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보는 성차별의 역사 한빛비즈 교양툰 2
솔르다드 브라비.도로테 베르네르 지음, 맹슬기 옮김 / 한빛비즈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누구에게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행복을 누리기 위한 노력에 걸림돌이 될 성차별적 요소는 없어야 한다는 전제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평등 목적보다는 사회 질서유지 차원에서 제정된 법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마다 상이한 생각을 형평성있게 규율하기 위한 명확성이 아직 부족하다. 그런 까닭에 남녀에 관련된 이슈들은 젠더갈등을 야기시키는 양태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았다. 남과 여가 공존하는 세상인 만큼, 남자 vs 여자의 이분법적인 해법은 특정 성별에 치우칠 수 밖에 없다. 현실과 괴리감을 보인 체 사회적 양극화를 가속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기에 우리는 일면식도 없는 다른 사람들로 인한 영향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
 

「만화로 보는 성차별의 역사」 는 남녀평등에 있어서 절대적 소외를 당했던 그동안의 여성의 고단한 삶의 역사를 쉽게 만화로 풀어낸 책이다. 책 자체는 아주 가독성 높은데, 읽고나니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될 주제를 상기시키게 한다. 그것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의 가치를 전제로 할때, 그 유수한 시간속에 여성의 불평등이 당연시되었다는 점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여성의 잠재적인 능력 자체를 봉쇄하려는 야만적인 속성에 기인하기도 한다. 사람에 비해 육중한 몸집을 지닌 동물들을 사냥하던 수렵시절에도 가냘픈 여성들이 수확한 식량이 70% 정도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는 어쩌면 당연할 수 있다. 지금에 비해 저장기술이 발달되지 않은 척박한 환경에서부터 여성은 식량을 증식하는 기술을 터득해오고 있었다. 오로지 위험을 무릎쓰고, 거대한 동물을 사냥한 가치만이 인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불평등 자체가 차별의 묵인에 기인한 면은 아니었다. 드물지만 고대에서부터 여성이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하던 국가도 존재한다.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과부가 생겨나자, 수녀원에 은신하는 여성이 늘어났다. 각자의 독립적인 역량을 펼치기 시작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한 세습 권력 계층의 탄압으로 이어진다.
 

르네상스 시대엔 수많은 여성직업이 생겨났다. 여성의 적극적인 자유권이 태동하기 시작하고 불합리한 사회체제를 언급하는 순간 마녀로 지목되어 마녀사냥을 감행한다. 지금은 범죄로 규정짓는 많은 악습들이 관행적으로 이뤄졌다. 즉 그 당시 통치질서에 반하는 세력으로 규정된 이상, 최소한의 인간으로서의 고결한 가치도 존중받을 수 없었다.
 

 무려 30만년 씩이나 이어져오고 있는 성차별의 역사를 보니, 참혹하다는 생각밖에 안든다. 전반적으로 여성들의 사회진출은 확대되었는데, 중요한건 양극화의 측면이다. 동일직무 동일임금의 원칙에서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상당한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점차 사회는 수평적으로 변하고 있는데, 기존에 선점한 조직질서 자체가 성평등과 괴리하기 때문이다. 조직 구조자체는 연공서열에 따른 직급을 갖추고 있는 반면, 갈수록 업무 자체가 파생적으로 발달한다. 즉 하위직일수록 많은 시간을 투입해 업무에 매진해야 하는 구조이다. 또한 개인적인 생각으로 학습된 무기력에 기인하는 바도 크다. 힘이 없으니 무기력하게 잘못된 관행을 방관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성차별을 해결하려면 남녀간의 그릇된 인식이 극복되어야 한다. 즉 겪어보지 않은 선입견에 고착화된 판단 보다는 개별적인 주체로서 배려하고 존중해야 한다. 사람이 생활하다보면 알게모르게 외부효과를 발생한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이기적인 행동이 끔찍한 결과를 야기시키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늘 조심해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 나로 인해 선량한 다른 동성의 개별인이 피해보는 양상을 예방할 수 있다. 세상엔 나쁜 사람들 훨씬 이상으로 좋은 사람들이 많다. 다만 약육강식의 인식에 기인하고, 나약하게 무기력해지는 순간 그것은 수많은 방관자를 만들 뿐이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변하는 것은 없다. 잘못된 관행에 맞서 뭐라도 해야, 최소한 관행으로 여겨졌던 수많은 악습들을 근절할 수 있다.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곁들여 성차별이 근절되려면, 독립적인 주체로 이끌어주고 육성하며 다독거려줄 수 있는 따뜻한 리더가 많이 등장해, 푸근한 젠더감성을 삭막한 사회에 옮기는데 힘써야 한다.
 

 검색만 하면 쉽게 원하는 정보를 찾아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디지털문화가 발달할수록 단편적인 정보에 의존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러다보니 현상을 일으키는 배경정보는 소홀히 하게 된다. 사실 (Fact) 보다는 이미 결론을 단정내린 제목에 의존한다. 이러다보니 정작 회복해야 할 권리는 소홀히 한 체, 특정 집단에 함몰되어 권력화되는 현상까지 빚어진다. 오랜 세월의 암울한 그림자를 바로잡아 권익을 향상시키지 못하고, 특정의 이해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집단구성의 명목으로 전락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진정한 차별 해소는 끊임없는 자기성찰에서 비롯한다. 정작 남녀평등을 이야기하는 순간에도 고정관념의 틀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다. 많은 시스템은 기계적인 평등에 일관한다. 그러다보니 평등을 위한 정책이 도리어 역차별을 가중시킨다. 평등을 이야기하는데도 여전히 약자의 관념을 관철할때가 많다. 현실에서 남녀의 생물학적인 차이가 일 자체의 능력을 결정짓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과연 여성의 경제활동자체가 제약되던 가부장적인 환경에서의 기준이 얼마나 오늘날의 스마트한 직무에 합리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까?
 

 성차별은 새로운 가치에 대한 배타적인 문화에 기인한다. 즉 기존에 가치로 인정받고 사회적 위치를 점한 세력들의 조직적인 반발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퇴행적으로 누적되면 하나의 악습이 관행으로 정착한다. 성차별은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의 총체라 할 수 있다. 약육강식의 습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 상명하복 방식의 조직을 구성하는 형태이다. 즉 일사분란하게 명령 통제될 수 있는 체계부터 마련하는 것이다.
 

 다가오는 3월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작년에서야 우리는 처음으로 법정기념일로 지정했다. 이 날만큼이라도 내 자신의 성평등 의식을 되돌아보는 계기점이 되었으면 한다. 끔찍하고 슬픈 일이 회자되며 공론화되는 순간에도 공감능력은 커녕 가십거리 삼는 경우가 허다하다. 적어도 '가까운 내 주변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항상 상기한다면, 가볍게 여길 수 없다. 또한 억울하고 끔찍한 일을 겪었을때 서슴없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따뜻하게 품어주는 정책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불합리한 사회 시스템이 개선될때만이 성차별이 점진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 그런데 매번 산발적으로 일률적인 할당제 관념에 사로잡혔다는 생각을 품어본다.

 오늘날 우리가 당당하게 누리게 된 권리 또한 수없이 이어져온 투쟁의 결실이다. 여전히 결혼자체를 인구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지금의 현재에도 사람이 힘들게 감당해야 했던 많은 노동영역이 기계로 편리하게 대체되고 있다. 편리해질수록 그 틈바구니속에서 잠재력을 발휘할 가능성은 열려 있는 법이다. 다만 4차 산업혁명의 흐름대로 다변화되는 시대의 흐름에 발빠르게 정책이 쫓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더디게 하고 있다. 금기시되던 남녀의 성역이 역전되는 경우도 많다. 극히 일부에 국한하지만 가사영역을 전담하는 경우도 많다.
 

 남녀는 필연적으로 공생해 상호보완적인 작용을 한다. 소수의 지배계층에 기생하는 종속적인 습성이 강할수록 성차별 요소는 고착화될 수 밖에 없다. 반면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외치는 조직적인 목소리가 커질수록 외면할 수 없고 성차별은 퇴출될 수 밖에 없다. 18장은 다소 안타깝기도 하고, 아쉬운 대목아쉬운 부분이 가득했다. 특히 성범죄를 겪고서도 억울함을 신고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주변으로부터의 냉대와 솜방망이 처벌 때문이다. 혼란한 사회질서를 통제 규율하는 차원의 법에 가깝다. 그러다보니 최우선적으로 챙겨야 할 피해자의 존중 배려는 거의 발견하기 힘들다. 처절하게 투쟁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천부인권을 보장받게 되어있다. 나 자신의 권리는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권리를 명명백백하게 행사할때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나만 아니면 되지.'하는 무관심이 다수의 방관자를 양산하게 마련이다. 결국 성차별 문제는 개별적인 의식이 바뀔때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이다.
 

 성별 차원을 떠나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자기 스스로의 만만함이 최대의 적이란 생각을 해본다. 상대방에게 만만하게 여겨지는 순간 일방적인 차별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만만하지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평소에도 솔직한 나의 목소리를 외쳐야 한다. 성차별에 있어서는 참는것이 독이 될 수 밖에 없다. 내가 외친 용기로 인해 동성의 누군가는 뜻하지 않은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나로 인해 나와 너를 든든하게 지켜줄 수 있을때 평등또한 자연스럽게 실현된다. 이제는 차별을 속앓이하며 견디뎌 하지 말고, 숱한 세월 그랬던 것처럼 독립적인 주체로서 당당하게 투쟁을 외쳐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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