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문종부터 단종까지의 상황을 재현한 듯한 예종의 짧은 재위와 붕어, 그리고 연소한 성종의 예상치 못한 사위는그런 불길한 가능성의 핵심적 요소들이었다. 그러나 앞서 흡사한 상황이 조성한 위기를 민첩하게 포착해 집권했던 당시의 주요 인물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현명하게 사용해 이때의 잠재적 위기를 효과적으로 진정시켰다. - P44
거기에 사용된 제도는 수렴청정과원상제였다. 왕실의가장 어른으로 상당히 뛰어난 정치력을 갖고 있던 정희왕후와 신숙주·한명회 등 세조대 이래의 주요한 훈구대신들은 상보적 관계에서 어린국왕을 보호하고 보좌하면서 성종 초반의 국정을 이끌었다. 두 제도는궁극적으로는 왕권을 제약하는 것이었지만, 이 시기의 특수한 상황에서그것은 대체로 우호적이며 유익한 제약이었다. - P44
만 19세로 성년이 된 재위 7년(1476) 1월 수렴청정이 중지되고 같은해 5월 원상제가 혁파됨으로써 성종은 자신의 진정한 치세를 시작할 수있었다. 그 직후인 7월 11일(일자)에 그동안 비어 있던 중궁을 확정한 것은 이런 새로운 출발에 맞추어 왕실의 공백을 정비한다는 의미도 컸다고 생각된다. - P44
정희왕후가 윤씨를 간택한 이유로 든 사항은 우선 성종이 그녀를 총애하며, 자신도 그녀의 검소함과 현숙함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었다. - P45
나중에 연산군이 되는 왕자가 그해 11월 7일(정미)에 태어나는 것으로 볼때 당시 성종은 그녀를 매우 사랑했으며, 이런간택의 중요한요인이 되었다고 판단된다. - P45
그리고 현숙한 품성 외에도, 앞서 본 대로 후궁중에서 윤씨의 서열이 가장 높았던 것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을것이다(정희왕후의 전교(성종8.3.28을 참조). 윤씨는 한 달 뒤인 8월 9일(기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같은 날 성종은 대단히 기뻐하면서 사면령을발표했다. - P45
윤씨의 비극은 폐비와 별거, 폐서인과 출궁(성종10.6)을 거쳐 사사(성종13.8)에 이르는 세 단켸로 진행되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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