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모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6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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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연극 <관객모독>이 6월 1일까지 대학로에서 공연된다는 것을 알립니다. : )

공연 예매를 하고 나서 얼마나 모욕적일지 궁금해하며 읽은 작품입니다.

내용은 없기 때문에 이야기 할 수가 없네요.

 

과거의 사실이나 상상하는 내용을 극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철저히 지금 일어나고 있는 시간에서 언어, 그러니까 단어와 문장들로만 이루어진 대본입니다.

지시문도 없고요.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었지요. 제일 앞에 등장인물에는 달랑 "배우 네명"이라고 써 있고요, 그 뒤에 "배우를 위한 규칙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따라해보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연극이 어떻게 만들어질지는 모르지만, 이 "배우를 위한 규칙들"은 책을 통해서만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예컨대, 이런 것들, "안장이 땅을 향해 거꾸로 세워진 자전거에서 돌아가는 바퀴살이 조용해질 때까지 그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멈추어 설 때까지 바퀴살을 자세히 관찰할 것." 혹은 "동물원에서 인간을 흉내 내는 원숭이들과 침을 흘리는 라마들을 자세히 관찰할 것" 이런 건 정말 해보고 싶어집니다.

 

 본격적으로 연극이 시작되면, 온통 말 뿐입니다. 했던 말들을 조금씩 단어를 바꾸어서 하기도 하고요, 나중에는 "너희들"이라고 하면서 욕까지 합니다. 그렇게 계속 욕을 들어먹다 보면 어떤 생각에 이르게 되는데요. 그 생각은 사실 지금까지 내가 본 연극이 더 모욕적이었단 생각입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피터 한트케가 이 작품의 서술 방법에 대해 언급한 부분에서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연극이 구체적인 상(想)을 그리지도 않고,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거나 현실이 아닌 것을 현실로 착각하게끔 하지도 않으며, 오직 현실에서 쓰이는 단어와 문장으로만 구성된다는 점, 그것이 이 작법의 핵심이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방법들에 대한 거부가 내 첫 희곡의 작법이었다."

 

좋은 작품들은 대게 모욕적입니다. 그건 이전 작품들을 능멸하고 모독하면서 제자리를 찾는다는 점에서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아주 모욕적이고 제대로된 모욕입니다. 가끔 우리는 제대로된 모욕을 당하고 나면 그 이전의 시간들이 훨씬 모욕적이었단 걸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욕이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분량이 많지 않고, 지루하지 않기 때문에 모욕당하길 원하시는 분들께, 그러니까 모욕이 절실하신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이후의 시간들과 이전의 시간들에 대해 조금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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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멘타 하인학교 (무선)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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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에서 배운 지식들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지금껏 살아온 삶에서 ‘학교’란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그곳에서 계속해서 뭔가를 배웠는데도 왜 그때 나는 그렇게 혼란스럽고 먹먹한 느낌을 받아야했던 것일까. 체제에 순응하기에는 철저한 훈련을 받지 못했고 주체를 찾아 나서기에는 한없이 약한, 어중간한 존재로 제자리를 빙빙 맴돌던 그 무렵에 나는 이 책을 만났다. ‘하인학교’라니. 만약 그런 학교가 존재한다면 이제라도 그곳에 입학해야하지 않을까 하면서 신나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야콥 폰 군텐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소설은 귀족집안 출신인 야콥이 하인학교에 입학해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하인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없다. 그들은 지독한 무위를 견디는 형벌을 받았다고 할 만큼 그곳에서 정해진 규정들을 지키며 생활한다. 지루함을 견디는 훈련을 통해 그들은 단지 하나의 영(零)이 되어간다. 누군가의 충직한 하인이 된다는 것은 개성을 죽이고 완벽한 무(無)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하지만 뒤늦게 ‘하인학교’에 입학한 주인공 야콥은 기존의 학생과는 어딘지 다른 데가 있다. 그는 누군가를 화나게 하길 즐기고 다투기를 좋아하며 반항 속에서 아름다움의 전율을 느낀다. 허무맹랑한 몽상을 하고 타인에게 모욕당하길 바라는, 기이한 매력을 풍기는 이 소년에게 압도되어 이야기를 읽어나가다 보면 웃음을 터트리게 되는 순간들이 자주 찾아온다. 개인적으로는 야콥이 하인학교의 모범생인 크라우스와 아드등아드등하는 장면을 이 소설의 가장 큰 재미로 꼽겠다.

그렇게 야콥이 하는 헛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나 역시 그와 함께 축제에 가담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는 정해진 모든 것을 유쾌한 방식으로 부정한다. 반대하려는 의도도, 근거도 없이 마치 규범이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그에게 방황은 일종의 축제와 같다. 나아가야할 방향이 정해져 있어야만 좌절감을 느끼고 우울해진다. 그러나 지향점이 없다면 우리는 나아가지 못함에 대해서 속상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야콥은 자신의 삶을 축제처럼 즐기면서 자신을 보고 있는 우리 역시 그 축제에 초대한다.

결국 다른 모든 친구들은 취업을 해서 떠나고 야콥과 원장선생님만이 하인학교에 남는다. 야콥은 가능한 거만하고 뻔뻔스럽게 쓴 이력서를 들이밀며 원장선생님의 인맥을 동원해서 취직을 시켜달라고 하지만 원장선생님은 이미 야콥의 매력에 빠져버린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야콥을 통해 자신이 세상을 증오하기 이전의 모습을 본 것일까. 마음만 먹으면 그를 벌주고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원장선생님은 야콥에게 이렇게 사정한다.

“나와 함께 가겠니? 함께 살며, 함께 뭔가를 해보고, 계획하고, 시도하고, 창조해나갈래?

작은 존재인 너와 큰 사람인 내가,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삶을 헤쳐 나갈 방법을 찾아볼래?”

소설은 야콥과 벤야멘타씨가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짐을 싸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그들은 사막을 여행할 것이다. 우리는 그 두 사람이 야콥이 꿈을 통해 경험했던 것처럼, 인디언 추장이 되거나 원주민들과 교역을 하는 등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일을 성공시키면서 삶을 살아갈 것이라 짐작해볼 수 있다. 그들은 더 이상 “내가 만약……한다면 어떨까?” 같은 말로 스스로를 결박하거나 구속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격동적으로 움직이면서, 부서지고 파멸하면서도 찬란하게 존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정해진 방향 없이 사막 위를 걷는다는 건 이제 그들에게 축제가 될 테니까. 그리고 뭔가 파멸하고 산산조각 난다해도 그건 어느 영(零)에 지나지 않는 개인일 뿐이니까. 타인이 아닌 자신을 위해 기꺼이, 매끄럽고 반질반질한 영이 되어 버린 그들이 새삼 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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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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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예전의 나로 남아 있고, 또 그런 나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넌더리가 났다." (p.64)

 

 아주 가끔, ‘나’라는 인간의 가장자리가 확실하게 만져지는 순간이 있다. 여기저기 흩어지고 뒤섞이는 것 같아서 억울해하던 차에 불현듯 하나의 모습으로 내가 나를 느낄 수 있는 그때, 우리는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은 것 마냥 신이 난다. 그래서 남들 앞에서 그 순간을 재현해보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부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치는 자신에게 실망하게 될 뿐이다. 게다가 내가 찾은 건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말아서 마치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은 괴로움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

  페터 한트케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이런 우습고 불행한 상황에 맞닥뜨릴 때마다 다시 읽고 싶어지는 소설이다. 제목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듯, 이 소설은 짧은 편지를 남기고 사라진 아내를 찾으러 떠나는 내용이다. 하지만 단지 이것만 기대하고 책을 읽어나간다면 얼마 못가서 지루한 소설이라고 내던질지도 모른다. 주인공의 아내 유디트는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그 모습을 짧고 강하게 드러내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을 읽기 전에 ‘이별’이라는 단어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우리는 주로 ‘타인’과 헤어지는 행동을 지칭할 때만 이 단어를 사용해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별’이라는 행위에 반드시 타인을 포함시키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데에는 우리 개개인이 ‘완전한 형태’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완전한 것의 내부에서 갈리어 떨어져나간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기에 우리는 이 단어를 으레 타인과의 분리로만 받아들여 온 것이다.

  내가 이 작품이 재미있다고 말하고 싶은 지점은 바로 여기다. 아마 페터 한트케는 '이별’에 대해 남들과 다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결과, 그는 ‘어떻게’보다는 ‘누구’와 이별할 것인가에 더 무게를 두고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그러니 작품을 읽을 때 주인공의 시선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살펴보면서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도 우리 자신과 이별하게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소설 초반에는 아내를 찾으러 미국으로 건너간 주인공이 주변 사람들의 움직임이나 생김새, 신문에서 읽게 되는 단편적인 사건을 묘사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말하기 전에는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타인에 대한 불만이나 아내에 대한 원망을 간혹 내비치면서 고립된 상태로 지낸다. 그러던 중 친구인 클레어와 그녀의 딸이 하는 여행을 함께 하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주인공은 기억하려 하면 구역질이 날 것 같은 자신의 과거와 이별하기 시작한다. 소심하고 비겁했던 자신과 자신의 콤플렉스, 생활양식 등에 대해 돌아보면서 그의 상태는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타인을 대할 때,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되는 메스꺼움 대신에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 시기에 나타나는 뚜렷한 변화다.

  다시 혼자가 된 주인공은 아내로부터 해코지와 살해 위협을 당하지만, 결국에는 아내와 함께 영화감독인 존 포드를 만나러 간다. 이곳에서는 ‘나’와 ‘우리’에 대한 존 포드의 인식이 대화의 핵심이 된다. 그런 후에 "이제 당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는 말로 이야기의 바통이 유디트에게 넘어가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때문에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주인공의 변화를 뚜렷하게 감지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 우리는 그가 그 자신과 이별하였음을 확신할 수 있다. 책을 읽는 독자 역시 이 책의 주인공의 여정을 함께하다 보면 회피하고 싶었던 과거 속의 나 자신,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어떤 부분과 서서히 이별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반드시 ‘우리’ 안에서 계속되어야 한다. "소외감이라고 하는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포즈에 묻혀서"는 결코 자기 자신과 이별할 필요성을 느낄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타인과 이별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 자신과 날마다 조금씩 이별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내게 적합하면서도 남들 또한 나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찾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공통과제가 아닐까. 그랬을 때 비로소 거짓말을 하지 않고, 연출되지 않은 모습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라는 인간의 가장자리를 지키고 쓰다듬어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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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짐승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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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츠가 나를 떠나고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으면서 그를 기다리게 된 이후에야 비로소 나는 내 사랑과 융화하여 살고 있다. 나는 더 이상 내 사랑과 나를 구분하지 않으며, 그 이후로 내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내가 원했던 것이다." (p. 26)

 

  뭔가를 놓친 것이 분명했다. 시간은 흐르지 않거나 반대 방향으로만 곤두박질쳤다. 나는 과거 속으로 기어들어가 무작정 기다렸다. 그것은 끝이 없거나 끝없이 되풀이되는 기다림이었다. 그때 나는 그것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 차서 기다렸던 것이 틀림없다. 내가 놓쳤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므로.

 흐르면서도 흐르지 않는 이상야릇한 시간 속에서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놓친 것이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뿐이다.”라고 표지에서부터 외치고 있는 한 권의 책. 나는 여전히 사랑이 무엇인지, 심지어 그것의 존재여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지만 ‘사랑’이라고 ‘믿는’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에 이끌리지 않을 자신은 없다.

 모니카 마론의『슬픈 짐승』에는 갇혀버린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의 나이는 백 살쯤 되었다고 짐작할 뿐 확실치는 않다. 그녀의 시간은 비틀려있다. 은행에서 돈을 찾거나 생필품을 사기 위한 잠깐의 외출 외에 그녀가 하는 일은 모두 그녀 내부에서만 일어난다. 그녀는 과거에 갇힌 셈이지만 동시에 그녀 자신에게 갇혔다. 그녀가 하는 일은 프란츠를 생각하는 것이 전부다. 프란츠라는 이름 역시 확실치 않다. 그녀가 그를 생각할 때, 그녀가 알고 지내던 다른 사람의 이미지가 그녀의 상상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을 그에게 붙였을 뿐이다. 브라키오사우르스의 뼈대를 보고 그 동물과 1억 5천만 년 전의 시간을 상상하는 것처럼 그녀는 하루 종일 이야기를 꾸며내거나 지어내면서 과거를 여행하고 그를 다시 복원해낸다. 그 과정은 경험해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지거나 기이하게 비쳐질 수 있지만, 잠시라도 그 과정을 경험해 본 사람에게는 더없이 사실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 책의 문장은 경계에 서 있는 듯 불안하고 위태롭다. 사실과 망상의 경계에서, 실제 일어난 일과 상상만 했던 일의 사이에서 문장이 태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나이, 연인의 이름, 그녀의 남편과 딸이 떠나간 상황, 그녀가 프란츠의 아내에게 했던 행동 등 거의 모든 것이 불확실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모든 불확실한 문장들 속에서 사실로 떠올라 명징해진 하나의 문장은 이것이다.

 나는 사랑이 유일한 것이라고 믿지만, 유일한 것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프란츠에게 두 번째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녀가 프란츠의 아내와 밤을 나눠 쓰지 않아도 되는 날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는 열두 시 반이 되면 정확히 일어나서 울부짖고 미친 듯 날뛰는 그녀를 뒤로한 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프란츠와 그의 아내가 함께 여행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여행에서 있을 일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그의 전화를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그들이 함께 지내기로 하고 프란츠의 책상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고민하며 가구를 이리저리 옮겨본 그 다음날, 프란츠는 떠났다. “내일 올게”라고 말하며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을 때, 그녀는 이미 그가 용서를 구하고 있음을, 돌아오지 않을 것을, 가구를 원래 상태로 되돌려놓아야 함을 알게 된다. 어쩌면 전날 밤, 프란츠가 반항적이면서 경견한 태도로 “아니면 내가 삶을 위해 잊었어야 하리.”라는 노래를 부를 때 알아차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금발의 아내를 버리고, 사랑스런 새들이 노래하는 공원 옆의 집을 버리고 그녀에게 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이 소설은 ‘나와 프란츠’의 사랑이 주축이 되어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다양한 사랑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 명예욕과 불멸을 위해 지빌레와의 사랑을 포기하는 에밀레, 생활을 위한 부부로서의 카린과 클라우스, 알리와 헤어진 후에 사랑은 진부하거나 비극적이거나 둘 중 하나뿐이라며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아테, 구원자를 섬기는 마음으로 처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시작된 라이너와 앙케, 전쟁에서 살아 돌아와 루치에 빙클러와의 사랑을 이루고자 한 프란츠의 아버지까지. 그들이 각각 그려내는 조금씩 비틀리고 어긋난 ‘사랑’의 행위를 통해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기회를 마련해준다는 것이 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소설은 그들이 헤어지던 날, 프란츠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이 죽음 역시 모호하게 처리되고 있지만 우리는 그녀 역시 곧 죽음을 맞을 것이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녀를 깨어있도록 붙잡아둘 이미지도, 프란츠라는 실재하는 인물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녀의 기다림은 끝났다. 이제 그녀는 식육식물들 사이에서 잔잔하게 죽어갈 것이다.

 소용돌이치는 욕망과 격렬하게 싸우다가 누워 있는 한 마리의 슬픈 짐승, 그녀는 더 이상 울부짖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녀는 사랑에 무능력하지 않았고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발버둥 쳤으니까. 확실히, 불가능을 향해 전력질주 하는 사람은 가능을 향해 전력질주 하는 사람보다 매력적이다.

 지금도 여전히 내가 과거로만 치닫는 시간과 선명하고 화려한 고통을 즐기고 있다면 그건 순전히 이 책 덕분이다. 나는 여전히 당신을 기다리겠다. 당신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 가득차서,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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