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장이라는 자들은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하고 물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종교 전문가라는 자들은 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통치자들은 내게 도전했고,
예언자들은 바알 신을 전하면서, P허망한 꿈과 우둔한 계획에 지나지 않는 우상을 좇았다.
5-11 그래서 이제 내가 너희를 고발한다."
하나님의 포고다.
"너희와 너희 자녀와 너희 자손들을 고발한다. - P27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4-26그러고 나서 예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나와 함께 가려면 내가 가는 길을 따라야 한다. 결정은 내가 한다.
너희가 하는 것이 아니다. 고난을 피해 달아나지 말고, 오히려 고난을 끌어안아라.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면 내가 방법을 일러 주겠다. - P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e is our ever present source of comfort when everyone else hasabandoned us. - P48

Reminding ourselves of God‘s past faithfulness often gives us courage and hope to face new and uncertain circumstances.
- P48

 By removing our pretensesabout having control over our lives, we are able to arrive at a place ofhumble trust before Him.  - P49

God does not expect us to have our lives figured out, sorted out, or put together.
 He simply expects us to trust and follow Him with a heart of obedience.  - P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해군 (리커버 특별판. 표지 2종 중 랜덤 발송) -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결국 굉해는 정통성이라는 큰 굴레의 도전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도 그는 전쟁의 현장학습을 통해 본 것을 토대로 니름 준비는 했지만, 그의 발못을 잡고 있는 적통의 트라우마에는 전혀 손 한번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나름 장수하면서 생을 마감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농민반란군의 지도자인 이자성(오른쪽)은 1644년 북경을 함락시켜 명을 멸망시켰다. 명의 마지막황제 숭정제는 목을 매 자살한다. 왼쪽사진은 베이징 경산공원내 숭정제가 자살한곳에 세워진 비석이다. 이자성은 대국(大國)의 건국을 선포했으나 곧 바로 오삼계가 불러들인 청군에 의해 축출되었다. 명은 결국 스스로 무너졌고 청은 그 와중에 어부지리를 얻었던 셈이다. - P189

자연히 민심은 돌아서고 조직적인 반란이 전국을 휩쓸었다. 반란 가문제는 수십만 명이 참가하여 십수 년 이상 지속된 것도 있었다. 명 왕조를 끝장낸 주인공이 사실은 누르하치의 군대가 아니라 농민군의 지도자인 이자성(成)이었던 것을 보면, 반란세력의 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밖에서 누르하치를 막는 와중에 안에서는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그야말로 내우외환‘이었다. 요컨대 명은 스스로 무너지고있었고 누르하치는 이를 촉진시켰던 것이다. - P190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인 1592년 4월 28일 창덕궁을 나와 피난길에 올랐다. 그는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옮겨가 머물다가 이듬해인 1593년 10월에야 서울로 돌아와 정릉동 행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들어갔다. 자그마치1년 6개월 동안이나 궁궐 밖에서 ‘외박‘을 한 셈이다. - P192

열 사람이 멀리서 보는 것은 한 사람이 직접 본 것만 못한 법이 굉안도 내지의 사정은 내가 일찍이 직접 보았소 피난길에 보아서 그런지국경 지방인 평안도 사정에 대해 밝다는 것을 자신 있게 드러내고 있다. 이 같은 그의 경험은 신중하고도 유화적인 대누르하치 정책을 펴나가는데 바탕이 되었다. - P194

그들은 보통의 오랑캐와는 다릅니다. 그들 기마병단의 위력은 일본군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조선도 이제 그들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할 것입니다.
명군 지휘관들이 선조를 만났을 때 전한 누르하치에 대한 이야기는대체로 이런 내용이었다. - P193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다고 했던가? 말로만 듣던 ‘북로남왜‘가 실감나는 대목이었다 - P193

조선이 ‘오랑캐 국가‘에 솔선해서 사자를 보낸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 대마도의 공작에 놀아나 마지못해 일본에 통신사를 보냈던 것과 비교하면 영 딴판이었다. 조선은 세종대 신숙주가 일본을 다녀온 뒤로 임진왜란을 당할 때까지 일본에 사신을 보낸적이 없었다. 거의 150년간의 공백이었다. 그동안 일본은 왕조가 바뀌고전국시대를 맞는 등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를 겪었다. 무신경한 조선은 일본의 그 같은 정세 변화를 파악하는 데 소홀했다. - P196

시간이 지나면서 대마도는 조선 사정에 밝은 인력들로 넘쳐났다. 이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킬 때 소중한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조선말통역을 맡아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어출전했고, 조선 땅에서 일본군의 전진을 이끄는 향도구실을 했다. - P196

조선은 1590년 일본에 통신사를 보냈지만 전쟁을 막아내지도, 변변한 준비도 못했다. 각기 소속당파가 달랐던 정사황윤길(黃允吉, 서인), 부사 김성일(남인), 서장관 허성(인) 등으로 이루어진 사절단은 당색만큼이나 개성도 달랐다. 돌아와서 선조에게 보고한 내용도 제각각이었다. - P196

그런데 이번만은 달랐다. 선조는 일본과 전쟁을 치르느라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솔선해서 사자를 누르하치에게 보냈던 것이다. 과거의 실패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왜란을 통해 뜨거운 맛‘을 보았기 때문일까? 어쨌든 선조는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전략가이자 군사 전문가로 변신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 P197

광해군이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에 취했던 대응책은 기본적으로 기미책(摩策)이었다. ‘기‘는 말의 얼굴에 씌우는 굴레를, ‘미‘는 소를 붙잡아 매는 고삐를 뜻한다.  - P198

하는 것이다. 오랑캐를 다독거려 온다고하면 막지 않고, 간다고하면 잡지 않는 소극적인 현상유지책이라고 할 수 있다. ‘미개하고 사나운 오랑캐에게 의리와 명분을 얘기해봐야 ‘쇠귀에 경읽기‘이므로 잘 구슬려 평화를 유지하자는 심산이었다. - P198

그런데 방어 대책을 세우려면 적을 알아야 했다. 광해군이 명청 교체기에 취한 외교적 대응책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정보 수집을 위한노력이었다. - P199

누르하치 집단에 관한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때로는 신료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619년(광해군 11) 명을 돕기 위해 출전했다가항복하고 포로가 되어 후금에 억류되었던 강홍립(姜弘立)을 처리하는 문제는 조선에게 실로 ‘뜨거운감자‘였다.  - P199

두 나라 사이에서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더라도 그 사이에 사자초)는 항상왕래해야 한다.
광해군이 지녔던 외교적 신념이었다. 아무리 적대적인 상대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핫라인 만큼은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 P200

당시 누르하치 집단의 첩보 능력은 조선이나 명보다 한수 위였다.
유목민족의 후예로서 항상적인 생산기반이 없이 농경민족을 약탈하여생존을 꾸려왔던 그들에게 첩보능력은 곧 생존을 위한 무기였다. 언제,
어디에 무엇이 있는가를 정확히 알아야만약탈도 할수 있는 법이다.
건주여진은 간첩활동에 가장 뛰어나서 그 내용자들 때문에 아무리견고한 성이라도 앉아서 무너진다. - P201

무기를 제작하고 확보하는 데 기울인 노력도 각별했다. 특히 누르하치 기마병들의 돌격을 막는 데는 화포가 제일이라는 인식 아래, 그것을제작하고 사격술을 연마하는 데 노력했다.
당시 명나라 사람들은 누르하치의 기마병을 철기(鐵騎)‘라고 불렀다. ‘강철 같은 기마대라는 뜻이다. - P203

화포의 중요성을 절감한 광해군은 1613년(광해군 5) 기존의 조총(鳥화기도감(都監)으로 확대 개편한 뒤 다른 비용을 줄여가면서 파진포 등 각종 화포를 생산하게 했다. - P203

화포와 화약뿐 아니라 활과 화살, 창검 등 재래식 무기의 제작과 확보에 기울인 노력도 각별했다. 군기시(軍器寺, 병기를 제작하는 관청)와 훈련도감에 일러 활과 화살, 창검, 조총 등을 날짜별로 할당량을 정해 제작하라고 지시했다.
우수한 장수와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는 데도 힘썼다. 왜란 중 의병장으로 용맹을 떨쳤던 곽재우를 발탁하여 북병사(兵使)로 올려 보내고,
변방 수령의 대부분을 무인으로 임명했다. - P205

 서북방의 후금과 동남방의 일본, 이른바 북로남왜(北虞南倭)로부터 협공당하는 시대적, 지정학적 현실을 인식했던 그가 조정 내외의 비판을 물리치고 일본과의 국교재개를 택한 것은 고민 끝에 선택한 고육책이었다. 나아가 왜란 직후 광해군 시대의 국가 목표가 무엇보다 ‘생존‘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 P206

1618년 누르하치는 명에 대해 일곱 가지의 원한을 토로한 뒤 정치경제적 요충인 무순(撫順)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무순의 함락이 명에 준충격은 엄청났다.  - P208

 명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은 ‘순이順)‘였다. 명에 대해 고분고분한 오랑캐‘라는 뜻이다. 누르하치는 말할 것도 없이 ‘역(逆夷)‘였다. 명에 대해 고분고분하지 않을뿐더러 대놓고 덤비고 있었다.  - P209

그러니 ‘순이‘를 이용하여 ‘역이‘를 쳐야 한다는 발상이자연스레 대두되었다.
‘순이‘는 조선 말고 또 있었다. 누르하치에게 밀려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던 해서여진(海西眞)의 예혜(부족이 그들이었다.  - P2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