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말로 복벽주의라고도 하는 보황주의넌 나라에 주인언 임금이니 독립운동도 임금얼 다시 받들기 위해 해야 헌다는 것이고, 공화주의 그 반대로 나라에 주인언 백성이니 독립운동도온 백성의 뜻얼 받드는 나라럴 세우기 위해 해야 헌다는 것이오.
우리 군정부에서 공화주의럴 내세우는 것이고, 아까 그 대한독립단언 복벽주의럴 내세움스로 여러분덜얼끌어갈라고 헌 것이구만요. 그러니 쌈이 안 일어날 수가 있겄소?" - P286

4월 말까지 서간도에서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들은 13개에 이르렀다. 그중에서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것 두 개가 군정부와 대한독립단이었다. 그런데 군정부에서는 공화주의를 표방하고 있었고, 대한독립단에서는 복벽주의를 주창하고 있었다. 그 상반된 이념은간부들의 성분과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 P288

그 시기에 유인석의 의병부대도 압록강을 건너가 통화현과 집안현 일대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 근방 현들로 이동하게 된 여러 의병장들은 당연히 스승과 결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중국이나 러시아가 어떻게 변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상투를 틀고 지내다가 3.1만세를 계기로 모두 하나로 뭉쳐 대한독립단을 만들면서 복벽주의를 내세웠던 것이다. - P288

군정부의 간부들도 족보를 따지자면 거의가 양반이었다. 그러나그들은 신학문을 접했거나 개화사상을 가진 한편으로 대종교 교도들이었다 - P288

경상도사람인 이상룡은 골수로 한학을 공부한 육십객이면서도 신학문을 이해했고, 비밀결사 신민회가 계획하는 독립전쟁 기지를건설하려고 서간도로 망명한 다음 독립성취를 종교적 과업으로삼는 대종교의 교도까지 되었던 것이다.
물론 군정부에도양반 출신 의병장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송수익처럼 일찍이 상반의식을 버리고 생각을 바꾼 사람들이었다. -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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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유비에게 심술을 부리면서 두 번이나 강을 업어 건너게 한노인은 누구일까? 바로 스승 노식의 추천서를 받아 유비가 찾아가려던전설적인 학자 정현 선생이었다. 정현 선생은 청년 유비의 그릇 크기를알아보기 위해 그를 시험한 것이다. - P1050

강과 신발과 신화. 인간의 상상력은 어쩌면 이같이 비슷비슷한가. - P1051

불손한 언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스승 케이론과 ‘불손한 언사를 불손한 언사로 받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가 있어서 공손하게 대답했다. - P1051

할머니가 또 호령을 내어놓았다.
할머니의 호령이 아니었어도 이아손은 한 발을 그쪽으로 내밀 수 없었으리라. 할머니의 몸은 이미 바윗덩어리가 아니라 산이라도 짊어진것같이 무거워져 있어서 한눈팔 겨를이 없는 데다 가죽신은 이미 강 하류 쪽으로 떠내려가버린 뒤였기 때문이다. - P1053

이아손은 펠리온산에서 스승 케이론에게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다‘고 한 다짐을 생각하고는 가죽신 잃어버린 것은 잊어버리고 강건너편을 향해 걸음을 옮겨놓았다. 여전히 건너편까지의 거리는 조금도 좁혀진 것 같지 않았고 할머니의 엄청난 몸무게 때문에 이아손의 발은 강바닥 속으로 한 자씩이나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 P1054

"펠리아스왕을 아시는지요?"
"내 사당을 더럽힌 망나니를 내가 몰라?"
"내 사당?"
‘사당이라면 신전이고, 신전의 소유자라면 ‘여신‘이 아닌가. 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내 신전‘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가? 수만 리 뱃길을견딘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배라고는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는 나에게 수만리 뱃길이라니.‘ - P1054

있지요. 펠리아스왕이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다른 여러 신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유독 헤라 여신만은 쏙 빼놓았답니다. 헤라 여신의 사당이 바로 이 이올코스에 있는데도 말이지요. 헤라여신이 가만히 있을 까닭이 없지요." - P1055

헤라 여신은 그리스 신화의 으뜸 신 제우스의 아내다. 헤라 여신은거룩한 결혼의 수호 여신, 가정의 수호 여신이다. 남의 여자를 거려 가정을 파괴하는 남성이 있으면 이 여신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제우스는 바람둥이 신이다. 제우스는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그냥 두지않는다 - P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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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인 665년 고구려 연개소문이 사망했다. 연개소문은 집권 이후 귀족연립체제의 모순을 개혁하기보다는 혈육이나 측근을 중용하며 사적 권력기반을 강화해 장기집권체제를 꾀했다. 반대파 귀족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할 경우에 이들과 타협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연개소문이 장기간 집권하며당의 침공과 나당 연합군의 공격까지 물리쳤지만, 귀족 세력의 갈등이 안으로 심화되면서 정치적 불안이 더욱 커졌다. - P155

결국 다툼에서 밀려난 맏아들 남생(男生)은 국내성으로 피신했다가 당에 투항했다.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원산만 일대의 영토를 바치며 666년 신라에 투항했다. 그 밖의 많은 귀족이 제살길을 찾아 당이나 신라로 투항했다.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의 최후 공격을받기 이전부터 서서히 무너져갔던 것이다. - P155

 연개소문의 둘째 아들 남건(男建)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사태를 돌이키기는 어려웠다. 고구려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제대로파악하지 못한 채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맞았고, 귀족 세력의 분열로 막강한군사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668년 9월 멸망했다. - P156

 당이 백제 고지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할 때부터 신라는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에 신라는 당과 연합을 유지한 채 차분히 고구려 멸망 이후를 대비했다. 668년 9월 왜와 교섭을 재개해배후의 위험 요소를 없애고 친당 세력을 숙청하며 백제 고지로 진격할 전략을 짰다. - P156

한편 당은 고구려 멸망 직후 기미지배정책을 수립했지만, 고구려 유민의 비협조와 저항으로 제대로 시행할 수 없었다. 이에 당은 고구려 유민들을선별해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인 유력자 2만 8,200호를 당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협조적인 유력자를 669년 기미주의 장관에 임명해 지배기반을 확충했다. - P156

이에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해 당군의남하를 막아내면서, 669년 백제 고지를 공략하는 양면전술을 폈다. 신라의선제공격으로 나당전쟁이 개시된 것이다.  - P157

보덕국 신라는 안승을 받아들여 ‘고구려 왕‘으로 책봉했다가 곧 ‘보덕국 왕‘으로 고쳤다. 신라의 "은덕을갚는다"는 뜻을 담은 명칭이다.
- P157

672년 사비성에 소부리주를 설치해 신라 영토임을공식 선언했다. 이는 신라까지 지배하려던 방침을 갖고 있던 당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 부흥군과 웅진도독부를 매개로전개되던 나당전쟁은 점차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 P157

신라가 치밀한 준비와 토번의 흥기라는 국제 정세에 힘입어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로써 한반도에서 수백 년 동안이어지던 삼국의 각축전이 끝나고 한반도 중남부 전체를 신라가 차지했다. - P158

9 토번 7세기 전반에 티베트 고원에서 건국해 842년까지 존속했다. 세력을 떨치며 당을 공격해 동아시아국제 정세에 영향을 끼쳤다. - P157

687년 돌궐이 부흥하고 696년 경 거란이 반기를 드는 가운데 당의 기미지배체제는 약화됐다. 그리고 당 중심의 국제질서가 유지되는 범위도 좁아졌다. 이에 고구려 유민들도 말갈족과 연합해 힘의 공백 지대인 동만주에서698년 발해를 건국했다.  - P159

결국 신라의 당군 축출은 당의 동방정책을 뒤흔들었을 뿐 아니라, 돌궐의 부흥과 발해 건국으로 이어지는 국제 정세 변동의 단초를 열었던 것이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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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 걷기 좋은 도시인 또 다른 이유는 걸터앉아 쉴 곳이 무척 많다는 점이다. 현지인보다 여행자가 더 많다 보니 길을 헤매며 두리번거리거나 어디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때로 타인의시선이 불편하거나 날씨가 좋지 않다면 교회로 들어가 쉴 수도 있다. 가톨릭의 수도인 로마는 세계에서 교회가 가장 많은 도시다. 주변을 둘러보면교회가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고, 교회의 문은 대개 열려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복잡한 거리에서 단번에 벗어나 고요하고 차분한 공간(여름에는 선선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에서 잠시 쉴 수 있다. 귀하고 아름다운 예술품을공짜로 감상하는 호사는 덤이다. 의자에 앉아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는 것온 로마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다. - P30

 바깥의 대상을 고스란히 흡수하고 간직하는 데 매우 유익한 행위가 바로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가 아닐까.  - P32

모든 여행자는 이방인이다. 아무리 그 장소를 사랑한다 해도때때로 외롭고 고단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럴 때 같은 처지의 이방인들을 보면 위안이 되고 마음이 편안해지곤 한다.
16세기 로마에서도 똑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던 듯하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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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간호원으로 서독에 가 있는 것은 큰오빠가 검사가 된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일이었다. 큰오빠가 검사가 된다는 것은 법대에 합격하면서부터 아무도 의심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언니의강단도 무서운 데가 있기는 했었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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