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의 철학 - 2019 청소년 교양도서 선정
송수진 지음 / 한빛비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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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철학
을의 철학
저자
송수진
출판
한빛비즈
발매
2019.03.15.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고, 각자 행복을 누릴 권리를 가진다. 그런데 현실은 답답할 정도로 갑을 불평등 구조로 이어진다. 왜 그럴까? 누구나 자유를 누리려 하지만, 타인의 고유한 영역을 침해할 수 없다. 방종과 자유를 구분짓기 위한 잣대로 사회적 규칙인 법이 도입된다. 결론적으로 이 법 자체가 결코 사회적 인식의 흐름을 제대로 쫓아가지 못할 수록, 안좋은 선례가 당연한 관행으로 새겨질 뿐이다. 또한 현대의 시스템은 그 사회 구성원의 합의보다는 힘의 논리가 답습되어 대를 거듭한 것이 많다. 원인과 결과가 혼동된 사회현상의 결과물은 '책임전가'의 사회를 야기시켰다. 사회적 약자에 속할 수록 억울함을 구제받을 합리적인 수단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불합리한 사회 시스템을 마주할 때가 많아진다. 분명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하고, 한번 실수를 재차 반복하지 않도록 늘 반성해야 한다고 기성세대로부터 들어오며 자랐다. 그런데 '성인'연령에 진입하고 비로소 어른나이가 된 이후엔 늘 어떤 것이 '아이'와 '어른'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기준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말과 행동이 엇갈리는 이중적인 상황을 거듭하는 모습, 존경하고 싶지만 전혀 존중조차 꺼려하게 하는 낯부끄러운 모습들 속에 혼돈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그러함에도 세상엔 좋은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말로 부정적인 생각을 다독거릴 때가 많다. 비단 몰지각한 유형의 사람들이 특정 계층에 국한하지도 않는다. 

 

 

 

 

 

 

내가 '가야 할 곳' 이 내가'가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p9-

물론 내게도 책임을 전가할 방법은 있었다. -p18-

노동자의 생명이 달려 있는 수요는 부자와 자본가들의 기분에 달려 있다. -p23-


 어른은 자신이 하는 행위에 충분한 책임을 질 줄 아는 존재이다. 그런 만큼 자신의 말과 행동에 신중할 수 있고, 그것을 한창 성장하는 아이들은 긍정적인 본보기로 새길 수 있는 것이다. 주변에 본보기로 삼아 자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어른이 많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가진 잠재적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촉진해 나갈 수 있다. 밤낮 쪼개어 삶의 휴식을 포기한 체 열심히 일한 어른들 덕분으로 보편적인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성장 뒤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특히 경제활동의 일원으로 진입할 기회조차 사라지게 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기는 커녕, 그 이전부터 수반되었어야 할 구조적 문제점을 외면해 온 탓이다. 고용주와 고용자의 관계로 일컫어지는 갑을관계는 원래 대등한 계약적 관계에서 출발한다. 각종 법적 절차가 확행되고나니, 일일히 계약문서에 '나' 혹은 '너 님'으로 언급하는 대신, 일목요연하게 갑을로 규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서 말하는 갑을 관계는 전혀 서로 대등하지 않다. 일방적인 힘의 원칙을 제시해 상대방의 권리를 제약하는 관계로 변질시키고 있다. 비단 이런 관계는 계약적 관계에 한정하지는 않는다.
 

'소통'을 강조하는 SNS 에서도 개별적인 개인보다는 조직의 힘이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아무리 벼랑 끝의 열악한 상황들도 '이슈'로 부각되기까지의 과정은 험난하기만 하다. 언제 어느 순간 '내 자신'이 직면할 상황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하는데, 타인의 사연에 일희일비 한다는것은 힘든 일이다. 더욱이 파급적인 정보의 생산력이 '범람' 수준에 이르고 나면, 공감순으로 보기좋게 정렬된 '타인의 인식'에 따르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1인 미디어로 부상하기 이전부터 블로그를 활용해 오고 있는데, 보다 자세함을 추구할 수록 스크롤 압박을 동반하며 외면당하기 쉽다. 물론 예전이나 지금이나 좋은 글은 글의 길이에 비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목요연하게 정리될수록 간단명료하다. 분명한건 사실을 직시한 정보를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면이다.







냉정함은 세상을 마주하는 차분함 자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채널들이 생겨났다. 기술발달로 축적된 편리함과 인간 본연의 자유기제가 결합되면서 부터였다. 타인에게서 충족되지 않는 자아실현의 욕구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고무적인 현상은 전통적으로 미디어에 익숙하지 않은 계층들이 간편하게 유입된다는 면 이다. 그런데 한정된 시간에 선택할 범위가 많다보니, 오히려 또다시 '남'이 선택해 준 관념을 추종하는 경향이 크다. 최소한의 선별기준이 사라지고, 맹목성이 추구된다. 즐겨찾기 위에 추가해놓은 채널이 하나둘 늘어나고 나면, 우후죽순으로 즐겨찾기 목록만 늘어난다. 자주 보는 정보를 빠르게 접근하기 위해 설정하는 목적을 잃어가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즐겨볼 채널 몇개만 추가해뒀다면, 보다 유용한 정보를 집중적으로 습득했을 것이다.
 

 

 

 

 

 

시대가 발달할수록 선택지는 다양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한정된 시간속 에서 선택과 집중을 해야만 한다. 생각의 힘이 커질수록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 보다 자유로워지게 한다. 정보를 선별하는 기준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기준이 세워지니 불필요한 생각을 하느라 시간 낭비할 일이 줄어든다. 미리 장볼 목록을 적어두면, 충동구매를 해서 먹지도 못하고 버리는 일을 줄이는 이치와 같다.
 

 세상은 냉정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이상 냉정한 세상에 맞설 힘은 '생각'밖에 없다. 철학은 세상의 이치를 생각하는 방법을 성찰하는 학문이다. 수없이 자기 자신에게 왜?질문을 던졌고, 직면한 현실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 지를 생각해왔다. 솔직히 심오한 학문쯤으로 인식했었다. 허구헌 날 신세한탄만 하던 '철학과' 사람들. 가까이할수록 거리를 두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덕분에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겪지 않아도 좋았을, 인간관계의 냉정함을 반복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냉정함은 생각이나 행동이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침착한 자세로 일관하는 것을 말한다. 단어의 의미만 살펴보면, 이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마주하는 냉정함의 실체는 위험한 것이다. 즉 충분히 상황을 직시해 효과적으로 대처한다면 긍정적인 작용을 기대할 수 있다. 반면 수수방관으로 일관하다 어설프게 동조하는 사람 덕분에 감정만 격앙될 수 있다.
 

 갑을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을의 불평등을 개선하는 문제에 갑의 철학이 개입하기 시작한다. 항상 양보를 해야 하는건 덜 가진 쪽의 몫이다. 단적으로 이런 현상은 점점 연쇄작용을 한다. 먹이사슬처럼 갑 역할을 했던 자가 또다른 갑의 을이 되는 과정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사슬영역에서 자유로운 영역에서 엉뚱하게 왕대접을 받으려 한다. 조금만 서로 넓은 인간관계로 접근하면 을의 문제는 개선될 수 있는데, 개선되기는 커녕 고착화되어 악순환 된다. 을의 철학의 부재에서 오는 영향이 크다.
 

 

 

 

 

『을의 철학』 은 저자의 실제 경험담을 담아, 철학이 주는 긍정의 작용을 일깨워준다. 또한 속앓이 대신 당당하게 악질 꼰대에게 외치는 사이다 같은 말들도 남기고 있다. 세상은 냉정한데, 사람 속은 정말 답답할 정도로 흔들거린다. 억울한 상황을 겪어도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할 지도 우물쭈물한다. 흔히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변화를 꾀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철학은 냉정하다.

철학에 포근한 위로는 없다.

있는 그대로를 보라 하고

어둠에 직면하게 하며

벼랑 끝에 서게 한다.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철학 자체는 냉정하다.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채워질수록 수많은 번민에 사로잡힌다. 분명한건 냉정한 상황을 겸어하게 받아들이고 불가결한 방법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것은 '자존감' 이 될 수도 있고, '자괴감'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우리는 자신감이 넘쳐 자만심으로 변하는 순간을 경계해야 한다. 그 순간 을의 철학을 잊은 체로 영원한 갑으로 착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동안 을의 철학이 부재해 보이는 건, '갑'의 위치를 절대적이고 영속적인 속성으로 여기는 데서 기인한다 . 대자연도 오랜 세월에 걸쳐 퇴적 -침식 작용으로 변화무쌍한데, 인간의 영역에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단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사회의 단면이 되풀이 될 뿐 이다.


 

그들은 자신의 진짜 적이 누구인지 눈치채지 못했다. -p26-

마르크스에게 진짜 중요한 본질은 '누구를 위한 기술혁신 인가 하는 점 이었다. -p42-







 아무리 유용한 수단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누구를 이롭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극명하게 달라진다. 모든 이를 만족시킬 수 없는 공공분야의 경우 특히 그렇다. 알고보면 최종적인 수혜자는 그 시스템 위에 독점이윤을 추구하는 갑 인데, 공공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첨예하게 을끼리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오히려 갈등을 일으키는 구성체를 어르고 달래기 위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킨다. 을의 철학은 '손익계산서'가 아니다. 막대한 이득을 거둘때가 있는가 하면, 손실을 감수할 때가 있다. 실현한 '부의 원천'에 대한 인식이 부재한 것도 을의 철학이 사라지는 원인이 된다. 심지어 부동산 문제 해결에 있어서는 같은 가족도 동상이몽 서로 갑, 을로 변질된다. 자녀들의 내 집 마련이 걱정되면서도, 기존에 실현될 내 집에 대한 차익실현을 염두에 둔다. 두 마리 토끼를 쫓아가는 양상인 것이다.
 

나 하나 쯤은 아닌,

 

나 하나 만큼은 결코.



 

사실 요즘처럼 집이 불편하고 답답한 존재로 와닿은 적이 없다. 오래되어 낡고 좁아서도 아니다. 집값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부모님네 시각때문이었다. 낡고 허름하면 보이는 자체를 고쳐나가면 되는데, 무조건 뜯어 고치는데 집착한다. 그래야만 보다 높은 가치책정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에 곳곳을 아기자기하게 꾸미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 을의 철학 따위를 떠올릴 여유없이 보낸 기성세대 덕분에 틀에 갇혀 지내게 된다. 현실에 직면한 불합리함을 비판하면 감정낭비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그러함에도 끊임없이 생각의 변화를 시도한다.

 

적어도 나 하나 만큼은 불합리한 상황을 방치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예전보다는 훨씬 수그러든 측면이 있다. 더욱이 사람은 필연적으로 '고독'을 떠안고 살아가기에 나름의 즐기는 방법을 삶을 통해 실행하는 측면이 있다. 다양한 인간관계를 겪는 순간 지레 걱정을 앞세운 체, 도전할 용기를 잃게 된다. 그러다보니 현실속에서 안주할 수 있는 '역할놀이'로 나약한 자아를 감추기에 급급하다. 어찌보면 을의 철학이 숙성될수록, 어떤 위치에 놓여있든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여 살기좋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p92-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잘못된 환상을 심어준다. -p191-

수처직주 : 그대가 어느 곳에서라도 자기가 주인이 된다면 자기가 있는 그 곳은 모두 진실한 깨달음의 경지가 된다. -p215-

약자가 강장게 하는 배려는 배려가 아니다. 참을 수 밖에 없어서 참고, 나 하나 참으면 된다며 넘기는 건 배려가 아니었다. -p217-



 생각 자체가 부실해질 수록, 권위주의가 팽배해질 수 밖에 없다. 아는 것이 없을수록 갑의 논리에 편승하기 쉽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이성적 능력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합리적인 비판을 통한 견제 균형은 부실해진다. 다양한 유형의 인간유형을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비교해 과잉일반화 오류에 스스로를 노출시킨다.
 

 점점 집약적인 정주여건에서 벗어나 분산 형성되다보니, 개인주의나 이기주의가 팽배해진다 여기기 쉽다. 하지만 단적으로 예전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관행처럼 고착화된 악습의 실체가 부각된 유형이 많다. 즉 남들도 그러니 나 하나쯤은 해도 아무 문제 없겠지? 하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도 직위고하가 충족되면 똑같은 잘못도 쉬쉬하는 문화가 강했다. 사회적 영향력이 없는 나 개인이 나선다고 바뀔까? 

 

 


 

 단적으로 수많은 을의 나비효과로 인해 사회제도는 보다 인간적으로 개선되어왔다. 불의에 맞서 자신의 삶을 헌신해 살신성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최소한 각자에게 주어진 권리를 스스로 지켜나가려는 노력을 더할때, 응집력있게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수처직주처럼 어디에 있든 주체적인 권리 의식이 있어야 진실이 은폐되지 않는다. 하다못해 번번히 불합리한 상황에 개선책을 제시하는 외침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것도 한계에 부딪칠 수 밖에 없다. 세상의 많은 이슈에 관심을 쏟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최소한 마음만큼은 함께 하고 있지만, 생존의 삶 속에 잠시 미뤄둘 수 밖에 없다는 공감의 표현이 필요하다. 나와 생각을 더하는 사람들이 있을때, 든든한 힘을 얻을 때가 많다. 

 

 

 



 

실제로 실무도 할 줄 모르면서 어찌 관리직까지 갔을까 싶은 상사들은 자신이 해보지 않아 그 업무가 얼마나 힘들고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리는지 전혀 모른다. 그저 시간을 촉박하게 주고서 조그만 실수라도 나오면 권력을 이용해 쥐 잡듯 한다. -p225-

아무런 예고 없이 약자가 광장에 설 때, 약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p234-

타인의 아픔을 광장에서 봤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는 광장으로 모여야 한다. -p235-




오지랖 스러움이 진정 필요한 순간을 알 때.

 

 

 

 을의 철학이 제대로 숙성되려면, 을의 고통에 방관하지 않고 함께 동참하려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더이상 혼자만의 처절한 사투로 내버려둬서는 안된다. 지금은 세찬 바람을 피할 수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어제의 외면당한 동료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미 벼랑끝에 내몰린 이상 더이상 물러설 것도 없는 을의 입장에서 오지랖 스러움이 필요한 순간이다. 오지랖 스러움은 당장의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남의 희노애락에 공감하는 자세이다. 그런데 이 오지랖 스러움을 우리는 유난히 질투 시기에 연결해 , 몰라도 될 남의 뒷담화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야만 갑의 위치에 도달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여기는 것 일까? 당장의 내 처지가 절박하지만, 그 순간을 잠시 유보한 체 갑을 위치를 잊은 체 솔직한 목소리를 너도 나도 외칠때, 일방적인 불이익을 가하기도 힘들다. 목 끝까지 화가 치밀어올라도, 끝내 속앓이 하고 마는 많은 을의 고통이 깊어지는데엔, 가장 가까이서 하소연할 수 있어야 할 주변에게서 외면당하기 쉽다는 점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가족들조차도 참으라고만 한다. 참는 사람이 이긴거라고. 이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인가? 많은 을이 자신으로 인해 가족들이 슬플까봐 소리내어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그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견디고 버티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분명 그 과정을 수없이 거쳐왔을 가족이라면 먼저 공감할 것인데, 평상시의 오지랖 스러움도 발견하기 힘들다. 오지랖 스러움을 담아 서로를 위해 따뜻한 응원을 하자. 정작 오지랖 스러움이 절실한 영역은 을이다. 힘은 모아야 커지는 법이다. 불합리한 상황에도 매번 그러려니 참고 견뎌내는 순간, 악습은 근절되지 못하고 관행처럼 뿌리깊게 자리잡힌다.

 

진짜 두려운 건 나의 죽음이 아니다. 내 죽음으로 인해 지옥 같은 살아갈 너의 삶의 두렵다. -p261-


진심을 담아 주옥같은 마음의 글귀로 가득한 『을의 철학』 엔 공감 내용으로 가득했다. 어느 순간엔 눈물이 글썽일 정도로 감성적이기도 할 정도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 함께 기뻐할 일 보다, 슬픔에 공감해야 할 일이 많아진다. 어느 집 할 것 없이 건강하시던 어르신들 조차도 병원신세를 면하기 힘들어지신다. 오지랖스러움에 대한 확실한 부정을 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늘상 일을 도맡아 하시던 좋은 분들은 그 덕분에 골병들어 고생을 하시니 말이다. 자신이 감당하지도 못할 것들에게 지나치게 신경쓴 나머지, 본인들의 안위에 전혀 집중하지도 못한다. 평소에 같은 을의 처지에 공감을 나눴더라면, 을은 을대로 갑을 갑대로 존중 배려할 수 있는 문화를 생성하고 있었을 지도...




 악몽처럼 매일 극단적인 생각을 떠올려야 했을때, 난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글 이라는 제목으로 일종의 유서를 써 둔 적이 있다. 언제 어느 순간 어떤 일을 겪을 지 모르기에 혹여라도 그럴 일이 생긴다면, 마지막 순간만큼 순전한 내 결정을 존중해달라는 뜻 에서였다. 내가 살아가는 오늘의 나날들을 항상 마지막 처럼 느끼고 열심히 살아간다면, 그만큼 삶에 보다 충실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게다가 마지막 순간의 결정이 혹여나 다른 사람에게 안좋은 영향을 미칠까봐서 조용한 선택을 감행하는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나만 그런 감정이 든게 아니었구나. 싶은 동감의 내용에서 큰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사실 정말 사소함이라 여기는 삶의 동기들이 촉매제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궁극적으로 '고독'이라는 자체를 저주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스스로를 을乙로 여겨본 적이 없다. 기회조차 제약된 정 丁의 입장에서도, 가끔 생각이 복잡해질때면, 남의 이야기를 듣곤 한다. 대부분은 절대적으로 나보다 여유로운 상황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나보다 고통스런 절망을 힘겹게 버티고 있는 사람에게 마음의 공감을 할 수 있을때 뿌듯하다. 내가 이겨낸 과정으로 인해 누군가는 내가 겪었던 힘겨운 과정을 피해, 희망을 품으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무살 때, 내게 우연히 찾아와 연달아 정신적 황폐기를 겪게 한 철학과 인연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자신을 깊게 돌아보는 출발점이 되었다. 물론 초반에는 급격하게 단절되기 시작하는 인간관계를 느끼며, 고독의 실체까지도 스스로 깨달아 나가야 했다. 분명한 건 그 무렵부터 불합리함을 배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불편한 사람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유독 인간관계의 경우 본인의 입장에서 쉽게 대할 수 있는 경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연락처 목록으로 가득하던 수많은 인연들이 점점 갑을 방식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니, 어느 정도는 공감이 가면서도, 내가 저 위치라면 그러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서로 다른 영역에서 명령지시받는 관계가 아닌데, 우리는 어느덧 어느 직장에 다니는지, 직급은 어떤 위치인지. 상대적 비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하는 번민에 사로잡혀 있다.






 

현실은 당장에 개척하기 힘들지만, 매번 직면해야 하는 현실 자체라면 충실해질 필요가 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어제의 상사가 내일의 하급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세상이치가 그러하다. 한 순간의 결정이 인생 자체의 승패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때 불필요한 생각요소들은 차단한다. 그 대신, 최대한 꼭 필요한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집중하는 자세는 무엇을 해도 잘 해나갈 수 있는 확신을 심겨준다. 을의 철학 습관은 불확실한 사회를 자기 스스로 개척해가는 열정을 심겨준다. 철학이 숙성되면 사고판단을 분명하게 하고, 의사결정자체를 스마트하게 전환해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개인적 경험으로도, 한번도 풍족한 상황이 없었기에 발품 팔아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엔 버젓한 비양심의 상황을 방관하다가는 결핍자체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챙겨주지 않으니 스스로 알아서 즐길 방책을 실행에 옮겨야만 한다. 



 

 

『을의 철학』 은 나의 입장에서 보면 훨씬 평범한 이야기 들이었다. 가난 자체가 끔찍히도 싫을 정도였는데, 늘 나보다 갑을 배려하는 부모님들 덕분에 한치 앞도 저돌적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차라리 당시엔 비수로 꽂힐 일이라도 결단을 했어야 했다. 오히려 이런 경험적 상황이다보니, 그 어떤 책보다 많은 위안이 되었다. 책을 펴낸 순간 세상을 다 가진 듯 " 나약한 자들이여, 일어서라. 위대한 나처럼" 하는 자아도취는 발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그 어떤 단어보다 "염치"를 가슴속에 새겨두게 되었다. 좀더 잘할 수 있는데, 내 자신을 떳떳하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다. 그리고 내 자신이 솔직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참아내는 자체가 내 자신에게 가혹한 행위를 가하는 것이었다. 묵묵히 잘 될 수 있도록 바라만 봐줘도 좋을텐데. 싶은 순간이 많았다.






하지만 부질없이 온갖 타박으로 돌아오곤 했다. 처음엔 참다 못해 후회할 만큼 퍼붓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저런 철학적 사유를 하고 나니, 무덤덤하게 가라앉을 때가 많았다. 책의 문구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내용들이 여지없이 있다. 모처럼 수시로 들고다니며, 마음의 자생분으로 삼을 책을 접해 흐뭇하다. 그 어떤 인간관계보다도 복잡하지도 않고, 마음을 편하게 하는 친구. 결코 책은 적이 되지 않는다. 마음이 허한 사람에게 아낌없이 추천하는 『을의 철학』 이다. 매번 별표 평점 매길때마다 솔직히 난감하다. 대체로 내게 책 자체가 형편없었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책들 사이를 별표 몇개로 차별을 둔다는건 굉장히 무의미하다. 좋은 책일수록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를 성찰하게 해준다. 몇페이지에 어떤 구절이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사실 아무리 정독을 해도 책을 덮고 나면 어떤 내용이었더라. 구체적으로 떠오르지는 않는다. 다만 타이핑을 하는 순간 타타타탁 하는 반동과 함께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소리가 메아리치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그 감흥을 머뭇거림없이 떠올리게 해 좋은 책 『을의 철학』 이다.





 

이 책 서평은 한빛비즈 리더스클럽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끝까지 읽고 솔직한 소감을 담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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