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사울은 일종의 가교 역할을 했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처음 등장할 때 바울은 "사울이라는 청년"이라고 불립니다. 스테파노에게 돌을 던져 죽인 후 돌을 던졌던 증인들은 자신들의 옷을 벗어 사울앞에 둡니다.
사람들은 귀를 막고, 큰소리를 지르고서,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바깥으로 끌어내서 돌로 쳤다. 증인들은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 (사도 7:57~58)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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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분명한 것은 나사렛 예수가 죽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 중 몇몇이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인지하고 선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살리셨다고 말했다. - P37

1세기 중엽의 바울(의 편지)은 이 전승에 관해 우리가 가진 가장 초기 자료이다. 그는 이 예수 부활의 경험이 시각적이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 P37

바울에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베드로에게 (""), 그리고 "열둘에게 예수 추종Skubistis자들의 내부 집단) "보이셨다"(오프테óphthe). 이어서 거의 500명의 추종자들에게
"보이셨고" (역시 같은 동사인 오프테를 사용한다), 그 후에는 야고보(예수의 형제에게, 그리고 결국 "모든 사도들"에게 보이셨다(고전 15:5-7). 바울은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도 나타나셨다고 말한다(15:8 다시 오프테를 쓴다. 참고: 고전 9:1
"내가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개역개정). - P37

하지만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암시하는 바에 따르면, 바울 자신의 환상은 다메섹에서 일어났다(갈 1:15-17).  - P38

바울로부터 한 세대 혹은 두 세대 이후에, 복음서 저자들은 최초의부활 현현을 갈릴리 (마가복음, 마태복음), 또는 예루살렘이나 그 근교(누가복음, 요한복음) 등 다양한 장소와 연결시켰다. 또한 복음서 저자들은 서로 다른 이들을최초의 목격자로 지목한다(여성 추종자들이었는지, 베드로였는지, 혹은 익명의 제자들이었는지 의견이 갈린다). 그들이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 P38

바울의 주장에 따르면 그것은영적인 몸을 가진 그리스도이며, 혈과 육의 몸은 절대 아니었다(고전 15:44, 50).
바울 이후 복음서 저자들은 그에 못지않은 강한 어조로 혈과 육의 몸을 가진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주장한다(눅 24:39-40; 요 20:27). "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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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문종부터 단종까지의 상황을 재현한 듯한 예종의 짧은 재위와 붕어, 그리고 연소한 성종의 예상치 못한 사위는그런 불길한 가능성의 핵심적 요소들이었다. 그러나 앞서 흡사한 상황이 조성한 위기를 민첩하게 포착해 집권했던 당시의 주요 인물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현명하게 사용해 이때의 잠재적 위기를 효과적으로 진정시켰다.
- P44

거기에 사용된 제도는 수렴청정과원상제였다.
왕실의가장 어른으로 상당히 뛰어난 정치력을 갖고 있던 정희왕후와 신숙주·한명회 등 세조대 이래의 주요한 훈구대신들은 상보적 관계에서 어린국왕을 보호하고 보좌하면서 성종 초반의 국정을 이끌었다. 두 제도는궁극적으로는 왕권을 제약하는 것이었지만, 이 시기의 특수한 상황에서그것은 대체로 우호적이며 유익한 제약이었다. - P44

만 19세로 성년이 된 재위 7년(1476) 1월 수렴청정이 중지되고 같은해 5월 원상제가 혁파됨으로써 성종은 자신의 진정한 치세를 시작할 수있었다. 그 직후인 7월 11일(일자)에 그동안 비어 있던 중궁을 확정한 것은 이런 새로운 출발에 맞추어 왕실의 공백을 정비한다는 의미도 컸다고 생각된다. - P44

정희왕후가 윤씨를 간택한 이유로 든 사항은 우선 성종이 그녀를 총애하며, 자신도 그녀의 검소함과 현숙함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었다. - P45

나중에 연산군이 되는 왕자가 그해 11월 7일(정미)에 태어나는 것으로 볼때 당시 성종은 그녀를 매우 사랑했으며, 이런간택의 중요한요인이 되었다고 판단된다.  - P45

그리고 현숙한 품성 외에도, 앞서 본 대로 후궁중에서 윤씨의 서열이 가장 높았던 것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을것이다(정희왕후의 전교(성종8.3.28을 참조). 윤씨는 한 달 뒤인 8월 9일(기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같은 날 성종은 대단히 기뻐하면서 사면령을발표했다. - P45

윤씨의 비극은 폐비와 별거, 폐서인과 출궁(성종10.6)을 거쳐 사사(성종13.8)에 이르는 세 단켸로 진행되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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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선조가 1602년 인목왕후와재혼하고 1606년 영창대와永昌大君이 태어나자 상황은 복잡해진다. 임진왜란의 1등 공신 정곤1600년, 선조에게 재혼하지 말라고 호소한 바 있다. 정비교를 다시 들일 경우 왕세자 광해군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때문이었다. 선조가 혼인을 강행하고 영창대군이 태어나면서 정곤수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난다.  - P17

1613년 이른바 계축옥사가 터지고 영창대군이 먼저 희생되었다. 은상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던 박응서가대궐을 습격하여 광해군을 제거하고인목대비에게 수렴청정을 맡긴 뒤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 P18

1615년 신경희의 옥사를 계기로 인조의 아우 능창군綾昌이 죽었다. "신경희가 정원군의 삼남 능창군을 추대하려는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고변에서 비롯된 비극이었다. 일찍이 "능창군의 관상이 특이하다", "정원군의 새문안 저택과 인빈의 무덤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풍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광해군이었다. - P18

마침 광해군 정권을 뒤집어엎을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광해군과 밀착해 있던 이이첨등 대북영창대군의 죽음을 계기로 광해군에 대한 원한이,
극에 달한 인목대비까지 손보려고 했다. 그녀를 화끈으로 여겨 대비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 P19

그 과정에서 인목대비를 서궁(경운궁, 덕수궁)으로 옮겨 유폐시키고 폐모논의가 일어났다.
‘모후를 폐한다‘는 것이다.  - P19

이이첨 등은 "대비는 임금의 어머니이기이전에 임금의 신하"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인목대비가 광해군에게원한을 품는 것은 ‘불충‘이라고 강변했다. 대북파는 조정 신료들에게 인목대비를 몰아내는 데 동참하라고 강요했다.  - P19

서인과 남인의 중신들이 폐모 논의에 반대하다가
 ‘불충‘의 낙인이 찍힌 채 유배되거나 조정에서 쫓겨났다. 대북파는 폐모 논의를 계기로 ‘공안 정국‘을 조성했고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하지만 폐모‘를 운운한 것은 효를 가장 중요한 강상윤리로 여기던 조선 사회에서 역풍을 맞을 수밖에 없는 실책이었다.  - P19

급기야 ‘서인이 원망을 품고, 남인이 이를 갈고, 소북이 비웃는 형세가 조성되고 있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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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가장 많은 논전을 벌인 대상은 바리새인이었을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안식일에 대해 토론하신 주님은 사두개인들과는 병 고치는 권세에 대해 쟁론하셨습니다. 부자청년과는 영생 얻는 길에 대해, 장로들과는 식사할 때 손 씻는 관례를 두고 토론하셨습니다.  - P155

대제사장들과는 성전 청결사건으로 거세게 한판 붙으셨습니다. 사두개인들과는 부활에 관해, 헤롯당과는 가이사에게 세금 내는 문제로, 율법학자들과는 어느 계명이 가장 큰지를 두고 토론하셨습니다. - P155

그렇다고 예수님이 싸움닭이셨던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딤후 2:23)을 피하셨습니다. 논쟁을위한 논쟁을 벌이지 않으셨습니다. "누가 크냐"(눅 9:46)를 두고 논란을 벌이지도 않으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아는지 자랑하지 않으셨습니다.  - P156

토론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온전히 증언하셨습니다. 진리를 진리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리도 자주 전투적으로 논쟁을 벌이셨던단 하나의 이유는 말씀에 대한 사랑과 충성이었습니다. - P156

정조는 자기반성의 자료로 삼기 위해 자신의 말과 행동을규장각 신하들이 기록하게 하였는데, 그게 바로 「일득록입니다. 사관들이 왕의 행적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과 달리이 책은 사관이 아닌 신하들이 정조의 말을 기억해 두었다가 글로 남긴 것입니다. 하루에 한 번 반성한다는 뜻을 지닌이 책에는 학문에 정진했던 정조의 어록인 만큼 공부에 관한 내용이 상당히 많습니다. - P157

그중 한 문장을 소개하겠습니다. "토론과 독서는 수레의바퀴나 새의 날개와 같아서, 한 가지만 버려도 학문을 할 수없다." 참으로 학문하는 방법의 본질을 꿰뚫는 말입니다. - P157

답답한 주입식이 아니냐는 의문이 들지 모르겠네요. 그들은 성경을 암송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암송한 성경에대해 무수한 질문을 퍼붓습니다. 학교 다녀온 아이에게 부모들은 "선생님에게 무슨 질문 했니?"라고 질문합니다. 다른 잘못은 크게 혼내지 않다가도 질문이 없으면 크게 혼을내기도 합니다.  - P159

성경공부 시간에는 부모나 교사가 시종일관질문만 합니다. 답을 스스로 찾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 스스로도 계속 질문하게끔 합니다. 생각하며 읽게하려는 것이지요.
- P159

성경을 읽고 질문하고 토론하는 것을 가리켜 탈무드식논쟁법(Talmudic Debate)이라 합니다. 한쪽이 성경에 대한 자기 생각이나 의문을 말하면, 다른 한쪽은 왜 그렇게 읽고 해석했는지 꼬치꼬치 캐묻습니다. 상대방의논리의 약점을 사정없이 파고듭니다. 맥놓고당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공격에 대답하고, 질문하고, 상대의 허점을 집요하게 따지고듭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이 고정되지 않게 하려고 역할과처지를 바꿔 토론합니다. 얼마나 토론에 열중인지 책상을치며 소리 지르기도 합니다. 마치 싸우는 것 것 같습니다 - P160

정녕 유대인은 토론하는 민족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경은 토론하게끔 만드는 경전입니다.  - P160

토론식 성경 읽기는 성경의 요구입니다. 예수님처럼, 제자들처럼, 유대인들처럼 성경을 토론하면서 읽으십시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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