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에 접어들면서 동북아의 국제 정세가 급변했다. 서진이 정치적 혼란을거듭하다가 무너지자, 흉노와 선비 등 주변 족속들이 북중국 각지에서 여러왕조를 세우며 흥망을 거듭하는 5호 16국 시대가 304년에 시작됐다. 이때 요동 지역에서는 선비족 모용부(慕容部)가 전연(燕, 337~370)을 세웠다. - P67
313~314년에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차례로 점령했다. 이로써 고조선 멸망 이후 400여 년간 지속된 중국 군현은 한반도에서 완전히사라졌다. 고구려는 비옥한 농경지대인 한반도 서북 지역을 차지해 경제 기반이 크게 확충됐다. - P67
아울러 고조선 이래 이 지역에 축적된 선진문화와 이지역에 살고 있던 엘리트층을 확보하면서 국가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 더욱이낙랑군과 대방군은 오랫동안 삼한 및 왜와 교역하는 데 중심 역할을 맡았는데, 고구려는 이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한반도 중남부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됐다. 고구려와 한반도 중남부 국가가 직접 경계를 맞대고 각축을 벌이거나 교섭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 P67
전연의 모용왕은 용성(龍城, 랴오닝성 차오양)을 도읍으로 삼고 중원 진출을 도모했는데, 342년 중원 공략에 앞서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이때 고구려는 모용황의 전략을 간파하지 못해 도성인 국내성이 함락됐다. 전연군은 고국원왕(故國原王, ?~371)의 부왕인 미천왕릉을 파헤쳐 시신을 탈취하고, 왕모와 왕비등 주민 5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철군했다. 도성이 큰 피해를 입자 고국원왕은 수도를 평양 동황성으로 잠시 옮겼다. - P68
369년 9월 고구려 고국원왕은 직접 백제를 공격했다. 삼국의 각축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 고구려는 백제의 역공을 받아 치양(황해도 배천)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고구려가 성급하게 정예병 일부만 동원해 백제를 공격하다가 그런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 P69
당시 백제는 마한 소국을 병합하며 국력을 크게 키웠을 뿐 아니라, 가야, 왜 등과 교섭하면서 한반도 서남해안을 거쳐 일본열도에 이르는 해상교역망을 주도했다. 이를 바탕으로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375)은 북방 진출을 노리고 있었는데, 마침 고구려가 선제공격을 해오자이를 물리친 것이다. - P69
이 무렵 북중국의 정세도 급변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공방전을 벌이던370년에 전진(前秦)‘이 전연을 멸망시키고 요동 지역까지 점령한 것이다. 고구려는 북중국 대륙을 장악한 전진과 우호관계를 맺고 계속 남진정책을 추진했다. 그렇지만 고구려는 371년 백제를 공격했다가 예성강 유역에서 크게패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근초고왕이 3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성까지 진격했는데, 고국원왕이 이를 막다가 전사했다. 고구려는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남진정책을 추진해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 P69
소수림왕(小獸林王, ?~384) 대에 불교 수용, 태학(太學) 설립, 율령(律令) 반포 등 일련의 개혁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이는 북중국에서 흥기한 5호의 여러 나라가 시행하던 정책이기도 했다. 불교 수용은 372년(소수림왕 2)에 이뤄졌다. - P69
태학도 372년에 설립됐다. 고구려는 3세기 말 이래 관등제와 지방제도등을 정비하며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갖춰갔는데, 국가 행정조직이 확대됨에 따라 실무 관원의 수요도 크게 늘어났다. 이에 태학을 통해 유교적 소양과행정 실무 능력을 겸비한 관원을 대거 양성하기 시작했다. - P70
율령 반포는국가 전체에 적용되는 일원적이고 통일된 법을 재정비해 널리 공표한 조치였다. 고구려는 중국 왕조의 율령을 자국 현실에 맞게 받아들여 새로운 국가운영 시스템을 구축했다. 소수림왕대의 개혁정책은 단순히 대외적 위기 때문에 추진한 것이 아니었다. 고구려는 3세기 이래 중앙집권화가 진전되면서국가 운영체제를 체계적으로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소수림왕대의개혁정책을 통해 국제 수준의 제도·문화·사상을 갖췄던 것이다 - P70
율령은 373년(소수림왕 3)에 반포했다. 율령은 국가체제 운영의 기본 틀로서 율(律)은 죄를 정하는 형법, 영(令)은 일반 행정규정인 교령법(敎令法)을가리킨다. 물론 그 전에도 고구려에 법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 P70
이 무렵 북중국의 정세가 다시 급변했다. 북중국을 잠시 통일했던 전진이 383년 동진을 정벌하려다가 비수(水)전투에서 대패하고 여러 나라로 분열됐다. 이에 전연의 후예인 모용수(慕容垂, 326~396)가 384년 북중국의 동쪽에서 훙언을 세웠지만, - P70
고구려는 한반도 중남부에서 백제를 견제할 상대를 찾았다. 마침 백제가 가야 및 왜와 관계를 강화하면서, 이들과 적대적이던 신라는 외교적으로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고구려는 신라를 끌어들여 백제를 견제했고, 377년과 382년에는 신라 사신을 대동해 전진에 외교사절을 파견하며 우호관계를 과시했다. 이로써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는 각각 고구려와 백제를 중심으로 하는 외교망이 형성됐다. - P70
4세기 말부터 고구려는 적극적으로 대외 정벌에 나서 남쪽으로 백제, 북서쪽으로 선비족 모용부의 후연 등과 경쟁하며 영토를 넓혀갔다. - P85
고구려는 광개토왕(廣開土王, 374~412)이 즉위한 뒤부터 백제에 대해 줄곧 군사적 우위를지켰다. 396년(광개토왕 6)‘에는 백제의 58 성(城) 700촌(村)을 공략하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포위해 아신왕(王, ?~405)에게 항복을 받아냈다. 당시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확보한 영역은 임진강 유역에서 한강 상류에 걸치는 지역이었다. - P85
백제전에서 거듭 승리한 광개토왕은 가야와 왜를 포함한 백제의 동맹세력을 제압해 한반도 정세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가야와 왜의 연합군에 시달리던 신라를 지원하기 위해 400년(광개토왕 10) 보병과 기병을 합쳐 5만에 이르는 대군을 한반도 남부로 출정시켰다. 이 전쟁으로 가야 소국을 이끌던 금관가야가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고구려는 신라에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 - P85
고구려는 한반도 남부에 관심을 기울이던 시기에 서북쪽의 후연과 본격적으로 대결하기 시작했다. 광개토왕은 395년(광개토왕 5)에 패려(禪麗)를정벌했다. 패려 정벌은 거란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후연을 공략할 수 있는 새로운 진출로를 개척한 것이었다. - P85
이렇게 하여 광개토왕대 고구려의 영역은 동쪽으로 두만강 하류 유역의 랴오허강, 북쪽으로 본래 부여의 중심지였던 북류 쑹화강 중류의 지린 일대, 서쪽으로는 랴오허강 서쪽 일부에 이르렀다. - P86
요하 상류 시라무렌 지역의 거란도 고구려 세력권에 편입됐다. 남쪽으로는 한강 중상류 지역을 차지했으며, 신라에 대해 종주국(宗主國)처럼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광개토왕대에 동북아시아 패자로서 영토적 기반과 세력권이 마련된 것이다. - P87
광개토왕릉비 탁본높이 6.39m의 비석 4면에 1,775 자의 글자를 새겼다. 고구려 건국신화, 광개토왕의 정복활동,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수묘인 규정 등을 기록했다. 가운데 부분에 "18세에 즉위하여 영락태왕이라 불렸다"는 구절이 보인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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