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육아 - 철없는 딸바보 아빠의 현실밀착형 육아 에세이
제임스 브레이크웰 지음, 최다인 옮김 / 한빛비즈 / 2019년 2월
평점 :
절판


 저마다의 다른 삶의 방식을 배워가며, 삶을 알아가는 존재가 사람이 아닐까? 싶다. 다양한 경험의 잣대를 토대로 행동에 있어서 책임질 수 있는것이 어른이 아닐까? 이 책임성을 우리는 '역할부여'에 수반하여 일깨워가고, 터득해간다. 대체로 '결혼'의 방식을 통해 우리는 어른의 역할 상당수를 학습해간다. 즉 절대적인 피임이 아닌 한 한 가정을 이뤄가고 정착해가는 과정에서 육아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육아는 단순한 출산 교육에 그치지 않고, 세상의 풍파속에 부모로서 든든한 울타리로 지켜주겠다는 본능적인 신의성실의 약속을 의미한다. "네가 세상에 온전한 독립적인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줄께. " 이미 이전 세대의 양육을 통해 성인으로 자라나고, 그 부모가 했던 역할을 수행해 가는 것이다.
 

 그런데 1인가구가 점차 확산되고, '비혼'의 단어가 웃프게도 통용될 만큼 부모가 되는 시작 자체가 쉽지 않다. 시대가 발달할수록 평균적인 생활수준이 높아지는데, 기본 정주여건은 오히려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결혼을 준비할 수 있다는 자체가 때론 부러움을 살 때가 있다. 중요한건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겠다는 서로의 약속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자세에 있을 것이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의 모습은 대체로 경애롭다. 한순간에 복잡미묘한 감정이 새하얗게 씻겨나가는 감성을 쉽게 고양할 수 있다. 그런데 육아의 과정은 살벌할때가 많다. 장난끼 가득찬 아이가 혹여나 다칠까 싶어 쫓아다니다보면, 부모의 육체적 고단함이 엄청나다. 쫓아다니지 않아도 될 단계에 이르러서는 정신적인 수행으로 이어진다.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서도 부모에게 내 자식에 대한 걱정은 습관적으로 이어진다.
 

 결혼은 아직 하지도, 서두르지도 않고 태연한데 벌써 조카 육아는 오랜 세월을 거듭한다. 나이 차 많은 사촌 족보 막내 삼촌의 비애랄까? 하염없이 꾸벅꾸벅 졸아대는 모습, 어느정도 자라서는 이제는 천정 높이 사람 그네를 태워주며 놀아줄 수 없을때를 발견하면 허무함이 몰아온다. 에너자이저를 방굴케 하는 에너지 앞에 아주 가끔 '좀비'와 묘하게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봤다. 즉 좀비는 오로지 물어뜯으며 세균에 전염된 종족을 늘려가며 집단으로 몰려간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세균번식 하듯 숫자가 늘어나니 막강한 근력의 사람도 속수무책으로 좀비화되어간다. 그런데 좀비가 있는 곳이 아는 것과 모르는것은 극명한 차이가 있다. 딸 넷을 키우는 아빠가 쓴 「좀비육아」 는 다소 특이한 책이다. 좀비로 가득한 사회의 종말에 맞서 필연적인 육아를 대비하고 있다. 즉 지극히 당연한 부모의 역할에 대해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책이다.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대상의 하나는 아포칼립스 (apocalypse)의 존재이다. 종말, 대재앙 같은 표면적인 의미 이외에 아포칼립스는 탄생순간부터 해괴한 형체를 띈 불완전 존재에서 점차 가장 강력한 존재로 생존하는 흐름을 상징한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존재 스스로 거칠고 메마른 환경에 적응하는 방법을 터득하며 생존력 강한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을 일깨우고 있다.
 

「좀비육아」는 아이들이 거쳐야 할 불완전한 환경자체를 좀비에 비유하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 맞서 강하게 키워낼 수 있는 법을 말해주고 있다. 기존의 전문적인 해설이 가미된 육아관련서적과 확연히 엉뚱한 맥락을 취하고 있어서 글 자체를 이해하는건 상당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곁들여 단순화된 캐릭터가 접목된 아이 관점의 삽화가 더해지니, 부모의식을 명확하게 할 수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생각 이상으로 훨씬 학습습득력이 뛰어나다. 사람의 감정에 대한 이해도 밝고, 감정표현도 솔직하다. 당장에 억울해지면 울음을 터트릴 정도이다. 어른은 푸근한 품에 아이를 안은 체 토닥이며 어떤 감정상태가 잘 표현되지 않아서 슬픈걸까? 관심을 가지면 족하다. 이내 울음을 그치고 꺄르르 웃는 아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정확히는 어른보다 감정능력에 있어서는 탁월하다. 경험의 절대적인 부족에서 오는 감정 통제 자체에 익숙하지 못할 뿐이다. 아이는 실컷 울고 나서야 해맑게 웃을 수도 있다.


아이는 몸집이 작고 에너지가 넘쳐서

부모가 미처 보지 못한 구석까지

샅샅이 살필 수 있다.

-p100-

 

 문득 바닥의 미세한 조각까지도 손쉽게 발견하는 조카의 관찰력이 떠올랐다. 그렇다. 어른의 잣대에서 보면 아이들을 과소평가 하기 쉽다. 더욱이 교육열이 치열한 우리의 경우 그런 아이들의 잠재력을 발굴하기보다, 아이들끼리의 경쟁을 부추기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얼굴에서 온통 근심가득한 육아의 현실은 흡사 전쟁터를 방굴케한다. 그런데 그 치열한 전쟁터속에 얻는 잠깐의 꺄르르 순간에 고단함이 사라질때가 많다. 치열하게 최선을 다한 만큼 순간의 희열은 크다. 그 보람으로 또다른 새로움을 기약한다. 자고 일어나면 아이들에게 어떤 미래가 열릴 지, 내 아이가 얼마나 자라나 있을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확실한건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진 아이들인데, 당장의 어른들 기준에서 바라보며 쑥쑥 자라날 기회를 박탈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부모로서 아이를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이 아닌, 아이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설계한다는 생각을 가져본다면 배워나가고 채워나갈것이 많다. 갈수록 생활 영역에 편리함이 더해지는데, 아이 스스로도 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박탈해서는 안 될 것이다.
 

「좀비육아」 엔 체계적으로 육아에 관한 A~Z가 전혀 담겨 있지 않다. 오히려 부모를 힘들게 하는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마찬가지의 귀여운 복수를 펼치는 엉뚱한 전개로 이어간다. 관점을 달리하면 충분히 고단한 육아현실에서 최소한 긍정적인 위안을 찾을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생각밖으로 책은 두꺼웠지만, 따분하지 않은 이유였다. 발상의 전환이 우리의 육아가정을 좀더 견고하게 오랫동안 행복하게 만들어가는 자생분이 되지 않을까? 부제만 해도 "세상에 종말이 오고 좀비가 득실거려도 기저귀는 갈아야 한다." 로 붙일 정도로... 우리들 스스로 되돌릴 수 없는 필연적인게 육아라면, 의미를 되새기며 아이들의 관점에서 세심하게 바라보고 아이들의 생각을 맘껏 표현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 부모가 되는 순간 아이와 함께 새로운것들을 익혀가는것 만큼 최선의 육아는 드물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은 생각하기 따라서 풍요속의 빈곤을 스스로 자처하기 쉬운 세상이다. 제대로 쉴 엄두를 못내는 육아의 현실일수록, 마음만큼은 잠시라도 쉴 틈을 만들어둬야 한다. 힘들고 고단할때 엉뚱한 책이야말로 읽기도 좋고, 의외의 관점에서 웃을 계기점을 생성할 수 있다.

 

 

가족이 알아서 자리를 피하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가족을 떼놓으려면 은근함과 눈치가 필요하다.

불행히도 부모인 당신에게는 둘 다 없다.

-p216-

 

 

 

 아이가 자라는 동안 부모에 대한 절대 의존도도 점차 줄어든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가 또래들과 함께 어울리는 과정이 이어지고, 친구들과 함께 뛰어 노는것이 즐겁기 시작한다. 아이의 성장과 반비례하여 부모의 자존감의 자리는 맹목적인 역할로 전락하기 쉽다. 어느 정도 육아에 익숙해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근근히 버티셨던 부모의 부모님들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고 나면, 온전히 육아에 쏟아낼 애정보다는 오히려 감정풀이 하기 쉽다. '지금 상태로도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니, 제발 나의 상전님은 잠시라도 얌전하게 지내주소서.'
 

 그런데 현실속의 육아의 고달픔은 상대적 비교에서 오는 스스로의 완벽주의에 기인하는 면이 상당하다. 집중과 선택에 있어서 적재적소의 행동매칭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최소한의 관심이면 충분한 순간엔 도리어 지나치게 집착한 덕분에 정작 신경써야 할 부분은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능력좋다 한들 24시간 한계를 무한정으로 바꿔놓을 수 없다. 모든 일을 다 잘하려는 욕심이 지나치면, 어느 순간엔 만사가 귀찮아지는 그로기 상태에 봉착한다. 어른들의 기준에선 한낱 아이들의 본능적인 분별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훌쩍 부모보다도 감성이 발달되어있음에도, 어른들의 단조로운 사고방식에 맡겨 아이의 행동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유형에 가까울수록 육아 자체가 주는 스트레스 보다 본인 자신의 상실감에서 비롯된 무기력증을 염려해야 할 것이다. 흐늘적거리는 좀비처럼 육아로 인해 넋나간 체로 지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따로 관상을 연구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사람의 인상을 보면 말하지 않아도 고단함을 짐작하고도 남을 때가 많다. 불필요하게 아이들 스스로 깨우칠 영역까지 침범하지 않고 , 배려하는것이 현명한 육아의 시작이 아닐까? 되돌아보면 부모가 될 즈음의 어른들은 이미 실감한다.

 행복은 성적순에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도적으로 남들이 밟지 않은 길을 거침없이 나아갈수록 행복해지기 쉽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함에도 여전히 내가 학창시절에 못 이뤄낸 욕구실현을 대리만족하려는 경향이 강할수록, 육아를 핑계로 내 아이를 가둬놓게 된다. '함께'가 중요하다는것을 잠시라도 육아를 경험해보면 실감한다. 잠시 잠깐 숨쉴 틈이라도 만들 수 있다면, 한결 육아는 수월해진다. 그때 그때 쉴 틈이 있어야 그만큼 육아에도 집중할 수 있다. 온종일 매달려 시간을 채우는 싸움은 아닐 것이니, 적재적소 쉬게 할 수 있는 지혜가 절실하다. 정말로 고단함 끝에 찾아온 끄트머리 쉼표로 잠시라도 쉬어갈 수 있도록 틈이 필요하다. 가장 인간적인 매력은 빈 틈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빼곡하게 미세한 틈조차도 채워져있다면, 우리는 숨막히게 그 속에서 삭막함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기왕이면 즐겁고 보람찬 육아를 하자. 아이에 대한 세심한 관찰의 결과를 바탕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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