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로 접어들면서 산중에는 강추위가 엄습하기 시작했다. 남쪽으로 기울 대로 기운 해는 늦게 뜨고 일찍 졌다. 온기 잃은 햇살이나마 서산에 가리고 말면 추위는 어둠살과 함께 골골을 채워왔다. 밤이 깊어갈수록 추위는 기승을 부렸고, 산들마저 추위를 견뎌내기가 어려운 양 이따금씩긴울음을 울고는 했다 - P349
성공적인 혁명성취를 위한 능동적 투쟁의 연속인 것이다. 혁명의열정은 불 같아야 하고, 혁명의 의지는 물 같아야 하는 것이다.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는 열정을 갖되 물길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끈기를 지녀야 - P353
그의 아버지는 농사철이면 농촌으로, 추수가 끝나면 산판을 찾아벌이가 되는 일이면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음식점 물일에서부터 임질까지 안 하는 일이 없었다. 그의 부모가 그토록 몸을 사리지 않았던 것은 여섯 식구가 먹고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와 그의 동생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요런개명천지에서 배와야 산다. 죽으면 썩을살, 애비에미가 뼈 닳게일혀서 느그 사내눔둘 뒷수발헐 것잉께 느그덜언 공부나 열성으로 혀야 써. 그래야 못 배운 이 애비 한도 풀리제" 그의 아버지의결심이었다. - P356
오관돌은 염상진보다 나이가 네 살이나 많은 서른셋이었다. 그는 조성에서 태어난 토박이였지만 간도땅에서 15년 남짓 산 남다른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소작쟁의에 연루되어 일본인 중도의 소작을 잃게 된 그의 아버지는 말로만 들어온 간도땅을 향해 길을떠난 것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열넷이었다. - P356
이해룡은 보성의 지주 이상원의 셋째아들이었고, 김범우보다 순천중학 1년 선배였다. 그는 보성전문 법학부를 다니다가 학병에 끌려가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염상진을 따라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 P358
순천경찰서에서 몇 차례 색출대가 파견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리산이란 산은 그렇게 간단하게 색출작업이 이루어지는 산이 아니었다. 앉음새가 열두 폭치마처럼 넓고, 품고 있는 골짜기가 그 치마의 주름보다 많아 피신하는 100여 명을 찾아내기란 모래밭에 빠뜨린 바늘을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가당찮은 일이었다. 이해룡은 피신생활 동안 사상무장은 물론 체력단련까지 톡톡히 한 셈이었다. - P358
산은 탈수록 그 요령이 늘게 마련이므로 주력은 보통기준의 세배정도까지 빨라져야 한다는 것이 그가 세운목표였다. 그는 그 목표달성을 위해 대원들을 독려하고 이끌었다. 그런 훈련들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목표에 다다라 있었다. - P363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온 정신은 아랫배로 쏠렸다. 거기에는 분명 그분의 생명이 담겨있었다. 벌써 두 달째 꽃이 비치지 않고 입맛이 멀어지며 아침저녁으로 신열이 스치는 것은 무슨 까닭이다. 마음도 몸도 영원히 그분의 것이고자 그 얼마나 간절히 소원했던 씨받음이었던가. - P372
외서댁의 불안감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처녀 적부터어느 때 한 번 거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꽃이 비치지 않고지나친 것이었다. 만약 그리 되었다면 어찌할 것인가, - P349
"화, 요거 사람 미치고 사까다찌 허겄네. 선생년도 사랑타령, 무당년도 사랑타령, 요런 니미럴 눔에 시상이 워찌 돌아가니라고지집년덜이 먼첨 꼬랑댕이럴 치고 지랄 염병이여 이거 암탉이 먼첨 울어날 새는 법 없는디, 암컷덜이 요리 설레발치는 것 봉께로 - P373
누가 누구를 죄인이라고 잡아넣고, 재판을 하고 할수 있는 것인지, 그는 가끔 자괴감에 빠지고는 했다. - P376
그 꼬락서니 보기 싫은 절뚝발이 예수쟁이놈 서민영이가 진정서를 만든 것이 화근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진정서 아니라 협박장을 받았다 하더라도 묵살해버리면 그만일 일이었다. 현실적으로 어느 편을 들어야 유리한 것인지는 세 살먹은 어린애도 아는 판에 심재모는 소작인들 편을 든 것이다. - P379
그녀는 느닷없이 울부짖었다. 그리고 시멘트 바닥에 괸 피를 두손으로 떠올리듯 하며 소리쳤다. "안 되야, 안 되야. 엄니, 그이 씨럴 요리 맹글어 안 되야 내 " 소원 요리 망쳐먼 안 되야. 엄니, 엄니이이・・・・・・ - P383
그러나 눈빛이 변화를 나타냈다. 약간 치켜뜬 듯한 눈은 의지적이고 신념에 차 있었다. 그 눈은 관념적 허무를 바라보는 승려의 눈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지키고자 하는인간의 눈이었다. 법일스님과 작별한 다음에도 ‘역사의 홍역‘이라는 말이 자꾸만 되씹혀졌다. "그 중, 골치 아픈 중이오 중이면 열심히 목탁이나 칠 일이지 뭘 먹겠다고 빨갱이질이난 말야." 검사는 거침없이 내쏘았다. "순수한 사회개혁 의식이라고요? 그게 무슨 근거가 있는 말이오? 김 선생, 괜히 동정하지 마시오. 그자는 골수 빨갱이요. 순천지구에서 발행된 지하신문에 자금을 댔소. - P386
그 눈길이 여자가 남자에게 보내는 것이 아님을, 그러나 어떤 호감을 표하고 있었음을 김범우는 느끼고 있었다. 김범우는 비로소 그녀를 에워싸고 있었던 안개가 걷히는 것을의식했다. 너는 단순히 안창민의 애인만은 아니다! - P395
"수우운처어어언, 수우운처어어언, 여기는 순천, 순천역입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잊으신 물건 없이 차례차례 하차하시어 후미끼리를 건널 때 유의하시와 개찰구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 P395
있는 집 자식으로 아무런 고생을 모르고 자라 영문학을 전공했고, 지주의 기득권을 천부적 절대권인 것처럼 믿어 그 부(富)가 형성된 과정의 모순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의문을 제기하거나 회의해 본 적이 없는 사나이. 그러므로 시대의 흐름이나 사회의식의 변화를 이해하거나 수용하지 못한 채 스스로의 우리에 갇혀 불행을 키워가는 연약한 사나이. - P399
"김 선생, 내가 월남해서 크게 잘못한 일이 한 가지 있어요." 선우진은 어느새 감정을 다스렸는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뭘요?" "월남했을 때 선생이 되지 말고 남들처럼 경찰에 투신하거나 군대에 들어갔어야 했어요. 그랬으면 빨갱이한테 원수도 속 시원하게갚고, 이런 꼴도 안 당했을 것 아닙니까." - P398
낙안댁은 자신의 경솔을 책하며 염상구를 방으로 들게 했다. 염상구는 간단히 한마디 전하고 돌아서려 했던 당초의 마음을 바꿔일삼아 안방으로 들어갔다. 제 기분 내키는 대로 사람을 반기는 척했다가 홀대하다가 하는 못돼먹은 심보에 비위가 상해, 속을 좀 긁어주고 싶은 오기가 동했던 것이다. - P402
"니기럴, 싹 다 그만두씨요. 누구럴 거렁뱅이새끼로 아요? 살인얼허라고 시킴스로 한다는 짓거리가 요게 머시여, 재수대가리 없이!" 염상구는 방바닥을 박차고 일어났다. "아니시, 아녀. 여자 소견에 그리 되얐응께 자네가불러보소." 낙안댁은 염상구를 붙들고 늘어졌다. "쪼옷소, 일곱에세곱얼내씨요." "글먼, 고것이 을매여?" 낙안댁이 입을 딱 벌렸다. "삼칠에 이십에 일이요. 남자가 짜잔하게 꼬랑댕이 붙은 것꺼정받기 싫은께 딱 스무 가마니만 내씨요. 더 무신 말 허먼 나하고는끝장이요." - P406
"패도 너무 무작하게 됐는지 피가 주체럴 못하게 쏟아져, 죽을까겁이 나서 병원으로 옮겨놨구만이라 애 떨어진 것 확인도 허고 병문안도 허고 겸사겸사혀서 병원에 한차례 가보시라." - P406
낙안댁의 말 마디마디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있었다. 죽은 듯이누워 있는 소화의 양쪽 눈꼬리에서 흘러내린 눈물은 관자놀이께의 머리카락을 적시며 아래로 스미고 있었다. - P409
나 치부의 수단이나 기준은 역시 전답이었다. 이지숙은 담양 지주이장원의 4남 1녀 중 막내인 고명딸이었다. 그녀가 사회주의에 경도된 것은 셋째오빠의 영향이었다. 그녀는 생김새는 물론 성격까지 셋째오빠를 닮은 데가 많았다. 셋째오빠는 말수가 적은 냉정한성격에 사리분별이 정확했다.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그런 셋째오빠가 좋아 유달리 따랐고, 오빠도 여동생을 남달리 사랑했다. 그녀의셋째오빠는 광주서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사회주의 의식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 P414
누가 이름 지었는지 모른 채 사람들은 그 나무를 ‘대나무‘라 부르게 되었다. 대를 물린 가난한 넋의 환생이란 뜻이라고도 했고, 남들 대신 죽어 남을 이롭게 한 넋의 환생이란 뜻이라 말하기도 했다. 대나무는 가난한 소작인의 넋이라서 춥고 배고픈 것을 싫어해 기온이 따뜻하고 농지가 넓은 땅에만산다고 했다. 그리고 겨울에 댓잎들이 유난히 서걱거리는 것은 ‘추워, 배고파, 옷 줘, 밥줘‘ 하는 넋들의 읊조림이라고 했다. - P419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소학교를 졸업한 이지숙은 공주사범에진학하자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에 빠져들었다. 셋째오빠가 세상을떠난 것은 그녀가 3학년 때였다.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해 도주하다가 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오빠의 죽음을 계기로 그녀는 더 열성적인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녀가 벌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것은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은신책이었다. - P419
그는 체포된 두 여자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들을 취조해서, 분명히 뿌리를 내리고 있을 읍내의 지하조직이 어느 정도라도 드러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두 여자는 빨갱이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말단세포도 아니었다. 소화라는 여자의 행위는 사상이나조직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단순범죄에 지나지 않았다. - P422
간단하지도 단순하지도 명료하지도 않았다. 적들은 진압된 잔당이 아니라 일시 후퇴한 주력이었고, 대부분의 민간인들은 말이 없는 속에서 군·경을 불신하거나 귀찮아하고 있었다. 가난에 지친그들은 상황의 변화에 대해 거의 무표정했다.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자기네들의 행불행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한 무관심한 태도들이었다. 반항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협조도 하지 않는 사람의 무리 - P428
"그려, 나가 딱 봉께로 책 사로 온 것이 아니라 이 시악씨 히야까시 헐라고 왔드라 그것이여. 나말 똑똑허니 들어 앞으로 이 시악씨헌테 히야까시 헐라고 여그 오덜 말어. 이 시악씨는 내 각시가 될란지도 몰른께 무신 말인지 알아잡수시겄어?" "음마, 음마, 음마, 고것이 무신 소리다요?" - P434
"워메 워메, 염병헌다. 누구 맘대로 지 각시여, 각시가 호랭이가칵 씹어가그라." 오냐, 내 맘대로다. 염상구는 뒤따라오는 정님이의 화가 받친 목소리를 들으며 그저 흐흐거리고 있었다. - P435
염상구는 다소 허풍을 섞어 말하고 있었다. 그는 벌써부터 딴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한바탕 북새질쳤던 일이 말끔하게 끝났으니외서댁을 품고 하룻밤 지낼 작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P437
반강제로 끌어들이다시피 했다. 군인을 일단 안으로 끌어들인 문기수는 딸에게 눈짓을 보냈다. 정하섭이를 낚았던방법을 그대로적용하는 것이었다. 딸년의 모란꽃같은 얼굴에 피는 그 곱고 차진눈웃음을 한번 받아본 젊은 놈은 두 번 걸음하지 않을 수 없다는것을 문기수는 자신하고 있었다. - P438
무서웠지만, 염상구의 감시도 그에 못지않게 무서웠다. 염상구가엉뚱한 일로 눈총을 쏘기 시작했지만 일단 그의 눈길이 모아진 이상 그 일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눈치 빠르기가 비린내 맡는 고양이 콧구멍 같은 염상구를 상대로 벌일 일이 따로 있었다. - P439
외서댁은 비로소 올가미를 벗어난 기분이었다. 남편에게는 죽는날까지 죄로 남을 일이었지만, 소문이 나기 전에 염상구를 떼쳐내고, 남들 눈을 속여넘기기에는 애가 빨리 생긴 것이 다행인지도 몰랐다. - P443
꼬막이 흔한 벌교 고샅들의 모습이었다. 꼬막껍질들은 두껍고 단단해서 길바닥에 박혀 자갈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었다. 장마에 길바닥이패거나 씻겨나가는 것을 막았고, 남도지방에 내리는 물기 많은 눈의 미끄러움을 줄였다. 그뿐만 아니라 새싹이 움터오르는 봄이면양지바른 곳을 찾아 소꿉놀이를 차리는 계집애들은 꼬막껍질을파내 각종 소꿉으로 삼았다. 그리고 구슬이 없는 사내아이들은 꼬막껍질로 구슬을 대용하기도 했다. - P444
"많이 낫구만요. 인자 곧 일어나질 상싶구만이라." "그려, 얼렁 일어나야제 없는 살림에 맘고상지 허고 사는 판에몸이나 실해야제. 니가 이 집안 기둥이고 대들다. 니 병이 그냥몸살이 아니다. 끌려댕김서 겁묵고, 매타작당혀서 얼병 들고, 마음고상 몸고상이 항꾼에 도진 거이다." - P446
"다 틀려묵었소. 군대고 경찰이고 다 핫바지저구리간디라?" 큰며느리 말을 듣고 호산댁은 불현듯 작은아들을 생각했다. 큰아들 세상이 오면 작은아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과는 반대로작은아들이 쫓기는 신세가 될밖에 없었다. 큰아들 세상이 오기를바랄 수도, 작은아들 세상이 계속되기를 바랄 수도 없었다. 빌어묵을 놈덜, 아무 쪽으로나 한패가 되든지…… - P448
호산댁은 스산스럽고 허한 마음으로 고샅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길바닥에 박힌 꼬막껍질들이 자신의 가슴에 박힌 수많은 근심만 같았다. - P450
"그게 전라도라는 뎁니다. 전라도사람들은 욕 많이 하는 걸 탓하면, 욕도 못하면 무슨 수로 사느냐고 맞섭니다."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글쎄요, 뼈빠지게 농사지어 지주한테 다 뺏기고, 배곯고 헐벗고사는 억울함과 분함을 욕으로라도 풀어야 그나마 살아갈 수 있지않겠느냐는 뜻이겠지요." - P455
평양을 중심으로 상업경제를형성한 평안도나, 수원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같은 데서는 농업은제2의 치부 수단에 불과합니다.그러나 농업경제가 중심이 되는 평야지대에서는 치부의 절대수단이 땅입니다. 필연적으로 인정사정없는 지주의 착취와 수탈이 행해지고, 지주는 고리대금업까지 겸하게 됩니다. 평야지대의 소작인들은 옛날부터 관과 지주에게 이중적으로 고통을 당해왔습니다." - P456
"예, 고마운 일입니다. 실은………… 양조장 사건을 그리 처리한 일이없었더라면 오늘 약속에 응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뭐랄까, 전라도를 다소나마 이해하는 것은 우리 땅 전체의 민중이 겪고 있는 수난을 이해하는 것이 될 겁니다." - P457
"참말로 뱃대지럴터쳐죽여배창시나뭇가지에 널어 까마구가 뜯어묵게 혀야 헐 놈이다. 배성오고 고두일이고 아깝고 불쌍혀서 워째야 헐끄나" - P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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