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연산군은 무오사화로 일단 심사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렇게 강화된 왕권을 국정의 개혁 같은 건설적이고 바람직한 목표에 사용하지 않고 사치 사냥 · 연회 · 음행 같은 말초적인욕망을 만족시키는 데 투입했다.  - P201

이처럼 무오사화 이후 본격화된 연산군의 자의적 왕권 행사는 일반적인 정치 사안들보다 객관적으로 그 문제점이 훨씬 확연했고, 그것을비판할 논리적 근거도 그만큼 타당했다. 그 결과 삼사는 물론 그동안 국왕과 비슷한 입장에서 삼사에 대응해오던 대신들도 점차 강력하고 빈번하게 간언을 제기하기 시작하면서 연산군대 중반 이후 정치 세력의 협력 · 대립관계는 대신과 삼사가 제휴함으로써 국왕이 고립되어가는 중요한 재편을 겪게 되었다.  - P201

고립된 국왕이 대신과 삼사를 포함한 거의 모든 신하들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이고 비이성적인 탄압을 자행한 갑자사화의 양상은 이런 상황적 맥락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 P201

앞서 본 대로 성종의 졸곡 전에 기생과 동침했다는 죄목으로 탄핵받은 윤탕로는 무오사화 직전 다시 직첩을 받고 서반직에 기용하라는 왕명을 받았지만(4.6.29갑오), 삼사는 이전의 죄목을 문제 삼아 계속 반대했다. 간헐적이었지만, 윤탕로에 대한 국왕의 애착과 삼사의 반대는 무려7 년 동안 길항했다(4.9.4 기해. 15경술; 4.10.11계유; 6.9.12계해~14 을축 · 18기사-21 임신 · 27무인; 8.10.10기유; 9.1.8병자~10무인). 갑자사화 직전에도 연산군은 그를한직인 돈녕부에 사용하려고 했지만 삼사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다가(10.1.17기 · 18경진 · 24병술; 10.2.5 정유 · 9신축) 결국 극도의 폭정으로 신하들을 완전히 제압한 뒤인 재위 11 년 초에야 그를 공조참의에 임명함으로써 숙원을 풀 수 있었다(11.1.4 경인). - P203

우의정 성준도 삼사의 탄핵에 시달린 대신이었다. 특히 연산군 5년36후반에 일어난 그와 삼사의 충돌은 무오사화 이후 삼사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산군 5년 10월 성준의손녀가 시댁에 인사 가던 중 사헌부 이속은 그 행렬을 막고 소지품을검사했는데, 당시 금지하고 있던 육류가 발견되자 수행하던 종을 가됐다. 범법 행위를 적발하기는 했지만, 일개 사헌부 이속이 현직 우의정의 손녀를 검문하고 그 종을 하옥시킨 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 P205

끝으로, 홍백경도 삼사의 비판으로 순조롭게 승진하지 못했다. 연산군 8년 1월 삼사는 도덕적인 문제가 있거나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국왕이 내지로 특별 승진시키거나 근거 없이 가자를 남발한다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으며, 가장 문제되는 인물로 지목한 홍백경을 참판에서파직시킨 것이다
그 밖에도 연산군 5년 7월 자신들이 인사 문제에 참여하는 것을 이조가 막고 있다고 비판해 국문을 관철시킨 것도 대간의 영향력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사례다(5.7.15 계유 • 16갑술 · 21기묘).
- P206

연산군 중반에는 홍문관의 위상도 크게 상승했다. 국왕은 대간이 홍문관의 의견을 두려워하며 그들의 영향력은 재상까지 위협하고 있다고파악했다(5.12.14무술). 우의정 이극균도 비슷한 의견을 피력했으며.
(7.11.16경인 · 23정유) 성준 · 한치형 등도 홍문관은 이전의 집현전처럼 자.
문기관에 지나지 않는데도 너무 큰 권력을 행사한다고 지적했다(7.10.25 신미: 7.11.11을유 · 12병술 · 16경인 · 19계사).
- P207

이런 홍문관의 영향력은 실제로도 입증되었다. 연산군 7년 8월 대신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며 대간도 규찰에 힘쓰지 않고 관망만 한다고 홍문관이 탄핵하자 영의정 한치형을 비롯한 주요 대신과 대간이 모두 사직한 것이다(7.8.7일자).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친 결과 삼정승 한치형 · 성준 · 이극균은 일찍이 홍문관을 국가의 동량이며 대간과다름이 없다고 평가한 성종의 판단에 동의하면서 그 위상을 인정하게되었다(7.11.17신묘) - P207

치세 중반 삼사의 발언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당시 국왕이 가장집중하던 사안인 사치와 패행이었다. 국왕의 주요 업무가 곧 국무라면,
국왕과 삼사는 거의 모든 국무에서 충돌한 것이었다. 일일이 거론할 수없을 정도로 수많은 상소에 담긴 삼사의 주장은 요컨대 국왕에게 본연의 임무인 정무政務에 좀더 충실하라고 촉구한 것이었다. 연산군 8년 4월홍문관의 상소는 국왕의 불성실과 재정의 악화를 중심으로 한 국정의난맥상을 집약한 대표적인 사례로 생각된다. - P208

그러면서 그는 성종 말년부터 생긴 이런 폐단을 지금 고치지 않으면후세에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9.3.14신사), 앞서도지적했지만, 당시의 가장 큰 적폐라고 판단한 문제의 기원이 성종대에있다는 판단은 부왕에 대한 그의 반감이 모후의 사사라는 감정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판단에서도 발원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 P210

연산군은 홍문관도 압박했다. 그는 인물을 논란하는 것은 홍문관의직무가 아니라면서 그 언론권을 부정했으며(8.10.4계묘) 대간과 연합하는자연스런 관행도 문제 삼았다. "대간과 홍문관은 각각 직무가 있는데,
지금은 대간이 아뢴 일을 홍문관이 그대로 따라서 말하고 있다. 그들은동료와 관련된 일은 거론하지 않지만 대신의 일은 반드시 모두 논쾌한다(7.10.26신미), "홍문관이 궁궐 수리와 잔치를 중지하자고 주청했을 때도 연산군은 서책을 관장하는 부서가 감히 이런 일을 말한다면서 일축했다 - P210

연산군은 선왕 때부터 시행된 일이라는 명분에 따라 서연관이나 삼사를역임한 사람은 윤대에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8.11.4 신유 · 12신사). 물론삼사를 제압하는 가장 빈번하고 일반적인 방법은 그들을 체직시키는 것이었다.  - P210

연산군대에 삼사 장관(대사헌 · 대사간 · 부제학)의 재직 기간이 평균 4.2개월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삼사를 순치시키려는 국왕의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이런 수치는 그 하위 관직으로 내려가면 더욱줄어들 것이다).  - P210

연산군은 그런 허점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그는 7개월 전에 내린 명령의 폐단을 지금에야 아뢴다면서 당시 대간으로 현재까지 재직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하라고 명령했고, "대간은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직책인데 자신들이 먼저 착오를 저지르면 어떻게 남을 바로잡겠는가"라고 질책하면서 죄상을 국문한 뒤 체직시키라고 하교했다 (8.12.4임인), 이것은 충분한 정당성을 지닌 조처였다. 대간이 드러낸 객관적인 문제점을 놓치지 않고 기민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한 이런 사례는 연산군이결코 둔감하지 않은 정치력을 지닌 국왕이었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것이다.  - P211

이때 국왕이 총애하는 측근들에게 물품을 지나치게 하사하고 과도하게 잔치를 베풀었다. 인수대비는 그만두게 하지 못할 것을 알고 한치형에게 비밀리에 당부했다. "주상의 행동이 이런데도 고치지 않으니 경은 사직의 증신으로 죽을힘을 다해 바로잡지 못하면 지하에서 조종의 영혼을 무슨 낮으로 보겠습니까?" 이때부터 한치형은 성준, 이극균과 함께 국왕의 행동을규제하고 간언하는 것이 많았다(8.6.28 무진).  - P214

그해 3월 삼정승 한치형 · 성준·이극균이 올린 시폐 10조는 그 제목대로 당시의 폐단을 집약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83.25 정유).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이 상소의 주청자와 내용을 가장 증오했는데,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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