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단은 의주의 조선 관리들에게 입국을 허용해달라고 호소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행운은 안단을 외면한다. 공교롭게도 의주에는 마침 청나라 칙사들이 입국해 있었다. 의주부윤 조성보는 안단의사연을 칙사들에게 알렸고, 칙사들은 안단을 묶어 봉황성으로 압송해버린다. 참으로 허망한 결말이었다. 끌려가면서 안단은 절규했다. ‘고국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 왜 나를 죽을 곳으로 내모느냐?"고 말이다. - P5

38년 만에 탈출을 시도했던 안단은 어찌 되었을까? 십중팔구 처형되었을 것이다. 의주부윤 조성보는 이 불쌍한 궁조를 보듬어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 안단의 기막힌 사연을 떠올릴 때마다 병자호란이남긴 고통의 그림자가 길고도 길었음을 새삼 절감한다. - P5

15세기까지 명은 분명 동아시아의 패권국이자 ‘슈퍼 파워‘ 였다. 조선은 그런 명에 대하여 중화질서 속에서 국가의 위상을 유지할 수있었다. 하지만 16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의 질서는 흔들렸다. 명의쇠퇴 조짐이 확연해지고 일본이 신흥 강국으로 굴기했다. 일본은
‘명나라 정복‘을 내세우며 조선을 침략한다.  - P5

명을 위해 만주와 싸울 것인가? 만주가 뜨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여
‘중립‘을 지킬 것인가? 양단의 선택 앞에서 조선은 분열되었다. 1623년의 인조반정은 전자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망해가던 명‘을 선택한 직후인 1627 년 만주는 조선을 침략했다. 정묘호란이었다.전쟁을 감당할 수 없었던 조선은 만주와 ‘형제관계‘를 맺어 위기를 봉합한다. - P6

정묘호란 이후 명과의 전쟁에서연전연승하고 더욱 강해진 만주는 조선으로부터 명과 똑같은 대접을받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리고 1636년, 만주는 마침내 ‘제국‘이 되기로 결심한다. 나라 이름도 대청大淸으로 바꾸었다. 이윽고 조선이명을 의식하여 자신을 ‘제국‘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자 다시 침략했다. 병자호란이었다. - P6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 조선은 다시 분열되었다. ‘중화국 명을 섬기고 오랑캐 청에게 맞서는 것‘을 국시로 내세웠던 척화파
‘명을 위해 조선의 존망까지 걸 수는 없다‘고 했던 주간의논쟁이 격렬했다. - P7

그런데 분명한 것이 하나 있었다. 조선은 청의 침략을 감당할 역량이 없었 다는 사실이다. 병력의 수, 군사들의 훈련 상태와 전투 경험,
군량 등 군수 지원역량, 지휘관의 작전 능력과 책임감 등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요소 가운데 어느것 하나 청보다 나은 점이 없었다.  - P7

거기에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명 또한 조선을 도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청군의 침략에 수시로 유린되면서 자국을 지키기에도 급급했기때문이다. - P7

정묘호란을 겪은 1627년부터 병자호란을 다시 겪는 1636년까지는정말 중요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잃어버린 10년‘이 되고말았다.  - P7

가까운 장래에 중국이 미국에 버금가는 초강대국이 된다면? 또 그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고 사사건건 부딪힌다면? 그 와중에 일본이 ‘보통국가‘를 넘어 ‘자유롭게 전쟁할 수 있는 국가‘ 가 된다면? 여전히 ‘끼여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 P9

 떠오르는 거대 중국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는 피곤하다. 기존의 제국‘이 쇠퇴하고 ‘새로운 제국‘이 떠오르는 전환기마다 한반도는 늘 위기를 맞았다. 지혜롭게 대응하지 않는다면 ‘G2시대‘ 또한 예외일 수 없다. - P9

조카는 이날 숙부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올랐다. 이후 역사는 숙부또는 ‘주‘라고 기록했다. 쫓겨난임금‘, ‘어리석은 임금‘이라는 뜻이다. 조카는 일약 폐주가 저지른 난정을 바로잡은 중흥의 군주‘가 되고 능양군이 아닌 인조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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