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다른 삶의 방식을 배워가며, 삶을 알아가는 존재가 사람이 아닐까? 싶다. 다양한 경험의 잣대를 토대로 행동에 있어서 책임질 수 있는것이 어른이 아닐까? 이 책임성을 우리는 '역할부여'에 수반하여 일깨워가고, 터득해간다. 대체로 '결혼'의 방식을 통해 우리는 어른의 역할 상당수를 학습해간다. 즉 절대적인 피임이 아닌 한 한 가정을 이뤄가고 정착해가는 과정에서 육아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육아는 단순한 출산 교육에 그치지 않고, 세상의 풍파속에 부모로서 든든한 울타리로 지켜주겠다는 본능적인 신의성실의 약속을 의미한다. "네가 세상에 온전한 독립적인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줄께. " 이미 이전 세대의 양육을 통해 성인으로 자라나고, 그 부모가 했던 역할을 수행해 가는 것이다.
그런데 1인가구가 점차 확산되고, '비혼'의 단어가 웃프게도 통용될 만큼 부모가 되는 시작 자체가 쉽지 않다. 시대가 발달할수록 평균적인 생활수준이 높아지는데, 기본 정주여건은 오히려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결혼을 준비할 수 있다는 자체가 때론 부러움을 살 때가 있다. 중요한건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겠다는 서로의 약속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자세에 있을 것이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의 모습은 대체로 경애롭다. 한순간에 복잡미묘한 감정이 새하얗게 씻겨나가는 감성을 쉽게 고양할 수 있다. 그런데 육아의 과정은 살벌할때가 많다. 장난끼 가득찬 아이가 혹여나 다칠까 싶어 쫓아다니다보면, 부모의 육체적 고단함이 엄청나다. 쫓아다니지 않아도 될 단계에 이르러서는 정신적인 수행으로 이어진다.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서도 부모에게 내 자식에 대한 걱정은 습관적으로 이어진다.
결혼은 아직 하지도, 서두르지도 않고 태연한데 벌써 조카 육아는 오랜 세월을 거듭한다. 나이 차 많은 사촌 족보 막내 삼촌의 비애랄까? 하염없이 꾸벅꾸벅 졸아대는 모습, 어느정도 자라서는 이제는 천정 높이 사람 그네를 태워주며 놀아줄 수 없을때를 발견하면 허무함이 몰아온다. 에너자이저를 방굴케 하는 에너지 앞에 아주 가끔 '좀비'와 묘하게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봤다. 즉 좀비는 오로지 물어뜯으며 세균에 전염된 종족을 늘려가며 집단으로 몰려간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세균번식 하듯 숫자가 늘어나니 막강한 근력의 사람도 속수무책으로 좀비화되어간다. 그런데 좀비가 있는 곳이 아는 것과 모르는것은 극명한 차이가 있다. 딸 넷을 키우는 아빠가 쓴 「좀비육아」 는 다소 특이한 책이다. 좀비로 가득한 사회의 종말에 맞서 필연적인 육아를 대비하고 있다. 즉 지극히 당연한 부모의 역할에 대해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책이다.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대상의 하나는 아포칼립스 (apocalypse)의 존재이다. 종말, 대재앙 같은 표면적인 의미 이외에 아포칼립스는 탄생순간부터 해괴한 형체를 띈 불완전 존재에서 점차 가장 강력한 존재로 생존하는 흐름을 상징한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존재 스스로 거칠고 메마른 환경에 적응하는 방법을 터득하며 생존력 강한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을 일깨우고 있다.
「좀비육아」는 아이들이 거쳐야 할 불완전한 환경자체를 좀비에 비유하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 맞서 강하게 키워낼 수 있는 법을 말해주고 있다. 기존의 전문적인 해설이 가미된 육아관련서적과 확연히 엉뚱한 맥락을 취하고 있어서 글 자체를 이해하는건 상당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곁들여 단순화된 캐릭터가 접목된 아이 관점의 삽화가 더해지니, 부모의식을 명확하게 할 수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생각 이상으로 훨씬 학습습득력이 뛰어나다. 사람의 감정에 대한 이해도 밝고, 감정표현도 솔직하다. 당장에 억울해지면 울음을 터트릴 정도이다. 어른은 푸근한 품에 아이를 안은 체 토닥이며 어떤 감정상태가 잘 표현되지 않아서 슬픈걸까? 관심을 가지면 족하다. 이내 울음을 그치고 꺄르르 웃는 아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정확히는 어른보다 감정능력에 있어서는 탁월하다. 경험의 절대적인 부족에서 오는 감정 통제 자체에 익숙하지 못할 뿐이다. 아이는 실컷 울고 나서야 해맑게 웃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