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렵인 665년 고구려 연개소문이 사망했다. 연개소문은 집권 이후 귀족연립체제의 모순을 개혁하기보다는 혈육이나 측근을 중용하며 사적 권력기반을 강화해 장기집권체제를 꾀했다. 반대파 귀족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할 경우에 이들과 타협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연개소문이 장기간 집권하며당의 침공과 나당 연합군의 공격까지 물리쳤지만, 귀족 세력의 갈등이 안으로 심화되면서 정치적 불안이 더욱 커졌다. - P155

결국 다툼에서 밀려난 맏아들 남생(男生)은 국내성으로 피신했다가 당에 투항했다.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원산만 일대의 영토를 바치며 666년 신라에 투항했다. 그 밖의 많은 귀족이 제살길을 찾아 당이나 신라로 투항했다.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의 최후 공격을받기 이전부터 서서히 무너져갔던 것이다. - P155

 연개소문의 둘째 아들 남건(男建)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사태를 돌이키기는 어려웠다. 고구려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제대로파악하지 못한 채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맞았고, 귀족 세력의 분열로 막강한군사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668년 9월 멸망했다. - P156

 당이 백제 고지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할 때부터 신라는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에 신라는 당과 연합을 유지한 채 차분히 고구려 멸망 이후를 대비했다. 668년 9월 왜와 교섭을 재개해배후의 위험 요소를 없애고 친당 세력을 숙청하며 백제 고지로 진격할 전략을 짰다. - P156

한편 당은 고구려 멸망 직후 기미지배정책을 수립했지만, 고구려 유민의 비협조와 저항으로 제대로 시행할 수 없었다. 이에 당은 고구려 유민들을선별해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인 유력자 2만 8,200호를 당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협조적인 유력자를 669년 기미주의 장관에 임명해 지배기반을 확충했다. - P156

이에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해 당군의남하를 막아내면서, 669년 백제 고지를 공략하는 양면전술을 폈다. 신라의선제공격으로 나당전쟁이 개시된 것이다.  - P157

보덕국 신라는 안승을 받아들여 ‘고구려 왕‘으로 책봉했다가 곧 ‘보덕국 왕‘으로 고쳤다. 신라의 "은덕을갚는다"는 뜻을 담은 명칭이다.
- P157

672년 사비성에 소부리주를 설치해 신라 영토임을공식 선언했다. 이는 신라까지 지배하려던 방침을 갖고 있던 당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 부흥군과 웅진도독부를 매개로전개되던 나당전쟁은 점차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 P157

신라가 치밀한 준비와 토번의 흥기라는 국제 정세에 힘입어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로써 한반도에서 수백 년 동안이어지던 삼국의 각축전이 끝나고 한반도 중남부 전체를 신라가 차지했다. - P158

9 토번 7세기 전반에 티베트 고원에서 건국해 842년까지 존속했다. 세력을 떨치며 당을 공격해 동아시아국제 정세에 영향을 끼쳤다. - P157

687년 돌궐이 부흥하고 696년 경 거란이 반기를 드는 가운데 당의 기미지배체제는 약화됐다. 그리고 당 중심의 국제질서가 유지되는 범위도 좁아졌다. 이에 고구려 유민들도 말갈족과 연합해 힘의 공백 지대인 동만주에서698년 발해를 건국했다.  - P159

결국 신라의 당군 축출은 당의 동방정책을 뒤흔들었을 뿐 아니라, 돌궐의 부흥과 발해 건국으로 이어지는 국제 정세 변동의 단초를 열었던 것이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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