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의 철학이 제대로 숙성되려면, 을의 고통에 방관하지 않고 함께 동참하려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더이상 혼자만의 처절한 사투로 내버려둬서는 안된다. 지금은 세찬 바람을 피할 수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어제의 외면당한 동료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미 벼랑끝에 내몰린 이상 더이상 물러설 것도 없는 을의 입장에서 오지랖 스러움이 필요한 순간이다. 오지랖 스러움은 당장의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남의 희노애락에 공감하는 자세이다. 그런데 이 오지랖 스러움을 우리는 유난히 질투 시기에 연결해 , 몰라도 될 남의 뒷담화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야만 갑의 위치에 도달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여기는 것 일까? 당장의 내 처지가 절박하지만, 그 순간을 잠시 유보한 체 갑을 위치를 잊은 체 솔직한 목소리를 너도 나도 외칠때, 일방적인 불이익을 가하기도 힘들다. 목 끝까지 화가 치밀어올라도, 끝내 속앓이 하고 마는 많은 을의 고통이 깊어지는데엔, 가장 가까이서 하소연할 수 있어야 할 주변에게서 외면당하기 쉽다는 점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가족들조차도 참으라고만 한다. 참는 사람이 이긴거라고. 이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인가? 많은 을이 자신으로 인해 가족들이 슬플까봐 소리내어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그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견디고 버티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분명 그 과정을 수없이 거쳐왔을 가족이라면 먼저 공감할 것인데, 평상시의 오지랖 스러움도 발견하기 힘들다. 오지랖 스러움을 담아 서로를 위해 따뜻한 응원을 하자. 정작 오지랖 스러움이 절실한 영역은 을이다. 힘은 모아야 커지는 법이다. 불합리한 상황에도 매번 그러려니 참고 견뎌내는 순간, 악습은 근절되지 못하고 관행처럼 뿌리깊게 자리잡힌다.
진짜 두려운 건 나의 죽음이 아니다. 내 죽음으로 인해 지옥 같은 살아갈 너의 삶의 두렵다. -p261-
진심을 담아 주옥같은 마음의 글귀로 가득한 『을의 철학』 엔 공감 내용으로 가득했다. 어느 순간엔 눈물이 글썽일 정도로 감성적이기도 할 정도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 함께 기뻐할 일 보다, 슬픔에 공감해야 할 일이 많아진다. 어느 집 할 것 없이 건강하시던 어르신들 조차도 병원신세를 면하기 힘들어지신다. 오지랖스러움에 대한 확실한 부정을 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늘상 일을 도맡아 하시던 좋은 분들은 그 덕분에 골병들어 고생을 하시니 말이다. 자신이 감당하지도 못할 것들에게 지나치게 신경쓴 나머지, 본인들의 안위에 전혀 집중하지도 못한다. 평소에 같은 을의 처지에 공감을 나눴더라면, 을은 을대로 갑을 갑대로 존중 배려할 수 있는 문화를 생성하고 있었을 지도...

악몽처럼 매일 극단적인 생각을 떠올려야 했을때, 난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글 이라는 제목으로 일종의 유서를 써 둔 적이 있다. 언제 어느 순간 어떤 일을 겪을 지 모르기에 혹여라도 그럴 일이 생긴다면, 마지막 순간만큼 순전한 내 결정을 존중해달라는 뜻 에서였다. 내가 살아가는 오늘의 나날들을 항상 마지막 처럼 느끼고 열심히 살아간다면, 그만큼 삶에 보다 충실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게다가 마지막 순간의 결정이 혹여나 다른 사람에게 안좋은 영향을 미칠까봐서 조용한 선택을 감행하는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나만 그런 감정이 든게 아니었구나. 싶은 동감의 내용에서 큰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사실 정말 사소함이라 여기는 삶의 동기들이 촉매제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궁극적으로 '고독'이라는 자체를 저주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스스로를 을乙로 여겨본 적이 없다. 기회조차 제약된 정 丁의 입장에서도, 가끔 생각이 복잡해질때면, 남의 이야기를 듣곤 한다. 대부분은 절대적으로 나보다 여유로운 상황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나보다 고통스런 절망을 힘겹게 버티고 있는 사람에게 마음의 공감을 할 수 있을때 뿌듯하다. 내가 이겨낸 과정으로 인해 누군가는 내가 겪었던 힘겨운 과정을 피해, 희망을 품으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무살 때, 내게 우연히 찾아와 연달아 정신적 황폐기를 겪게 한 철학과 인연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자신을 깊게 돌아보는 출발점이 되었다. 물론 초반에는 급격하게 단절되기 시작하는 인간관계를 느끼며, 고독의 실체까지도 스스로 깨달아 나가야 했다. 분명한 건 그 무렵부터 불합리함을 배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불편한 사람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유독 인간관계의 경우 본인의 입장에서 쉽게 대할 수 있는 경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연락처 목록으로 가득하던 수많은 인연들이 점점 갑을 방식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니, 어느 정도는 공감이 가면서도, 내가 저 위치라면 그러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서로 다른 영역에서 명령지시받는 관계가 아닌데, 우리는 어느덧 어느 직장에 다니는지, 직급은 어떤 위치인지. 상대적 비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하는 번민에 사로잡혀 있다.


현실은 당장에 개척하기 힘들지만, 매번 직면해야 하는 현실 자체라면 충실해질 필요가 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어제의 상사가 내일의 하급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세상이치가 그러하다. 한 순간의 결정이 인생 자체의 승패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때 불필요한 생각요소들은 차단한다. 그 대신, 최대한 꼭 필요한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집중하는 자세는 무엇을 해도 잘 해나갈 수 있는 확신을 심겨준다. 을의 철학 습관은 불확실한 사회를 자기 스스로 개척해가는 열정을 심겨준다. 철학이 숙성되면 사고판단을 분명하게 하고, 의사결정자체를 스마트하게 전환해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개인적 경험으로도, 한번도 풍족한 상황이 없었기에 발품 팔아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엔 버젓한 비양심의 상황을 방관하다가는 결핍자체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챙겨주지 않으니 스스로 알아서 즐길 방책을 실행에 옮겨야만 한다.

『을의 철학』 은 나의 입장에서 보면 훨씬 평범한 이야기 들이었다. 가난 자체가 끔찍히도 싫을 정도였는데, 늘 나보다 갑을 배려하는 부모님들 덕분에 한치 앞도 저돌적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차라리 당시엔 비수로 꽂힐 일이라도 결단을 했어야 했다. 오히려 이런 경험적 상황이다보니, 그 어떤 책보다 많은 위안이 되었다. 책을 펴낸 순간 세상을 다 가진 듯 " 나약한 자들이여, 일어서라. 위대한 나처럼" 하는 자아도취는 발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그 어떤 단어보다 "염치"를 가슴속에 새겨두게 되었다. 좀더 잘할 수 있는데, 내 자신을 떳떳하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다. 그리고 내 자신이 솔직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참아내는 자체가 내 자신에게 가혹한 행위를 가하는 것이었다. 묵묵히 잘 될 수 있도록 바라만 봐줘도 좋을텐데. 싶은 순간이 많았다.

하지만 부질없이 온갖 타박으로 돌아오곤 했다. 처음엔 참다 못해 후회할 만큼 퍼붓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저런 철학적 사유를 하고 나니, 무덤덤하게 가라앉을 때가 많았다. 책의 문구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내용들이 여지없이 있다. 모처럼 수시로 들고다니며, 마음의 자생분으로 삼을 책을 접해 흐뭇하다. 그 어떤 인간관계보다도 복잡하지도 않고, 마음을 편하게 하는 친구. 결코 책은 적이 되지 않는다. 마음이 허한 사람에게 아낌없이 추천하는 『을의 철학』 이다. 매번 별표 평점 매길때마다 솔직히 난감하다. 대체로 내게 책 자체가 형편없었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책들 사이를 별표 몇개로 차별을 둔다는건 굉장히 무의미하다. 좋은 책일수록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를 성찰하게 해준다. 몇페이지에 어떤 구절이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사실 아무리 정독을 해도 책을 덮고 나면 어떤 내용이었더라. 구체적으로 떠오르지는 않는다. 다만 타이핑을 하는 순간 타타타탁 하는 반동과 함께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소리가 메아리치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그 감흥을 머뭇거림없이 떠올리게 해 좋은 책 『을의 철학』 이다.

이 책 서평은 한빛비즈 리더스클럽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끝까지 읽고 솔직한 소감을 담아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