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운 일을 이루려함에
때론 고집스러움이 도움이 조금 되련만,

자신의 사사로움에 때아닌 생고집은
결국 패배요, 패망이요
오직 모든이의 죽음을 좌초할 뿐인 것을

연산은 그런 외고집으로 슬슬 미쳐가고 있다
그 주위는 죽음은 그림자만이 짙게 드리워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연산군은 무오사화로 일단 심사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렇게 강화된 왕권을 국정의 개혁 같은 건설적이고 바람직한 목표에 사용하지 않고 사치 사냥 · 연회 · 음행 같은 말초적인욕망을 만족시키는 데 투입했다.  - P201

이처럼 무오사화 이후 본격화된 연산군의 자의적 왕권 행사는 일반적인 정치 사안들보다 객관적으로 그 문제점이 훨씬 확연했고, 그것을비판할 논리적 근거도 그만큼 타당했다. 그 결과 삼사는 물론 그동안 국왕과 비슷한 입장에서 삼사에 대응해오던 대신들도 점차 강력하고 빈번하게 간언을 제기하기 시작하면서 연산군대 중반 이후 정치 세력의 협력 · 대립관계는 대신과 삼사가 제휴함으로써 국왕이 고립되어가는 중요한 재편을 겪게 되었다.  - P201

고립된 국왕이 대신과 삼사를 포함한 거의 모든 신하들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이고 비이성적인 탄압을 자행한 갑자사화의 양상은 이런 상황적 맥락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 P201

앞서 본 대로 성종의 졸곡 전에 기생과 동침했다는 죄목으로 탄핵받은 윤탕로는 무오사화 직전 다시 직첩을 받고 서반직에 기용하라는 왕명을 받았지만(4.6.29갑오), 삼사는 이전의 죄목을 문제 삼아 계속 반대했다. 간헐적이었지만, 윤탕로에 대한 국왕의 애착과 삼사의 반대는 무려7 년 동안 길항했다(4.9.4 기해. 15경술; 4.10.11계유; 6.9.12계해~14 을축 · 18기사-21 임신 · 27무인; 8.10.10기유; 9.1.8병자~10무인). 갑자사화 직전에도 연산군은 그를한직인 돈녕부에 사용하려고 했지만 삼사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다가(10.1.17기 · 18경진 · 24병술; 10.2.5 정유 · 9신축) 결국 극도의 폭정으로 신하들을 완전히 제압한 뒤인 재위 11 년 초에야 그를 공조참의에 임명함으로써 숙원을 풀 수 있었다(11.1.4 경인). - P203

우의정 성준도 삼사의 탄핵에 시달린 대신이었다. 특히 연산군 5년36후반에 일어난 그와 삼사의 충돌은 무오사화 이후 삼사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산군 5년 10월 성준의손녀가 시댁에 인사 가던 중 사헌부 이속은 그 행렬을 막고 소지품을검사했는데, 당시 금지하고 있던 육류가 발견되자 수행하던 종을 가됐다. 범법 행위를 적발하기는 했지만, 일개 사헌부 이속이 현직 우의정의 손녀를 검문하고 그 종을 하옥시킨 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 P205

끝으로, 홍백경도 삼사의 비판으로 순조롭게 승진하지 못했다. 연산군 8년 1월 삼사는 도덕적인 문제가 있거나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국왕이 내지로 특별 승진시키거나 근거 없이 가자를 남발한다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으며, 가장 문제되는 인물로 지목한 홍백경을 참판에서파직시킨 것이다
그 밖에도 연산군 5년 7월 자신들이 인사 문제에 참여하는 것을 이조가 막고 있다고 비판해 국문을 관철시킨 것도 대간의 영향력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사례다(5.7.15 계유 • 16갑술 · 21기묘).
- P206

연산군 중반에는 홍문관의 위상도 크게 상승했다. 국왕은 대간이 홍문관의 의견을 두려워하며 그들의 영향력은 재상까지 위협하고 있다고파악했다(5.12.14무술). 우의정 이극균도 비슷한 의견을 피력했으며.
(7.11.16경인 · 23정유) 성준 · 한치형 등도 홍문관은 이전의 집현전처럼 자.
문기관에 지나지 않는데도 너무 큰 권력을 행사한다고 지적했다(7.10.25 신미: 7.11.11을유 · 12병술 · 16경인 · 19계사).
- P207

이런 홍문관의 영향력은 실제로도 입증되었다. 연산군 7년 8월 대신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며 대간도 규찰에 힘쓰지 않고 관망만 한다고 홍문관이 탄핵하자 영의정 한치형을 비롯한 주요 대신과 대간이 모두 사직한 것이다(7.8.7일자).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친 결과 삼정승 한치형 · 성준 · 이극균은 일찍이 홍문관을 국가의 동량이며 대간과다름이 없다고 평가한 성종의 판단에 동의하면서 그 위상을 인정하게되었다(7.11.17신묘) - P207

치세 중반 삼사의 발언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당시 국왕이 가장집중하던 사안인 사치와 패행이었다. 국왕의 주요 업무가 곧 국무라면,
국왕과 삼사는 거의 모든 국무에서 충돌한 것이었다. 일일이 거론할 수없을 정도로 수많은 상소에 담긴 삼사의 주장은 요컨대 국왕에게 본연의 임무인 정무政務에 좀더 충실하라고 촉구한 것이었다. 연산군 8년 4월홍문관의 상소는 국왕의 불성실과 재정의 악화를 중심으로 한 국정의난맥상을 집약한 대표적인 사례로 생각된다. - P208

그러면서 그는 성종 말년부터 생긴 이런 폐단을 지금 고치지 않으면후세에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9.3.14신사), 앞서도지적했지만, 당시의 가장 큰 적폐라고 판단한 문제의 기원이 성종대에있다는 판단은 부왕에 대한 그의 반감이 모후의 사사라는 감정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판단에서도 발원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 P210

연산군은 홍문관도 압박했다. 그는 인물을 논란하는 것은 홍문관의직무가 아니라면서 그 언론권을 부정했으며(8.10.4계묘) 대간과 연합하는자연스런 관행도 문제 삼았다. "대간과 홍문관은 각각 직무가 있는데,
지금은 대간이 아뢴 일을 홍문관이 그대로 따라서 말하고 있다. 그들은동료와 관련된 일은 거론하지 않지만 대신의 일은 반드시 모두 논쾌한다(7.10.26신미), "홍문관이 궁궐 수리와 잔치를 중지하자고 주청했을 때도 연산군은 서책을 관장하는 부서가 감히 이런 일을 말한다면서 일축했다 - P210

연산군은 선왕 때부터 시행된 일이라는 명분에 따라 서연관이나 삼사를역임한 사람은 윤대에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8.11.4 신유 · 12신사). 물론삼사를 제압하는 가장 빈번하고 일반적인 방법은 그들을 체직시키는 것이었다.  - P210

연산군대에 삼사 장관(대사헌 · 대사간 · 부제학)의 재직 기간이 평균 4.2개월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삼사를 순치시키려는 국왕의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이런 수치는 그 하위 관직으로 내려가면 더욱줄어들 것이다).  - P210

연산군은 그런 허점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그는 7개월 전에 내린 명령의 폐단을 지금에야 아뢴다면서 당시 대간으로 현재까지 재직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하라고 명령했고, "대간은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직책인데 자신들이 먼저 착오를 저지르면 어떻게 남을 바로잡겠는가"라고 질책하면서 죄상을 국문한 뒤 체직시키라고 하교했다 (8.12.4임인), 이것은 충분한 정당성을 지닌 조처였다. 대간이 드러낸 객관적인 문제점을 놓치지 않고 기민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한 이런 사례는 연산군이결코 둔감하지 않은 정치력을 지닌 국왕이었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것이다.  - P211

이때 국왕이 총애하는 측근들에게 물품을 지나치게 하사하고 과도하게 잔치를 베풀었다. 인수대비는 그만두게 하지 못할 것을 알고 한치형에게 비밀리에 당부했다. "주상의 행동이 이런데도 고치지 않으니 경은 사직의 증신으로 죽을힘을 다해 바로잡지 못하면 지하에서 조종의 영혼을 무슨 낮으로 보겠습니까?" 이때부터 한치형은 성준, 이극균과 함께 국왕의 행동을규제하고 간언하는 것이 많았다(8.6.28 무진).  - P214

그해 3월 삼정승 한치형 · 성준·이극균이 올린 시폐 10조는 그 제목대로 당시의 폐단을 집약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83.25 정유).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이 상소의 주청자와 내용을 가장 증오했는데,  - P2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그러나 연산군의 진정한 목적은 이런 정당하고 일반적인 취지와는전혀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벌이는 수많은 유희와 음행이 노출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접근과 시선을 차단하려는 노력이 집중된 장소는 당연히 궁궐(특히 창덕궁)과 그 주변이었다(그뒤금표를 설치하면서 그런 지역은 경기도 일대로 확장되었다).  - P195

국왕은 음탕한 놀이를 무도하게 하고 불시에 나인을 후원에 모아 광란의가무를 매일 즐겼는데, 외부 사람들이 그것을 알까 두려워 궁궐 주변에 접근하는 것을 점차 엄격하게 금지했으며 결국은 산 아래 인가를 철거하기에이르렀다(8.10.21 경신)  - P196

이런 차단 중에서 가장 대대적으로 시행된 조처는 궁궐 주위의 민가를 철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성격상 백성에게 더욱 유해한 폭거였다. 바로 앞서 인용한 사료가 지적했듯이, 민가의 철거는 접근의 차단이 다다른 최종적인 결과였다. - P197

살던 집에서 쫓겨난 백성들은 도성 부근의 빈집을 원하는 대로 임대4해 거처케 했지만(9.11.5무진 6기사) 그들의 고통과 피해는 자명했다. 시험들도 대부분 반대했다. 의정부는 "지금 백성들은 먹고살기도 어려우니철거할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 "쫓겨난 백성들은 돌아갈 곳이 없어 재목을 길옆에 쌓아두고 초막을 지어 살고 있으며 원망과 고통이 매우 크다"
고 진언했다(8.2.25 무진). 사헌부도 100여 채나 되는 민가를 철거한 것은역대에 없던 일이라면서 반대했다(9.11.16기묘).  - P198

이처럼 연산군은 궁궐과 인접한 주요 지역에 통행을 금지하고 민가를 철거함으로써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는 데 충분히 성공했지만 이런물리적인 조처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발언 자체를통제하려는 비상식적인 것이었다. 연산군의 가장 거대한 폭정인 갑자사화는 이런 불가능한 목표를 이루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촉발되었다. - P1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비록 세상은 그것을 모르고 성도를 핍박할지라도 성도는 세상으로 하나님의 복을 흘려보내는 축복의 통로와 도구인 것입니다. - P1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요한복음이 기록한 예수의 일곱 표적/이적
● 물을 포도주로 바꾸심 2:1-11
● 성전 정화 2:13-22
● 귀인의 아들을 고쳐 주심 4:46-54· 
●다리 저는 이를 고쳐 주심 5:1-15
● 많은 사람을 먹이심 6:1-15· 
●눈먼 사람을 고쳐 주심 9:1-41
●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심 11:1-44 - P100

이 혼인 축제는 이레 동안 이어졌다. 14:12; 토비트 11:18
미쉬나Ketuboth 는 유대 처녀들이 수요일에 혼인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는 가나의 이적이 수요일에 일어났음을 시사하는 것일수도 있다. - P101

요세푸스는 1세기 유대 역사를 연구하는 주요 원천이며, 신약 배경을 연구할 때도 지나치다 싶을 만큼 중요한 자료가 되어 왔다. 요세푸스의 글은 네 작품, 곧 유대 고대사』, 『유대전쟁사』, 생애』,
『아피온 반박』으로 이루어져 있다. - P102

요한복음에서 ‘표적‘ sign은 본질상어떤 메시지를 함축한 기적을 의미한다. 즉 기적은 문자 그대로기적이지만, 상징을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 P103

주석가들이 올바로 언급하듯이, 가나의 표적은 예수 안에서 메시아 시대가 열렸음을 상징했다.  - P103

① 혼인은 고대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에서 메시아 시대의 도래, 혹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상징했다. 54:4-8; 62:4-5; 마 8:11;22:1-14; 눅 22:16-18; 계 19:9  - P104

② 포도주가 풍부함은 메시아 시대가 동텄음을25:5일러 주는 또 다른 상징이었다. 31:12; 호 14:7; 암 9:13-14; 에녹1서 10:19; 바룩1서
- P104

 ③사람들은 메시아 시대가 도래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펼쳐 보이시리라고 기대했다. 시 102:16; 에녹1서 49:2; 솔로몬의 시편 17:32; 참조. 요2:11 - P104

유월절은 유대인 남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반드시 와야 하는 세절기 가운데 하나였다(초막절과 오순절이 나머지 두 절기였다).신 16:16 - P104

요한복음은 예수가 공생애 사역을 펼치시는 동안에 있었던 세 번의 유월절을 언급한다.2:13:6:4;11:55 이것이 바로 예수의 공생애 사역기간이 3년이었다고 계산하는 근거인데  - P104

예루살렘 성전은 구구절절한 역사를 갖고 있었다. 주전 966년에솔로몬이 세운 이성전은 587년에 바벨론침공으로 파괴되었다가, 스룹바벨이 주전 516 년에 재건하고 헤롯대왕이 중건했으며(공사는 주전 20-19년에 시작되었다), 주후 70년에 이르러 로마군에의해 재차 파괴되었다. - P105

이방인의 뜰에는 동물 파는 사람들과 환전상이 있었는데, 이는두 가지 목적 때문이었다. 유월절 순례자들은 고된 예루살렘 여행길에 희생제물로 바칠 동물을 직접 가져오길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대제사장 가야바는 이들에게 희생제물로 바칠 동물을 제공했다(소와 양, 가난한 이들에겐 비둘기).  - P106

그러나 이것들을 구입하려면 두로(티레)의 화폐를 내야 했다. 성전에서는 로마의 데나리온과 아티카(그리스)의 드라크마는 쓸 수 없었다. 이들 주화에는황제와 이교의 형상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 P106

따라서 예수의 성전 정화는, 예루살렘 성전이영적 황무지가 되었다는 이유로 그곳을 비판했던 구약의 예언자들이 한 행동처럼사 56:7; 렘7:11; 슥 14:21; 말 3:1 등 예언자적 행동이었다.  - P107

게다가 우리는 요한복음 2:19-21에서 예수의 몸이 새 성전이 되었음을 보는데, 이는 메시아가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리라는 유대교의 기대와도 들어맞았다. 참조 요2:19-21; 계 21:22과 겔 40-46장; 토비트 13:10; 14:5;11Q Ta,b; 막 14:47-61 - P107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예수의 성전 정화 자체가 하나님의 표적임에도 종교 지도자들이 이를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슬픈일이다. - P107

요 3장05하나님 나라를 보려면 사람은 ‘위에서/거듭 태어나야‘ 한다. anôthen이라는 단어는 ‘거듭‘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위에서‘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니고데모는 이어지는 대화에서이 단어를 ‘거듭‘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 같지만, 예수가 말씀하시는 의미는 ‘위에서‘였다. 이런 의미로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자신이 위에서 오셨기 때문이다. 참조 3:13-21, 31-36 - P117

‘거듭남‘이라는 개념의 직접적인 배경은 이스라엘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구약 사상이다. 4:22; 신 32.6; 호 11:1 구약성경은 이 개념7 을 다윗 혈통에서 태어난 왕에게도 사용한다. 산하 7:14; 시 247;89:27  - P117

5절에서 예수는 위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점을 재차 말씀하시는데, 이번에는 이를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고 표현하신다. ‘물과 성령으로‘라는 표현은, 회개와 예수를 향한 믿음을 토대로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새 언약의 영이 일으키신 마음의 거듭남을 체험해야 한다는 뜻이다. 참조 겔 36:25-27 - P118

13-21절은 예수가 자신의 사명에 관하여 말씀하신 증언을 기록해 놓았다. 그분의 사명은 성육신을 통해 땅으로 내려오신 뒤, 메시아인 자신을 내어 주사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이었다.  - P119

요한은 14-15절에서 민수기 21:8을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용서하고 생명을 되찾아 주는 방법이었던 사건, 곧 광야에서 모세가 놋뱀을 들어 올린 사건을 언급한다. 이사야 52:13도 이 독백의 배경에 자리하고 있다. 이사야 52장의 종이 이스라엘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들어 올려져영광을 받았듯이, 예수도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뒤에 높이 올림을 받으실 것이다.  - P119

사실, 네 번째 복음서에서 예수가 높이 올림을받으시는 순간은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순간과 일치한다 3:14;8:28:12:32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바로 예수의 영광이다! - P119

니고데모는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갔고, 산헤드린 앞에서 자기 믿음을 공개 고백했으며,7:50-52 예수가 죽은 뒤에는 그의 완전한 제자가 되었다. 19:39-42 - P1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