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선조가 1602년 인목왕후와재혼하고 1606년 영창대와永昌大君이 태어나자 상황은 복잡해진다. 임진왜란의 1등 공신 정곤1600년, 선조에게 재혼하지 말라고 호소한 바 있다. 정비교를 다시 들일 경우 왕세자 광해군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때문이었다. 선조가 혼인을 강행하고 영창대군이 태어나면서 정곤수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난다.  - P17

1613년 이른바 계축옥사가 터지고 영창대군이 먼저 희생되었다. 은상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던 박응서가대궐을 습격하여 광해군을 제거하고인목대비에게 수렴청정을 맡긴 뒤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 P18

1615년 신경희의 옥사를 계기로 인조의 아우 능창군綾昌이 죽었다. "신경희가 정원군의 삼남 능창군을 추대하려는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고변에서 비롯된 비극이었다. 일찍이 "능창군의 관상이 특이하다", "정원군의 새문안 저택과 인빈의 무덤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풍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광해군이었다. - P18

마침 광해군 정권을 뒤집어엎을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광해군과 밀착해 있던 이이첨등 대북영창대군의 죽음을 계기로 광해군에 대한 원한이,
극에 달한 인목대비까지 손보려고 했다. 그녀를 화끈으로 여겨 대비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 P19

그 과정에서 인목대비를 서궁(경운궁, 덕수궁)으로 옮겨 유폐시키고 폐모논의가 일어났다.
‘모후를 폐한다‘는 것이다.  - P19

이이첨 등은 "대비는 임금의 어머니이기이전에 임금의 신하"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인목대비가 광해군에게원한을 품는 것은 ‘불충‘이라고 강변했다. 대북파는 조정 신료들에게 인목대비를 몰아내는 데 동참하라고 강요했다.  - P19

서인과 남인의 중신들이 폐모 논의에 반대하다가
 ‘불충‘의 낙인이 찍힌 채 유배되거나 조정에서 쫓겨났다. 대북파는 폐모 논의를 계기로 ‘공안 정국‘을 조성했고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하지만 폐모‘를 운운한 것은 효를 가장 중요한 강상윤리로 여기던 조선 사회에서 역풍을 맞을 수밖에 없는 실책이었다.  - P19

급기야 ‘서인이 원망을 품고, 남인이 이를 갈고, 소북이 비웃는 형세가 조성되고 있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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