않는다. 

 

 

 

 

 

 

내가 '가야 할 곳' 이 내가'가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p9-

물론 내게도 책임을 전가할 방법은 있었다. -p18-

노동자의 생명이 달려 있는 수요는 부자와 자본가들의 기분에 달려 있다. -p23-


 어른은 자신이 하는 행위에 충분한 책임을 질 줄 아는 존재이다. 그런 만큼 자신의 말과 행동에 신중할 수 있고, 그것을 한창 성장하는 아이들은 긍정적인 본보기로 새길 수 있는 것이다. 주변에 본보기로 삼아 자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어른이 많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가진 잠재적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촉진해 나갈 수 있다. 밤낮 쪼개어 삶의 휴식을 포기한 체 열심히 일한 어른들 덕분으로 보편적인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성장 뒤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특히 경제활동의 일원으로 진입할 기회조차 사라지게 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기는 커녕, 그 이전부터 수반되었어야 할 구조적 문제점을 외면해 온 탓이다. 고용주와 고용자의 관계로 일컫어지는 갑을관계는 원래 대등한 계약적 관계에서 출발한다. 각종 법적 절차가 확행되고나니, 일일히 계약문서에 '나' 혹은 '너 님'으로 언급하는 대신, 일목요연하게 갑을로 규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서 말하는 갑을 관계는 전혀 서로 대등하지 않다. 일방적인 힘의 원칙을 제시해 상대방의 권리를 제약하는 관계로 변질시키고 있다. 비단 이런 관계는 계약적 관계에 한정하지는 않는다.
 

'소통'을 강조하는 SNS 에서도 개별적인 개인보다는 조직의 힘이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아무리 벼랑 끝의 열악한 상황들도 '이슈'로 부각되기까지의 과정은 험난하기만 하다. 언제 어느 순간 '내 자신'이 직면할 상황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하는데, 타인의 사연에 일희일비 한다는것은 힘든 일이다. 더욱이 파급적인 정보의 생산력이 '범람' 수준에 이르고 나면, 공감순으로 보기좋게 정렬된 '타인의 인식'에 따르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1인 미디어로 부상하기 이전부터 블로그를 활용해 오고 있는데, 보다 자세함을 추구할 수록 스크롤 압박을 동반하며 외면당하기 쉽다. 물론 예전이나 지금이나 좋은 글은 글의 길이에 비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목요연하게 정리될수록 간단명료하다. 분명한건 사실을 직시한 정보를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면이다.







냉정함은 세상을 마주하는 차분함 자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채널들이 생겨났다. 기술발달로 축적된 편리함과 인간 본연의 자유기제가 결합되면서 부터였다. 타인에게서 충족되지 않는 자아실현의 욕구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고무적인 현상은 전통적으로 미디어에 익숙하지 않은 계층들이 간편하게 유입된다는 면 이다. 그런데 한정된 시간에 선택할 범위가 많다보니, 오히려 또다시 '남'이 선택해 준 관념을 추종하는 경향이 크다. 최소한의 선별기준이 사라지고, 맹목성이 추구된다. 즐겨찾기 위에 추가해놓은 채널이 하나둘 늘어나고 나면, 우후죽순으로 즐겨찾기 목록만 늘어난다. 자주 보는 정보를 빠르게 접근하기 위해 설정하는 목적을 잃어가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즐겨볼 채널 몇개만 추가해뒀다면, 보다 유용한 정보를 집중적으로 습득했을 것이다.
 

 

 

 

 

 

시대가 발달할수록 선택지는 다양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한정된 시간속 에서 선택과 집중을 해야만 한다. 생각의 힘이 커질수록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 보다 자유로워지게 한다. 정보를 선별하는 기준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기준이 세워지니 불필요한 생각을 하느라 시간 낭비할 일이 줄어든다. 미리 장볼 목록을 적어두면, 충동구매를 해서 먹지도 못하고 버리는 일을 줄이는 이치와 같다.
 

 세상은 냉정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이상 냉정한 세상에 맞설 힘은 '생각'밖에 없다. 철학은 세상의 이치를 생각하는 방법을 성찰하는 학문이다. 수없이 자기 자신에게 왜?질문을 던졌고, 직면한 현실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 지를 생각해왔다. 솔직히 심오한 학문쯤으로 인식했었다. 허구헌 날 신세한탄만 하던 '철학과' 사람들. 가까이할수록 거리를 두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덕분에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겪지 않아도 좋았을, 인간관계의 냉정함을 반복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냉정함은 생각이나 행동이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침착한 자세로 일관하는 것을 말한다. 단어의 의미만 살펴보면, 이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마주하는 냉정함의 실체는 위험한 것이다. 즉 충분히 상황을 직시해 효과적으로 대처한다면 긍정적인 작용을 기대할 수 있다. 반면 수수방관으로 일관하다 어설프게 동조하는 사람 덕분에 감정만 격앙될 수 있다.
 

 갑을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을의 불평등을 개선하는 문제에 갑의 철학이 개입하기 시작한다. 항상 양보를 해야 하는건 덜 가진 쪽의 몫이다. 단적으로 이런 현상은 점점 연쇄작용을 한다. 먹이사슬처럼 갑 역할을 했던 자가 또다른 갑의 을이 되는 과정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사슬영역에서 자유로운 영역에서 엉뚱하게 왕대접을 받으려 한다. 조금만 서로 넓은 인간관계로 접근하면 을의 문제는 개선될 수 있는데, 개선되기는 커녕 고착화되어 악순환 된다. 을의 철학의 부재에서 오는 영향이 크다.
 

 

 

 

 

『을의 철학』 은 저자의 실제 경험담을 담아, 철학이 주는 긍정의 작용을 일깨워준다. 또한 속앓이 대신 당당하게 악질 꼰대에게 외치는 사이다 같은 말들도 남기고 있다. 세상은 냉정한데, 사람 속은 정말 답답할 정도로 흔들거린다. 억울한 상황을 겪어도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할 지도 우물쭈물한다. 흔히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변화를 꾀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철학은 냉정하다.

철학에 포근한 위로는 없다.

있는 그대로를 보라 하고

어둠에 직면하게 하며

벼랑 끝에 서게 한다.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철학 자체는 냉정하다.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채워질수록 수많은 번민에 사로잡힌다. 분명한건 냉정한 상황을 겸어하게 받아들이고 불가결한 방법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것은 '자존감' 이 될 수도 있고, '자괴감'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우리는 자신감이 넘쳐 자만심으로 변하는 순간을 경계해야 한다. 그 순간 을의 철학을 잊은 체로 영원한 갑으로 착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동안 을의 철학이 부재해 보이는 건, '갑'의 위치를 절대적이고 영속적인 속성으로 여기는 데서 기인한다 . 대자연도 오랜 세월에 걸쳐 퇴적 -침식 작용으로 변화무쌍한데, 인간의 영역에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단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사회의 단면이 되풀이 될 뿐 이다.


 

그들은 자신의 진짜 적이 누구인지 눈치채지 못했다. -p26-

마르크스에게 진짜 중요한 본질은 '누구를 위한 기술혁신 인가 하는 점 이었다. -p42-







 아무리 유용한 수단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누구를 이롭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극명하게 달라진다. 모든 이를 만족시킬 수 없는 공공분야의 경우 특히 그렇다. 알고보면 최종적인 수혜자는 그 시스템 위에 독점이윤을 추구하는 갑 인데, 공공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첨예하게 을끼리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오히려 갈등을 일으키는 구성체를 어르고 달래기 위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킨다. 을의 철학은 '손익계산서'가 아니다. 막대한 이득을 거둘때가 있는가 하면, 손실을 감수할 때가 있다. 실현한 '부의 원천'에 대한 인식이 부재한 것도 을의 철학이 사라지는 원인이 된다. 심지어 부동산 문제 해결에 있어서는 같은 가족도 동상이몽 서로 갑, 을로 변질된다. 자녀들의 내 집 마련이 걱정되면서도, 기존에 실현될 내 집에 대한 차익실현을 염두에 둔다. 두 마리 토끼를 쫓아가는 양상인 것이다.
 

나 하나 쯤은 아닌,

 

나 하나 만큼은 결코.



 

사실 요즘처럼 집이 불편하고 답답한 존재로 와닿은 적이 없다. 오래되어 낡고 좁아서도 아니다. 집값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부모님네 시각때문이었다. 낡고 허름하면 보이는 자체를 고쳐나가면 되는데, 무조건 뜯어 고치는데 집착한다. 그래야만 보다 높은 가치책정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에 곳곳을 아기자기하게 꾸미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 을의 철학 따위를 떠올릴 여유없이 보낸 기성세대 덕분에 틀에 갇혀 지내게 된다. 현실에 직면한 불합리함을 비판하면 감정낭비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그러함에도 끊임없이 생각의 변화를 시도한다.

 

적어도 나 하나 만큼은 불합리한 상황을 방치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예전보다는 훨씬 수그러든 측면이 있다. 더욱이 사람은 필연적으로 '고독'을 떠안고 살아가기에 나름의 즐기는 방법을 삶을 통해 실행하는 측면이 있다. 다양한 인간관계를 겪는 순간 지레 걱정을 앞세운 체, 도전할 용기를 잃게 된다. 그러다보니 현실속에서 안주할 수 있는 '역할놀이'로 나약한 자아를 감추기에 급급하다. 어찌보면 을의 철학이 숙성될수록, 어떤 위치에 놓여있든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여 살기좋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p92-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잘못된 환상을 심어준다. -p191-

수처직주 : 그대가 어느 곳에서라도 자기가 주인이 된다면 자기가 있는 그 곳은 모두 진실한 깨달음의 경지가 된다. -p215-

약자가 강장게 하는 배려는 배려가 아니다. 참을 수 밖에 없어서 참고, 나 하나 참으면 된다며 넘기는 건 배려가 아니었다. -p217-



 생각 자체가 부실해질 수록, 권위주의가 팽배해질 수 밖에 없다. 아는 것이 없을수록 갑의 논리에 편승하기 쉽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이성적 능력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합리적인 비판을 통한 견제 균형은 부실해진다. 다양한 유형의 인간유형을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비교해 과잉일반화 오류에 스스로를 노출시킨다.
 

 점점 집약적인 정주여건에서 벗어나 분산 형성되다보니, 개인주의나 이기주의가 팽배해진다 여기기 쉽다. 하지만 단적으로 예전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관행처럼 고착화된 악습의 실체가 부각된 유형이 많다. 즉 남들도 그러니 나 하나쯤은 해도 아무 문제 없겠지? 하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도 직위고하가 충족되면 똑같은 잘못도 쉬쉬하는 문화가 강했다. 사회적 영향력이 없는 나 개인이 나선다고 바뀔까? 

 

 


 

 단적으로 수많은 을의 나비효과로 인해 사회제도는 보다 인간적으로 개선되어왔다. 불의에 맞서 자신의 삶을 헌신해 살신성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최소한 각자에게 주어진 권리를 스스로 지켜나가려는 노력을 더할때, 응집력있게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수처직주처럼 어디에 있든 주체적인 권리 의식이 있어야 진실이 은폐되지 않는다. 하다못해 번번히 불합리한 상황에 개선책을 제시하는 외침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것도 한계에 부딪칠 수 밖에 없다. 세상의 많은 이슈에 관심을 쏟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최소한 마음만큼은 함께 하고 있지만, 생존의 삶 속에 잠시 미뤄둘 수 밖에 없다는 공감의 표현이 필요하다. 나와 생각을 더하는 사람들이 있을때, 든든한 힘을 얻을 때가 많다. 

 

 

 



 

실제로 실무도 할 줄 모르면서 어찌 관리직까지 갔을까 싶은 상사들은 자신이 해보지 않아 그 업무가 얼마나 힘들고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리는지 전혀 모른다. 그저 시간을 촉박하게 주고서 조그만 실수라도 나오면 권력을 이용해 쥐 잡듯 한다. -p225-

아무런 예고 없이 약자가 광장에 설 때, 약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p234-

타인의 아픔을 광장에서 봤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는 광장으로 모여야 한다. -p235-




오지랖 스러움이 진정 필요한 순간을 알 때.

 

 

 

 을의 철학이 제대로 숙성되려면, 을의 고통에 방관하지 않고 함께 동참하려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더이상 혼자만의 처절한 사투로 내버려둬서는 안된다. 지금은 세찬 바람을 피할 수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어제의 외면당한 동료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미 벼랑끝에 내몰린 이상 더이상 물러설 것도 없는 을의 입장에서 오지랖 스러움이 필요한 순간이다. 오지랖 스러움은 당장의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남의 희노애락에 공감하는 자세이다. 그런데 이 오지랖 스러움을 우리는 유난히 질투 시기에 연결해 , 몰라도 될 남의 뒷담화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야만 갑의 위치에 도달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여기는 것 일까? 당장의 내 처지가 절박하지만, 그 순간을 잠시 유보한 체 갑을 위치를 잊은 체 솔직한 목소리를 너도 나도 외칠때, 일방적인 불이익을 가하기도 힘들다. 목 끝까지 화가 치밀어올라도, 끝내 속앓이 하고 마는 많은 을의 고통이 깊어지는데엔, 가장 가까이서 하소연할 수 있어야 할 주변에게서 외면당하기 쉽다는 점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가족들조차도 참으라고만 한다. 참는 사람이 이긴거라고. 이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인가? 많은 을이 자신으로 인해 가족들이 슬플까봐 소리내어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그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견디고 버티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분명 그 과정을 수없이 거쳐왔을 가족이라면 먼저 공감할 것인데, 평상시의 오지랖 스러움도 발견하기 힘들다. 오지랖 스러움을 담아 서로를 위해 따뜻한 응원을 하자. 정작 오지랖 스러움이 절실한 영역은 을이다. 힘은 모아야 커지는 법이다. 불합리한 상황에도 매번 그러려니 참고 견뎌내는 순간, 악습은 근절되지 못하고 관행처럼 뿌리깊게 자리잡힌다.

 

진짜 두려운 건 나의 죽음이 아니다. 내 죽음으로 인해 지옥 같은 살아갈 너의 삶의 두렵다. -p261-


진심을 담아 주옥같은 마음의 글귀로 가득한 『을의 철학』 엔 공감 내용으로 가득했다. 어느 순간엔 눈물이 글썽일 정도로 감성적이기도 할 정도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 함께 기뻐할 일 보다, 슬픔에 공감해야 할 일이 많아진다. 어느 집 할 것 없이 건강하시던 어르신들 조차도 병원신세를 면하기 힘들어지신다. 오지랖스러움에 대한 확실한 부정을 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늘상 일을 도맡아 하시던 좋은 분들은 그 덕분에 골병들어 고생을 하시니 말이다. 자신이 감당하지도 못할 것들에게 지나치게 신경쓴 나머지, 본인들의 안위에 전혀 집중하지도 못한다. 평소에 같은 을의 처지에 공감을 나눴더라면, 을은 을대로 갑을 갑대로 존중 배려할 수 있는 문화를 생성하고 있었을 지도...




 악몽처럼 매일 극단적인 생각을 떠올려야 했을때, 난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글 이라는 제목으로 일종의 유서를 써 둔 적이 있다. 언제 어느 순간 어떤 일을 겪을 지 모르기에 혹여라도 그럴 일이 생긴다면, 마지막 순간만큼 순전한 내 결정을 존중해달라는 뜻 에서였다. 내가 살아가는 오늘의 나날들을 항상 마지막 처럼 느끼고 열심히 살아간다면, 그만큼 삶에 보다 충실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게다가 마지막 순간의 결정이 혹여나 다른 사람에게 안좋은 영향을 미칠까봐서 조용한 선택을 감행하는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나만 그런 감정이 든게 아니었구나. 싶은 동감의 내용에서 큰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사실 정말 사소함이라 여기는 삶의 동기들이 촉매제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궁극적으로 '고독'이라는 자체를 저주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스스로를 을乙로 여겨본 적이 없다. 기회조차 제약된 정 丁의 입장에서도, 가끔 생각이 복잡해질때면, 남의 이야기를 듣곤 한다. 대부분은 절대적으로 나보다 여유로운 상황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나보다 고통스런 절망을 힘겹게 버티고 있는 사람에게 마음의 공감을 할 수 있을때 뿌듯하다. 내가 이겨낸 과정으로 인해 누군가는 내가 겪었던 힘겨운 과정을 피해, 희망을 품으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무살 때, 내게 우연히 찾아와 연달아 정신적 황폐기를 겪게 한 철학과 인연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자신을 깊게 돌아보는 출발점이 되었다. 물론 초반에는 급격하게 단절되기 시작하는 인간관계를 느끼며, 고독의 실체까지도 스스로 깨달아 나가야 했다. 분명한 건 그 무렵부터 불합리함을 배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불편한 사람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유독 인간관계의 경우 본인의 입장에서 쉽게 대할 수 있는 경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연락처 목록으로 가득하던 수많은 인연들이 점점 갑을 방식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니, 어느 정도는 공감이 가면서도, 내가 저 위치라면 그러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서로 다른 영역에서 명령지시받는 관계가 아닌데, 우리는 어느덧 어느 직장에 다니는지, 직급은 어떤 위치인지. 상대적 비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하는 번민에 사로잡혀 있다.






 

현실은 당장에 개척하기 힘들지만, 매번 직면해야 하는 현실 자체라면 충실해질 필요가 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어제의 상사가 내일의 하급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세상이치가 그러하다. 한 순간의 결정이 인생 자체의 승패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때 불필요한 생각요소들은 차단한다. 그 대신, 최대한 꼭 필요한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집중하는 자세는 무엇을 해도 잘 해나갈 수 있는 확신을 심겨준다. 을의 철학 습관은 불확실한 사회를 자기 스스로 개척해가는 열정을 심겨준다. 철학이 숙성되면 사고판단을 분명하게 하고, 의사결정자체를 스마트하게 전환해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개인적 경험으로도, 한번도 풍족한 상황이 없었기에 발품 팔아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엔 버젓한 비양심의 상황을 방관하다가는 결핍자체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챙겨주지 않으니 스스로 알아서 즐길 방책을 실행에 옮겨야만 한다. 



 

 

『을의 철학』 은 나의 입장에서 보면 훨씬 평범한 이야기 들이었다. 가난 자체가 끔찍히도 싫을 정도였는데, 늘 나보다 갑을 배려하는 부모님들 덕분에 한치 앞도 저돌적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차라리 당시엔 비수로 꽂힐 일이라도 결단을 했어야 했다. 오히려 이런 경험적 상황이다보니, 그 어떤 책보다 많은 위안이 되었다. 책을 펴낸 순간 세상을 다 가진 듯 " 나약한 자들이여, 일어서라. 위대한 나처럼" 하는 자아도취는 발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그 어떤 단어보다 "염치"를 가슴속에 새겨두게 되었다. 좀더 잘할 수 있는데, 내 자신을 떳떳하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다. 그리고 내 자신이 솔직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참아내는 자체가 내 자신에게 가혹한 행위를 가하는 것이었다. 묵묵히 잘 될 수 있도록 바라만 봐줘도 좋을텐데. 싶은 순간이 많았다.






하지만 부질없이 온갖 타박으로 돌아오곤 했다. 처음엔 참다 못해 후회할 만큼 퍼붓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저런 철학적 사유를 하고 나니, 무덤덤하게 가라앉을 때가 많았다. 책의 문구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내용들이 여지없이 있다. 모처럼 수시로 들고다니며, 마음의 자생분으로 삼을 책을 접해 흐뭇하다. 그 어떤 인간관계보다도 복잡하지도 않고, 마음을 편하게 하는 친구. 결코 책은 적이 되지 않는다. 마음이 허한 사람에게 아낌없이 추천하는 『을의 철학』 이다. 매번 별표 평점 매길때마다 솔직히 난감하다. 대체로 내게 책 자체가 형편없었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책들 사이를 별표 몇개로 차별을 둔다는건 굉장히 무의미하다. 좋은 책일수록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를 성찰하게 해준다. 몇페이지에 어떤 구절이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사실 아무리 정독을 해도 책을 덮고 나면 어떤 내용이었더라. 구체적으로 떠오르지는 않는다. 다만 타이핑을 하는 순간 타타타탁 하는 반동과 함께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소리가 메아리치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그 감흥을 머뭇거림없이 떠올리게 해 좋은 책 『을의 철학』 이다.





 

이 책 서평은 한빛비즈 리더스클럽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끝까지 읽고 솔직한 소감을 담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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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의 다이어트 - 과잉공급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꼭 알아야 하는 경제 이야기
크리스토퍼 페인 외 지음, 이윤진 옮김 / 한빛비즈 / 2019년 3월
평점 :
절판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것이 '경제'이다. 물과 공기와 더불어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활동이다. 화폐생활을 하는 이상 필연적으로 우리는 경제현상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경제학은 이런 경제에 관한 원인 결과를 분석하는 사회과학이다. 흔히 지루하고 난해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크게 보면 수요-공급의 법칙에서 파생된 각종 원리들을 학문으로 설명해놓았을 뿐인데 말이다. 현실에 적용하기에 따라 쉽고도 어려운 학문이 경제학이 아닐까? 싶다. 그러함에도 경제학을 전공했던 지난 시간들이 헛되지 않은건 '선택의 순간'에 명료한 의사결정체계를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예전보다 우리는 많은 선택지속에 살아가고 있다. 정보의 홍수 시대를 넘어서 지금은 범람에 가까운 시대이다. 그래서 대신 선택해서 신속하게 해결해주는 o2o서비스가 플랫폼을 기반으로 각광받는다. 즉 기존에 결합되지 못했던 오프라인의 매장들이 온라인과 결합하여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다. 이는 전체적인 경제적인 규모를 팽창하는 동시에 풍선효과를 촉진한다. 기본적으로 경제적 문제는 자원의 희소성을 전제로 출발한다.

  화폐단위로 먼저 선점하지 않으면,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관념이 더해져 규모의 경제를 키운다. 간단하게 말해서 화폐(돈)이 없으면, 재화나 서비스를 이용할 기회자체를 진입기회 자체를 봉쇄당할 수 있는 위협에 직면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물물교환이 시작되고 난 후 여전한 인류의 현상이다. 단 기본적인 욕구에 대한 충족은 새로움으로 채우려는 니즈(Needs)를 생성해왔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재화나 서비스가 기본적으로 충족되고 나면, 정체기에 이르러, 새롭게 획득할 수 있는 재화나 서비스에 관심가지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부귀영화를 보증하던 직업영역이 퇴락하고, 하찮게 여기던 분야가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원동력이 되는 이면이다. 






살 찌셨네요. 혹은

살 빠지셨네요.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의 멋쩍은 얼굴로 마주하며 주고 받는 인사말이다. 개인적으로도 숱하게 들어왔던 말이다. 누군가에겐 배부른 고민이 될 수 있겠으나, 오랜 기간 보기 좋게 살쪄 보는게 소원일 정도로 말랐었다. 체중을 늘리기 위해 한 끼에 엄청난 식사량을 동반하기도 했는데, 소용이 없었다. '살'에 관한 언급은 나를 수없이 침울하게 하는 명명백백한 한 글자 핀잔이었다. 오로지 체중을 늘린다는건 왜소한 체격을 극복하는 자기방어적 기제였다. 우선 덩치의 비교에서 '만만함'으로 해석되는 잣대에서 벗어나야 했다. 결론적으로 살을 빼는 것도 힘들지만, 살을 찌우는것 또한 마찬가지로 힘들다. 결국엔 30년 가까이 늘리지 못했던 체중이 무려 한달 사이에 앞자리가 바뀌는 일을 겪었다. 막상 겪고보니 적당한 상태로 돌아가는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또한 만나는 사람들마다 살좀 쪄야겠다 소리가 도로 살빼라는 소리로 바뀌기도 했다.

다행히도 지금은 '살'이야기를 레퍼토리처럼 등장시키는 사람은 드물다. 왜나하면 보기 좋은 체격을 내세웠던 그들이 이제는 도리어 고도비만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체중 단위자체가 달라진다. 학교다닐 때 듬직한 체격은 이제는 날씬한 축에 속할 정도다. 기본적으로 다이어트 (diet)는 단순히 체중을 줄이는 의미 보다는, 건강을 위해서 몸의 균형을 지속하는 과정이라 여긴다.

     시장경제의 수요- 공급의 균형점을 찾아나가는 경제학을 다이어트에 접목시킨다면, 보다 합목적을 갖춘 다이어트 동기가 되지 않을까? 실제로 경제학의 원리를 다이어트에 적용한 경제학자들이 있다. 그들이 쓴 「경제학자의 다이어트」 엔 과잉공급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제학적 원칙이 담겨있다. 18개월 동안 실제 체중감량에 성공할 수 있었던 동기요인을 말하고 있다. 







배고픔과 굶주림




먹을 것 자체가 귀하던 시절은 그야말로 배부르게 먹는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돈을 버는 것은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말그대로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절대적 빈곤상태가 해결되고 나니, 식량을 얼마나 생산할 수 있을까? 보다 어떤 식량을 어떻게 생산할 수 있을 지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필요한 식량에 비해 공급되는 식량은 극히 한정적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보릿고개를 걱정하던 시절이 있었다. 식량 전체의 희소성에 직면하고 있었다.

도리어 식량사정이 넉넉해진 지금은 오히려 희소성의 착각에 빠져있다. 즉 배고픔 자체를 참지 못하고, 굶주림의 궁핍 상태로 인식하면서 오히려 자신이 맛있게 섭취할 수 있는 음식의 양과 질을 하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경제학의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을 적용해보면 극명해진다.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은 공복 상태에서 섭취하는 음식은 정말 맛있다. 그런데 점점 먹다보니 배고픈 단계는 커녕 포만해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더부룩해질 뿐 이다. 맛있게 음식 본연의 맛을 음미할 수 있을때 절제해야 이후에도 부담없이 섭취할 수 있게 된다. 







기아, 즉 굶주림은 지금도 너무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실존하는 현상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사람들 중에서 굶주림을 제대로 겪어본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확신한다. -p59-

당신은 굶어 죽을 지경이 아니라 그저 배가 고픈 것이고, 그런 상태는 괜찮다. -p59-



균형있는 식사와 함께 마무리한 일과는 신체활동을 건강하게 유지시켜 주지만, 포만감을 가득 채우는 식사는 그야말로 얼마나 더 먹을 수 있는지 식욕의 한계를 말해줄 뿐이다. 심지어는 어떤 음식을 얼마나 먹었는지 과시하는데 집착하기도 한다. 함께 먹는 사람들의 식욕까지 돋굴 정도로 먹성좋게 먹는것은 보기에도 좋고, 먹는 즐거움을 일깨워준다. 하지만 자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정도를 지켜나갈때 가능하다. 우리의 몸은 어느정도 범위에서 유연하게 조절가능하다. 그런데 이 단계를 넘어서면 도저히 회복하기는 커녕 기하급수적으로 기본적인 신체활동 까지도 위협하며 건강에 치명적으로 해로운 작용만 유발한다.

 매일 자신의 건강상태를 확인하는것은 좋은 습관 자체이다. 하지만, 이에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매일 섭취하는 식품의 종류, 활동량은 들쭉날쭉한데 체중계에만 빈번하게 오르며 스스로를 강박하는 것이다. 며칠 굶었다고 해서 체중이 급격하게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늘기 쉽다. 급기야 작심삼일 포기하고 그동안 줄였던 것 곱절 이상으로 과식한다. 체중을 확인하는 건 명확하게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제한선에 해당된다. 즉 무의식에 방만하게 식이하는것을 자제하는 개별 맞춤형 데이터를 제시하는 것이다.   








지나침은 금물 





경험적으로 몸은 그동안의 식이, 운동 습관을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행태를 바탕으로 어느정도의 체중이 유지될 수 있는 대사량을 결정한다. 육류위주의 식사를 한 사람은 아무리 밥 잘먹어도, 고기가 없으면 허기가 질 수 밖에 없다. 반면 고른 영양섭취를 하는 사람들은 야채 고기를 곁들여 맛있게 즐길 수 있다. 특정 식품에 국한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발견하는 의외의 사항은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을 것 같은 사람이 편식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세상에 '아무거나' 같은 메뉴는 절대적인 착각임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한 끼를 먹어도 제대로 잘 먹으면, 건강도 유지하고 더 맛있게 본연의 음식을 즐길 수 있다. 맛있는 건 0칼로리라고 하는 말이 과언이 아닌 이유이다. 어쩌면 무리한 단식보다 제대로 된 한끼의 식사를 먹기 위한 절제를 이어가면, 그동안 퍽퍽한 요리가 주지 못한 음식의 감미로운 맛을 우리 몸에 선물할 수 있다. 







어느 정도가 과식인지 아닌지를 알려주는 사람에게 영원히 의지한다면 당신은 절대 체중관리를 할 수 없다. - p96-



합리적인 소비생활을 추구함으로써 효율성을 꾀하는것을 경제적이라 한다. 이 경제는 보다 많은 다수를 풍요롭게 하려는 활동의 총체를 포함한다. 그런데 점점 기술이 발달할 수록 풍요롭지 못하고, 오히려 빈곤의 나락으로 빠지는 역설적인 모습을 발견한다. 가지면 가질 수록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는 지나침에서 비롯된다. 또한 인간활동에서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기본 활동 조차 기피한 결과이다.

 '건강'문제는 자신에게서 시작하고 매듭되는 면 인데도, 우리는 너무나 많은 건강상식들을 '남'에게 의존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나친 편리함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구매력의 향상으로 인해, 예전보다 건강을 유지시켜 줄 다양한 음식들을 섭취할 수 있음에도, 평상시에 그러지 못한다. 꾸준히 먹었을때 몸에 두루 좋은 기능을 하는 것인데, 특정 효능에 국한해 문어발식으로 건강식품을 확장시킨다. 겉은 멀쩡한데 속은 골아버린 경우가 많은 이유이다. 식이와 운동은 서로 상호보완적인 작용을 한다. 건강에 좋은 음식을 적당히 먹는것은 몸의 신진대사 활동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이고, 운동은 몸의 꾸준한 긴장 이완을 통해 신진대사를 왕성하게 해 몸이 지탱하는 힘을 생성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이어트에 있어서도 외모에 집결해 있다. 







『 경제학자의 다이어트』 는 건강한 몸의 유지를 방해하는 군살을 빼는 다이어트와 경제학 사이의 공통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총체적인 현상 속에서 안정성을 추구하는 것이 경제학의 방향인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많은 선택지를 담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선택지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필요한 수요를 넘어선 범위라면, 복잡한 의사결정을 유발하는 요소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가 해야할 것은 더 많은 것을 뱃살에 채워넣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건강을 위한 식이 운동 습관 실천이다. 하루에 1~2끼를 먹는 나로선, 될수있으면 급히 가지 않아도 될 곳은 걸어 다닌다. 그리고 제대로 된 한 끼를 먹기 위해 배고픔을 간단하게 달랜다. 아무리 천상의 밥도둑을 맞이해도, 좀처럼 밥은 한공기를 넘기지 않는다. 대신에 최대한 갖은 반찬을 곁들여 먹는다. 그러다보니 실제 섭취량은 훨씬 많은데 일정한 체중이 유지된다.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 메세지도 이런 부분일 것이다. 칼로리, 당장의 체중에만 의식한 나머지 강박에 사로잡혀 경직적인 사고방식으로 다이어트를 퍽퍽하게 하지 말 것. 실천적 흐름대로 유연하게 그때 그때 상황에 적정선을 유지하도록 스스로 각인할 것을 말하고 있다. 실천적 다이어트 경험치가 쌓이고 쌓일때, 지속적으로 건강에 도움되는 각자의 데이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변하는 것이 없고, 이왕 할 것이라면 제대로 흥미롭게 몰입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야 할 것이다. 건강을 위해 군살을 빼어냈을때의 즐거운 효용이 치열하게 먹는데서 오는 충족보다 훨씬 큰 것 임을... 



본 서평은 한빛비즈 리더스 클럽 활동으로, 책을 제공받아 솔직한 소감을 담아낸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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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마존에서 미래를 다녔다
박정준 지음 / 한빛비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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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상황을 흔하게 '정글'에 비유한다. 어떤 악천후의 상황이 펼쳐질 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정글에 들어선 순간, 머리 쭈삣한 긴장감이 전개된다. 매 순간 자신의 한계에 도전할때마다 생존능력도 극대치에 이르게 된다. 울창하게 우거진 숲과 늪, 산과 강이 거침없이 이어지는 열대우림. 정글을 말할때 아마존을 빼놓을 수 없다. 세계에서 가장 넓고 가장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는 아마존의 존재감이다. 무려 대한민국의 70배에 이르는 광활한 면적에 걸쳐 열대 우림을 이루고 있다.

정글에 들어선 순간 모두의 목표는 생존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최소한의 자원을 가지고, 예측불가한 불안정한 자연환경에 맞서 살아남아야만 한다. 문명생활의 편리함을 포기해야 하는 대신에, 인간 본연의 한계에 도전하며 이겨 냈을 때의 희열을 경험한다. 극도의 결핍 상황에서 획득한 식량이기에 세상 어디서 맛볼 수 없는 값진 가치를 피부로 느끼게 될 것이다.








전자상거래가 출발하던 즈음에 아마존은 세계 최대의 인터넷 서점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당시엔 점점 인터넷 상거래를 통한 거래규모가 늘어나, 기존의 상거래 규모의 상당수를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플랫폼 기업이 세계 비즈니스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아마존의 위상은 경이적인 것이다. 예측 불가능하게 빠르게 변화하는 모바일 혁명에 발빠르게 대응한 아마존에서 유통되지 않는 제품은 없다 할 정도로 전 산업범위에 걸쳐져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아마존을 통해 판매한다는 전략인 것이다.

아마존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기술들을 이미 선도적이고 다각적으로 구축해놓고 있다. 사물인터넷과 인공지능, 빅데이터, 드론에 이르기까지 정밀기술을 구축해놓았다. 아마존 본사 캠퍼스가 있는 시애틀은 이미 연소득 8만달러 이상으로 미국에서도 가장 잘 사는 첨단 도시로 손꼽힐 정도이다.






아메리카 드림은 계속된다.





미국은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다. 전세계의 인적 물적 자원이 집결한다. 많은 잠재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생태계를 구축한다. 아마존의 평균 근속 연수가 1년 남짓이라고 한다. 「나는 아마존에서 미래를 다녔다」 책을 접할 수 없었다면, 알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얼마나 치열하기에 1년 정도의 기간밖에 아마존에 있지 못한단 말인가? 박정준 저자는 이 곳에서 12년을 일했다고 한다. 아마존이 94년 허름한 창고에서 시작한 스타트업 기업이니, 오늘날의 아마존의 성장에 상당한 기여를 했으리라 짐작한다. 물론 아마존의 성장은 빠르게 방대한 물류를 해결할 수 있는 핵심기술의 고도화에 있다. 드론이 등장하기 시작했을때,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한 것도 아마존 이었다. 얼마만큼 개발자들의 역량이 한 도시를 먹여살리는 아마존을 구축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을 지 짐작하게 한다.

창업주 제프 베조스의 재산은 무려 165조 1500억원 정도로 전세계에서 가장 부자이다. 기업 하나로 세상을 통해 거침없이 실현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줄 정도이다. 책은 아마존에 처음 입사한 과정에서부터 보고 느낀 소감을 담고 있다. 전체적으로 프롤로그만 보더라도 책의 구성을 개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그 무엇


거대한 기업 아마존에 있었던 12년의 시간을 도제의 시간으로 보는 저자의 관점에서 깊은 공감을 느꼈다. 평상시에 도제 시스템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기업의 가치는 '이윤'으로만 측정된 체, 기존의 조직문화가 새로운 인재유입을 가로막고 있다. 한번 경력이 단절된 순간 기회를 얻는건 불가능에 가깝다. 처음에 맡은 직무 그대로 연공서열 순으로 순차적으로 이어지는데 기인한다. 일정한 연차가 되면 단계상승을 기대할 뿐 이다. 숙련된 장인으로부터 배운 기술에 새로운 경험을 접목한 기술을 또다시 전승하는 도제 시스템과 거리 먼 것이다. 전세계의 많은 기업들이 선도기업 아마존을 벤치마크하고 있다. 그런 기업에서 일한 경험이 자신이 성장하는 발판이 될 수 밖에 없다.








평생 있어야 한다면 괴로운 곳이지만 과정으로 보기 시작하니 이보다 감사한 곳일 수 없었다. -P11-




미래에 대한 준비가 불확실할수록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안정을 담보로 한 댓가로 많은 것을 오로지 기업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평생 직장을 목표로 있다보면, 직장을 떠난 자기 자신은 존재하기 힘들다. 연봉은 업무성과노력에 비례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한다.



위로부터 강요되는 권위에 따르거나 남의 눈을 의식하기보다는 스스로 지킬 것은 지키고 할 말은 하는 분위기가 어색하지만 묘한 매력이 있었다.

-P39-









아마존은 철저하게 직급에 상관없이 다양한 직무를 경험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시스템이 두드러졌다. 즉 일단 일정한 직급에 도달해야 권한을 부여받는 톱다운방식이 아닌, 충분히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직급에 상관없는 권한을 부여하는 시스템이 있는 것이다. 또한 뒷담화로 치부되는 직장내 정치내공은 필요없이 단도직입적이고 명료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은 아마존의 역량을 책에서 많은 이들이 가슴속에 새겨둬나가길 기대해본다. 




본 서평은 한빛비즈 리더스 클럽 활동으로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서술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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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육아 - 철없는 딸바보 아빠의 현실밀착형 육아 에세이
제임스 브레이크웰 지음, 최다인 옮김 / 한빛비즈 / 2019년 2월
평점 :
절판


 저마다의 다른 삶의 방식을 배워가며, 삶을 알아가는 존재가 사람이 아닐까? 싶다. 다양한 경험의 잣대를 토대로 행동에 있어서 책임질 수 있는것이 어른이 아닐까? 이 책임성을 우리는 '역할부여'에 수반하여 일깨워가고, 터득해간다. 대체로 '결혼'의 방식을 통해 우리는 어른의 역할 상당수를 학습해간다. 즉 절대적인 피임이 아닌 한 한 가정을 이뤄가고 정착해가는 과정에서 육아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육아는 단순한 출산 교육에 그치지 않고, 세상의 풍파속에 부모로서 든든한 울타리로 지켜주겠다는 본능적인 신의성실의 약속을 의미한다. "네가 세상에 온전한 독립적인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줄께. " 이미 이전 세대의 양육을 통해 성인으로 자라나고, 그 부모가 했던 역할을 수행해 가는 것이다.
 

 그런데 1인가구가 점차 확산되고, '비혼'의 단어가 웃프게도 통용될 만큼 부모가 되는 시작 자체가 쉽지 않다. 시대가 발달할수록 평균적인 생활수준이 높아지는데, 기본 정주여건은 오히려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결혼을 준비할 수 있다는 자체가 때론 부러움을 살 때가 있다. 중요한건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겠다는 서로의 약속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자세에 있을 것이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의 모습은 대체로 경애롭다. 한순간에 복잡미묘한 감정이 새하얗게 씻겨나가는 감성을 쉽게 고양할 수 있다. 그런데 육아의 과정은 살벌할때가 많다. 장난끼 가득찬 아이가 혹여나 다칠까 싶어 쫓아다니다보면, 부모의 육체적 고단함이 엄청나다. 쫓아다니지 않아도 될 단계에 이르러서는 정신적인 수행으로 이어진다.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서도 부모에게 내 자식에 대한 걱정은 습관적으로 이어진다.
 

 결혼은 아직 하지도, 서두르지도 않고 태연한데 벌써 조카 육아는 오랜 세월을 거듭한다. 나이 차 많은 사촌 족보 막내 삼촌의 비애랄까? 하염없이 꾸벅꾸벅 졸아대는 모습, 어느정도 자라서는 이제는 천정 높이 사람 그네를 태워주며 놀아줄 수 없을때를 발견하면 허무함이 몰아온다. 에너자이저를 방굴케 하는 에너지 앞에 아주 가끔 '좀비'와 묘하게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봤다. 즉 좀비는 오로지 물어뜯으며 세균에 전염된 종족을 늘려가며 집단으로 몰려간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세균번식 하듯 숫자가 늘어나니 막강한 근력의 사람도 속수무책으로 좀비화되어간다. 그런데 좀비가 있는 곳이 아는 것과 모르는것은 극명한 차이가 있다. 딸 넷을 키우는 아빠가 쓴 「좀비육아」 는 다소 특이한 책이다. 좀비로 가득한 사회의 종말에 맞서 필연적인 육아를 대비하고 있다. 즉 지극히 당연한 부모의 역할에 대해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책이다.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대상의 하나는 아포칼립스 (apocalypse)의 존재이다. 종말, 대재앙 같은 표면적인 의미 이외에 아포칼립스는 탄생순간부터 해괴한 형체를 띈 불완전 존재에서 점차 가장 강력한 존재로 생존하는 흐름을 상징한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존재 스스로 거칠고 메마른 환경에 적응하는 방법을 터득하며 생존력 강한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을 일깨우고 있다.
 

「좀비육아」는 아이들이 거쳐야 할 불완전한 환경자체를 좀비에 비유하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 맞서 강하게 키워낼 수 있는 법을 말해주고 있다. 기존의 전문적인 해설이 가미된 육아관련서적과 확연히 엉뚱한 맥락을 취하고 있어서 글 자체를 이해하는건 상당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곁들여 단순화된 캐릭터가 접목된 아이 관점의 삽화가 더해지니, 부모의식을 명확하게 할 수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생각 이상으로 훨씬 학습습득력이 뛰어나다. 사람의 감정에 대한 이해도 밝고, 감정표현도 솔직하다. 당장에 억울해지면 울음을 터트릴 정도이다. 어른은 푸근한 품에 아이를 안은 체 토닥이며 어떤 감정상태가 잘 표현되지 않아서 슬픈걸까? 관심을 가지면 족하다. 이내 울음을 그치고 꺄르르 웃는 아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정확히는 어른보다 감정능력에 있어서는 탁월하다. 경험의 절대적인 부족에서 오는 감정 통제 자체에 익숙하지 못할 뿐이다. 아이는 실컷 울고 나서야 해맑게 웃을 수도 있다.


아이는 몸집이 작고 에너지가 넘쳐서

부모가 미처 보지 못한 구석까지

샅샅이 살필 수 있다.

-p100-

 

 문득 바닥의 미세한 조각까지도 손쉽게 발견하는 조카의 관찰력이 떠올랐다. 그렇다. 어른의 잣대에서 보면 아이들을 과소평가 하기 쉽다. 더욱이 교육열이 치열한 우리의 경우 그런 아이들의 잠재력을 발굴하기보다, 아이들끼리의 경쟁을 부추기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얼굴에서 온통 근심가득한 육아의 현실은 흡사 전쟁터를 방굴케한다. 그런데 그 치열한 전쟁터속에 얻는 잠깐의 꺄르르 순간에 고단함이 사라질때가 많다. 치열하게 최선을 다한 만큼 순간의 희열은 크다. 그 보람으로 또다른 새로움을 기약한다. 자고 일어나면 아이들에게 어떤 미래가 열릴 지, 내 아이가 얼마나 자라나 있을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확실한건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진 아이들인데, 당장의 어른들 기준에서 바라보며 쑥쑥 자라날 기회를 박탈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부모로서 아이를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이 아닌, 아이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설계한다는 생각을 가져본다면 배워나가고 채워나갈것이 많다. 갈수록 생활 영역에 편리함이 더해지는데, 아이 스스로도 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박탈해서는 안 될 것이다.
 

「좀비육아」 엔 체계적으로 육아에 관한 A~Z가 전혀 담겨 있지 않다. 오히려 부모를 힘들게 하는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마찬가지의 귀여운 복수를 펼치는 엉뚱한 전개로 이어간다. 관점을 달리하면 충분히 고단한 육아현실에서 최소한 긍정적인 위안을 찾을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생각밖으로 책은 두꺼웠지만, 따분하지 않은 이유였다. 발상의 전환이 우리의 육아가정을 좀더 견고하게 오랫동안 행복하게 만들어가는 자생분이 되지 않을까? 부제만 해도 "세상에 종말이 오고 좀비가 득실거려도 기저귀는 갈아야 한다." 로 붙일 정도로... 우리들 스스로 되돌릴 수 없는 필연적인게 육아라면, 의미를 되새기며 아이들의 관점에서 세심하게 바라보고 아이들의 생각을 맘껏 표현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 부모가 되는 순간 아이와 함께 새로운것들을 익혀가는것 만큼 최선의 육아는 드물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은 생각하기 따라서 풍요속의 빈곤을 스스로 자처하기 쉬운 세상이다. 제대로 쉴 엄두를 못내는 육아의 현실일수록, 마음만큼은 잠시라도 쉴 틈을 만들어둬야 한다. 힘들고 고단할때 엉뚱한 책이야말로 읽기도 좋고, 의외의 관점에서 웃을 계기점을 생성할 수 있다.

 

 

가족이 알아서 자리를 피하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가족을 떼놓으려면 은근함과 눈치가 필요하다.

불행히도 부모인 당신에게는 둘 다 없다.

-p216-

 

 

 

 아이가 자라는 동안 부모에 대한 절대 의존도도 점차 줄어든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가 또래들과 함께 어울리는 과정이 이어지고, 친구들과 함께 뛰어 노는것이 즐겁기 시작한다. 아이의 성장과 반비례하여 부모의 자존감의 자리는 맹목적인 역할로 전락하기 쉽다. 어느 정도 육아에 익숙해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근근히 버티셨던 부모의 부모님들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고 나면, 온전히 육아에 쏟아낼 애정보다는 오히려 감정풀이 하기 쉽다. '지금 상태로도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니, 제발 나의 상전님은 잠시라도 얌전하게 지내주소서.'
 

 그런데 현실속의 육아의 고달픔은 상대적 비교에서 오는 스스로의 완벽주의에 기인하는 면이 상당하다. 집중과 선택에 있어서 적재적소의 행동매칭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최소한의 관심이면 충분한 순간엔 도리어 지나치게 집착한 덕분에 정작 신경써야 할 부분은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능력좋다 한들 24시간 한계를 무한정으로 바꿔놓을 수 없다. 모든 일을 다 잘하려는 욕심이 지나치면, 어느 순간엔 만사가 귀찮아지는 그로기 상태에 봉착한다. 어른들의 기준에선 한낱 아이들의 본능적인 분별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훌쩍 부모보다도 감성이 발달되어있음에도, 어른들의 단조로운 사고방식에 맡겨 아이의 행동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유형에 가까울수록 육아 자체가 주는 스트레스 보다 본인 자신의 상실감에서 비롯된 무기력증을 염려해야 할 것이다. 흐늘적거리는 좀비처럼 육아로 인해 넋나간 체로 지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따로 관상을 연구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사람의 인상을 보면 말하지 않아도 고단함을 짐작하고도 남을 때가 많다. 불필요하게 아이들 스스로 깨우칠 영역까지 침범하지 않고 , 배려하는것이 현명한 육아의 시작이 아닐까? 되돌아보면 부모가 될 즈음의 어른들은 이미 실감한다.

 행복은 성적순에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도적으로 남들이 밟지 않은 길을 거침없이 나아갈수록 행복해지기 쉽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함에도 여전히 내가 학창시절에 못 이뤄낸 욕구실현을 대리만족하려는 경향이 강할수록, 육아를 핑계로 내 아이를 가둬놓게 된다. '함께'가 중요하다는것을 잠시라도 육아를 경험해보면 실감한다. 잠시 잠깐 숨쉴 틈이라도 만들 수 있다면, 한결 육아는 수월해진다. 그때 그때 쉴 틈이 있어야 그만큼 육아에도 집중할 수 있다. 온종일 매달려 시간을 채우는 싸움은 아닐 것이니, 적재적소 쉬게 할 수 있는 지혜가 절실하다. 정말로 고단함 끝에 찾아온 끄트머리 쉼표로 잠시라도 쉬어갈 수 있도록 틈이 필요하다. 가장 인간적인 매력은 빈 틈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빼곡하게 미세한 틈조차도 채워져있다면, 우리는 숨막히게 그 속에서 삭막함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기왕이면 즐겁고 보람찬 육아를 하자. 아이에 대한 세심한 관찰의 결과를 바탕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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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성차별의 역사 한빛비즈 교양툰 2
솔르다드 브라비.도로테 베르네르 지음, 맹슬기 옮김 / 한빛비즈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누구에게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행복을 누리기 위한 노력에 걸림돌이 될 성차별적 요소는 없어야 한다는 전제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평등 목적보다는 사회 질서유지 차원에서 제정된 법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마다 상이한 생각을 형평성있게 규율하기 위한 명확성이 아직 부족하다. 그런 까닭에 남녀에 관련된 이슈들은 젠더갈등을 야기시키는 양태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았다. 남과 여가 공존하는 세상인 만큼, 남자 vs 여자의 이분법적인 해법은 특정 성별에 치우칠 수 밖에 없다. 현실과 괴리감을 보인 체 사회적 양극화를 가속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기에 우리는 일면식도 없는 다른 사람들로 인한 영향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
 

「만화로 보는 성차별의 역사」 는 남녀평등에 있어서 절대적 소외를 당했던 그동안의 여성의 고단한 삶의 역사를 쉽게 만화로 풀어낸 책이다. 책 자체는 아주 가독성 높은데, 읽고나니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될 주제를 상기시키게 한다. 그것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의 가치를 전제로 할때, 그 유수한 시간속에 여성의 불평등이 당연시되었다는 점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여성의 잠재적인 능력 자체를 봉쇄하려는 야만적인 속성에 기인하기도 한다. 사람에 비해 육중한 몸집을 지닌 동물들을 사냥하던 수렵시절에도 가냘픈 여성들이 수확한 식량이 70% 정도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는 어쩌면 당연할 수 있다. 지금에 비해 저장기술이 발달되지 않은 척박한 환경에서부터 여성은 식량을 증식하는 기술을 터득해오고 있었다. 오로지 위험을 무릎쓰고, 거대한 동물을 사냥한 가치만이 인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불평등 자체가 차별의 묵인에 기인한 면은 아니었다. 드물지만 고대에서부터 여성이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하던 국가도 존재한다.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과부가 생겨나자, 수녀원에 은신하는 여성이 늘어났다. 각자의 독립적인 역량을 펼치기 시작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한 세습 권력 계층의 탄압으로 이어진다.
 

르네상스 시대엔 수많은 여성직업이 생겨났다. 여성의 적극적인 자유권이 태동하기 시작하고 불합리한 사회체제를 언급하는 순간 마녀로 지목되어 마녀사냥을 감행한다. 지금은 범죄로 규정짓는 많은 악습들이 관행적으로 이뤄졌다. 즉 그 당시 통치질서에 반하는 세력으로 규정된 이상, 최소한의 인간으로서의 고결한 가치도 존중받을 수 없었다.
 

 무려 30만년 씩이나 이어져오고 있는 성차별의 역사를 보니, 참혹하다는 생각밖에 안든다. 전반적으로 여성들의 사회진출은 확대되었는데, 중요한건 양극화의 측면이다. 동일직무 동일임금의 원칙에서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상당한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점차 사회는 수평적으로 변하고 있는데, 기존에 선점한 조직질서 자체가 성평등과 괴리하기 때문이다. 조직 구조자체는 연공서열에 따른 직급을 갖추고 있는 반면, 갈수록 업무 자체가 파생적으로 발달한다. 즉 하위직일수록 많은 시간을 투입해 업무에 매진해야 하는 구조이다. 또한 개인적인 생각으로 학습된 무기력에 기인하는 바도 크다. 힘이 없으니 무기력하게 잘못된 관행을 방관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성차별을 해결하려면 남녀간의 그릇된 인식이 극복되어야 한다. 즉 겪어보지 않은 선입견에 고착화된 판단 보다는 개별적인 주체로서 배려하고 존중해야 한다. 사람이 생활하다보면 알게모르게 외부효과를 발생한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이기적인 행동이 끔찍한 결과를 야기시키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늘 조심해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 나로 인해 선량한 다른 동성의 개별인이 피해보는 양상을 예방할 수 있다. 세상엔 나쁜 사람들 훨씬 이상으로 좋은 사람들이 많다. 다만 약육강식의 인식에 기인하고, 나약하게 무기력해지는 순간 그것은 수많은 방관자를 만들 뿐이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변하는 것은 없다. 잘못된 관행에 맞서 뭐라도 해야, 최소한 관행으로 여겨졌던 수많은 악습들을 근절할 수 있다.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곁들여 성차별이 근절되려면, 독립적인 주체로 이끌어주고 육성하며 다독거려줄 수 있는 따뜻한 리더가 많이 등장해, 푸근한 젠더감성을 삭막한 사회에 옮기는데 힘써야 한다.
 

 검색만 하면 쉽게 원하는 정보를 찾아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디지털문화가 발달할수록 단편적인 정보에 의존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러다보니 현상을 일으키는 배경정보는 소홀히 하게 된다. 사실 (Fact) 보다는 이미 결론을 단정내린 제목에 의존한다. 이러다보니 정작 회복해야 할 권리는 소홀히 한 체, 특정 집단에 함몰되어 권력화되는 현상까지 빚어진다. 오랜 세월의 암울한 그림자를 바로잡아 권익을 향상시키지 못하고, 특정의 이해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집단구성의 명목으로 전락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진정한 차별 해소는 끊임없는 자기성찰에서 비롯한다. 정작 남녀평등을 이야기하는 순간에도 고정관념의 틀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다. 많은 시스템은 기계적인 평등에 일관한다. 그러다보니 평등을 위한 정책이 도리어 역차별을 가중시킨다. 평등을 이야기하는데도 여전히 약자의 관념을 관철할때가 많다. 현실에서 남녀의 생물학적인 차이가 일 자체의 능력을 결정짓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과연 여성의 경제활동자체가 제약되던 가부장적인 환경에서의 기준이 얼마나 오늘날의 스마트한 직무에 합리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까?
 

 성차별은 새로운 가치에 대한 배타적인 문화에 기인한다. 즉 기존에 가치로 인정받고 사회적 위치를 점한 세력들의 조직적인 반발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퇴행적으로 누적되면 하나의 악습이 관행으로 정착한다. 성차별은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의 총체라 할 수 있다. 약육강식의 습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 상명하복 방식의 조직을 구성하는 형태이다. 즉 일사분란하게 명령 통제될 수 있는 체계부터 마련하는 것이다.
 

 다가오는 3월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작년에서야 우리는 처음으로 법정기념일로 지정했다. 이 날만큼이라도 내 자신의 성평등 의식을 되돌아보는 계기점이 되었으면 한다. 끔찍하고 슬픈 일이 회자되며 공론화되는 순간에도 공감능력은 커녕 가십거리 삼는 경우가 허다하다. 적어도 '가까운 내 주변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항상 상기한다면, 가볍게 여길 수 없다. 또한 억울하고 끔찍한 일을 겪었을때 서슴없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따뜻하게 품어주는 정책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불합리한 사회 시스템이 개선될때만이 성차별이 점진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 그런데 매번 산발적으로 일률적인 할당제 관념에 사로잡혔다는 생각을 품어본다.

 오늘날 우리가 당당하게 누리게 된 권리 또한 수없이 이어져온 투쟁의 결실이다. 여전히 결혼자체를 인구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지금의 현재에도 사람이 힘들게 감당해야 했던 많은 노동영역이 기계로 편리하게 대체되고 있다. 편리해질수록 그 틈바구니속에서 잠재력을 발휘할 가능성은 열려 있는 법이다. 다만 4차 산업혁명의 흐름대로 다변화되는 시대의 흐름에 발빠르게 정책이 쫓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더디게 하고 있다. 금기시되던 남녀의 성역이 역전되는 경우도 많다. 극히 일부에 국한하지만 가사영역을 전담하는 경우도 많다.
 

 남녀는 필연적으로 공생해 상호보완적인 작용을 한다. 소수의 지배계층에 기생하는 종속적인 습성이 강할수록 성차별 요소는 고착화될 수 밖에 없다. 반면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외치는 조직적인 목소리가 커질수록 외면할 수 없고 성차별은 퇴출될 수 밖에 없다. 18장은 다소 안타깝기도 하고, 아쉬운 대목아쉬운 부분이 가득했다. 특히 성범죄를 겪고서도 억울함을 신고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주변으로부터의 냉대와 솜방망이 처벌 때문이다. 혼란한 사회질서를 통제 규율하는 차원의 법에 가깝다. 그러다보니 최우선적으로 챙겨야 할 피해자의 존중 배려는 거의 발견하기 힘들다. 처절하게 투쟁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천부인권을 보장받게 되어있다. 나 자신의 권리는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권리를 명명백백하게 행사할때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나만 아니면 되지.'하는 무관심이 다수의 방관자를 양산하게 마련이다. 결국 성차별 문제는 개별적인 의식이 바뀔때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이다.
 

 성별 차원을 떠나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자기 스스로의 만만함이 최대의 적이란 생각을 해본다. 상대방에게 만만하게 여겨지는 순간 일방적인 차별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만만하지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평소에도 솔직한 나의 목소리를 외쳐야 한다. 성차별에 있어서는 참는것이 독이 될 수 밖에 없다. 내가 외친 용기로 인해 동성의 누군가는 뜻하지 않은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나로 인해 나와 너를 든든하게 지켜줄 수 있을때 평등또한 자연스럽게 실현된다. 이제는 차별을 속앓이하며 견디뎌 하지 말고, 숱한 세월 그랬던 것처럼 독립적인 주체로서 당당하게 투쟁을 외쳐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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