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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사회학
전상인 지음 / 민음사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분명 이 골목에 편의점이 있는데, 몇 걸음 못간 그 다음 골목에 똑같은 편의점이 들어서는 것을 목격하고 등골이 오싹해진 적이 있습니다.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 뭔가가 지극히 사소하고 또 친숙한 것이어서 의문이 고개를 들 틈도 없이 무서운 느낌은 곧 사라졌지요.
그러던 중에 『편의점 사회학』이란 책을 보게 되었고, “편의점이 동네를, 도시를, 그리고 세상을 덮고 있다”라는 이 책의 첫 문장은 그 때의 오싹함을 되살리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존재에 대해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켜 주었습니다.
우선, 편의점에 셔터가 없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기 전엔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24시간 내내 문을 닫지 않는 장소와 공간이 날마다 늘어나고 있다고 할 때, 제가 느낀 감정은 공포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그건 그곳에서 일어나는 고용형태와 고용의 강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고, 밤을 점령하는 장소가 그만큼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굳이 그곳에서 일하지 않는 나머지 사람들까지도 잠재적으로는 24시간 노동자가 되어 간다는 의미이기도 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자본주의는 야간 시간에 집중하였고, 그 시간을 새로운 개척지로 삼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시간에 자본이 침투하게 되는 단적인 예가 24시간 내내 셔터를 내릴 필요도 없이 돌아가는 편의점인 셈이지요.
이 책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알지 못한 사실들을 쉽고 재미있게 알려줍니다. 우리나라의 편의점 분포가 어떤지(마라도, 울릉도, 백령도, 심지어 북한에까지 편의점이 있다는 사실), 편의점의 등장과 냉각기술의 발전, 편의점 진열방식의 원리, 가장 잘 팔리는 물품 등 흥미로운 내용들이 가득합니다.
사실 편의점은 일찍이 김애란의 소설「나는 편의점에 간다」에서 다뤄진 바 있지만, 사회학적인 접근으로 이 지극히 사소하지만 위협적인 존재에 대해 언급한 것은 처음이라 더욱 반가운 마음입니다. 저자는 자신이 목표로 삼은 사회학의 토착화, 미시화, 대중화를 위해 우리나라에서, 너무 사소해서 자칫 간과하기 쉬운 편의점을, 어려운 용어 하나 없이 풀어내고 있습니다. 사회학 서적이 딱딱하고 지루할 것 같다는 편견을 깨고 말입니다.
저자가 제시해 놓은 자료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던 문제점들을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가령 우리는 편의점이 가진 특성 중 하나인 무관심의 배려 때문에 친숙한 동네 가게에 가기보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물건을 살 수 있는 편의점에 갑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무관심 이면에 엄청난 정보수집 역량으로 우리의 사생활을 관찰하고 기억하고 있다면 문제는 달라지겠지요. 볼록거울과 CCTV가 없는 편의점은 없으며, 객층키(어린이, 청소년, 성인 남자, 성인 여자 등을 나뉘는 키로, 손님의 연령이나 성별에 따라 어떤 물건을 언제 구입하는지를 전산으로 통계를 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를 누르지 않고 계산할 수 없는 편의점의 시스템에 대해서, 아마 이 책을 읽기 전까진 알 수 없었을 겁니다. 개인정보에 대한 문제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편의점이 수집해가는 나의 취향, 나의 흔적에 대해서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편의점이야말로 세상의 빅브라더, 파놉티콘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문제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이른바 ‘촛불시위’ 때마다 주변 편의점들이 엄청난 특수를 누린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양초와 우산, 라면과 김밥 등을 편리하게 구입할 수 있는 곳이 편의점이기 때문인데, 정작 편의점의 배후가 거대 자본과 자본주의 세계 체제, 혹은 신자유주의라는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한 채로 벌어지는 이 우습고 무서운 현실에 대해서도 저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서 분노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과 세상을 치밀하게 지배해가는 자들의 기막힌 공생 혹은 태연한 공존의 현장”, 바로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편의점의 문제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편의점을 통해 한번쯤 고민해봐야 할 문제들이 많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프랜차이즈 형태의 편의점 체제가 보여주는 갑을관계의 전형 속에 나타나는 또 다른 갑을관계에 대해, 자본주의의 핵심인 유통에 대해, 소비하는 인간으로 길들여지는 측면에 대해, 88만원 세대들의 식당이 되어가는 편의점에 대해, 점차 개인화되어가는 사회에 대해, 이 지극히 사소한 존재가 내포하고 있는 거대하고 위협적인 문제를 알아차리게 도와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매우 유용합니다. 특히 거의 매일,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편의점에 드나들 수밖에 없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말입니다.
그럼 이 책에는 이런 문제만 나열되어 있느냐라는 반문이 가능할 텐데, 제가 읽어본 바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편의점이 들어서 있지 않은 곳이 없다는 점을 일상생활의 침투가 아닌,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자면 우리 생활에 유익하게 작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24시간 내내 훤히 불을 밝히고 있는 유일한 곳, 이 때문에 우리는 낯선 지역에 갔을 때 편의점을 찾는 것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이런 점을 활용해보자면 편의점이 아동 안전이나 치안 영역에서 활약할 수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편의점 협회는 2009년 경찰청과 ‘아동 안전 지킴이 집’에 관한 양해 각서를 체결했다고 합니다.
저자에 의하면, 편의점이 교통의 편리한 요충지에 위치한데다가 일 년 365일, 하루 24시간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은 공적 기능을 수행하기에 적절한 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연재해가 발생할 경우 편의점을 통해 구호품을 전달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장점 때문일 겁니다. 뿐만 아니라, 2012년에는 이런 특성을 이용해 여성 공동 주택 1층에 편의점을 입점 시켜 주민들의 생활 안전도를 높이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편의점이 가진 장점을 잘 활용한다면, 진정 우리의 편의를 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입니다.
편의점에 점점 더 예속될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삶의 질 향상 및 도시 공동체 재건을 위해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편의점을 이용하는 우리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 시작으로, 이 지극히 사소한 존재의 어마어마한 위협을 인식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편의점에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현대인을 위한 ‘편의점 사용설명서’라고 할까요. 사회학 서적은 지루할 것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편의점을 갈 때와 같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보길 권합니다. 사실 내용 자체는 결코 가볍지 않으나, 이 중요한 문제들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저자의 친절한 설명과 섬세함에 때문에 조금의 지루함도 느낄 수 없었던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