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내러티브를 계속 진행하기 전에 이어 나오는 장들을 꿰어 줄 주제가설정되는 배경을 묘사한다. 불길하게도 우리는 맨 먼저 "솔로몬이 애굽의 왕바로와 더불어 혼인 관계를 맺어 그의 딸을 맞이하고 다윗 성에 데려다가두고"(1절)라는 말씀을 듣는다. 저자는 정치 경제 요인에는 관심이 없다.  - P83

 열왕기는 신명기와 많은 부분 연결되어 있다. 신명기에서 이집트는 압제자로, 그곳에서 야웨가 그분의 백성을 구해 내셨다. 왕은이집트와 교역하라고 권장해서는 안 되었지만(신 17:16), 이제는 그 최대 적이었던 이집트가 주요 동맹국이 되었다.  - P83

뒤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해안으로 가는 길에 자리잡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가나안 성읍 가운데 하나인 게셀을 바로가 탈취하여 "자기 딸에게 예물로 주었더니"(9:16)라는 구절을 볼수 있다. "충격적인 역할의 전환이다. 이스라엘의 정복을 완료하려고 이집트의 바로에게 의지한 이스라엘 왕이라니 더 중요한 것은 그 표현이 결혼 관계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의 딸‘은 솔로몬 내러티브에서 중요한 자리에 나온다(7:8: 9:16, 24 11:1; 아래에서 더 자세한 해설을 보라).  - P83

솔로몬이 그에게 영향을 미친 이방인 아내와 결혼한 일은 그의 생애 후반에만 있었던 일이아니라(설교자들이 11:1-2을 해설하며 종종 말하듯이), 생애 초반부터 있었던 일로 우리의 관심을 끈다. - P84

솔로몬의 실패와 그 초기의 싹은 ‘사랑‘(abab)에 특이한 단어를 선택한 데서 암시되어 있는 것 같다. 이 단어는 열왕기에서는 유일하게 솔로몬 내러티브에만 나오며, 사무엘서와 열왕기 전체에서 ‘야웨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모든 경우 중에서 오로지 이곳에만 나온다. 여기서 ‘사랑‘은 야훼를 향해 있지만, "그 단어가 열왕기상 11장(1절과 2절)에서 두 번, 다시나올 때에는 솔로몬의 다른 큰 ‘사랑‘과 관련하여나온다. 그것은 이방 여인들을 향한 사랑으로, 바로의 딸이 그중 하나였다…[하나님에 대한 이 사랑이 사실 얼마나 깨지기 쉬운지 밝혀진다. - P85

성경 내러티브를 읽을 때, 전반적인 구조와 목적을 놓친 채 동떨어진 하나의이야기로 읽기 쉽다. 훌륭한 문학 작품과 드라마는 더 미묘하긴 하지만, 현대의 이야기들은 보통 한두 개의 우회로를 둔 채로, 절정과 갈등 해결까지 일직선으로 나아간다. 반면 히브리 문학은 보통 자료를 어떤 ‘틀‘로(즉 한 단위의시작과 끝을 비슷한 주제나 표현으로) 정리한다. 그 틀 안의 단락들은 서로 병행되는데, 때로는 중앙 단락을 중심으로 순서가 거꾸로 병행하는 형태를 이룬다. 교차 대구 구조는 독자들에게 개별 단락들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면서 전체를 보라고 권한다.  - P85

‘교차 대구법‘ (chiasm)은 헬라어 알파벳 ‘카이‘(x)의 교차 모양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 구성 요소들의 개수와 상관없이 그 형태는 A-B-C-C -B - 이거나, 중심을 둔 A-B-C-B -A 형태다. P.
Overland, "Chiasm", DOTWPW, pp. 54-57. - P85

그는 야웨께서 그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신 사실은 찬양과 기도를 통해 인정하지만, 정치 영역에서는 결혼 동맹과 ‘바로의 딸‘에게 중요성을 주어,구원을 삶으로 드러내는 데는 실패했음을 보여 준다. 타협은 혼합주의라는결과를 낳는다 (11장).
- P87

바빌론에 유배되어 있는 이들은 후에 솔로몬의 황금기를 갈망하며 성전건축을 회고한다. 그의 지혜는 열왕기뿐 아니라 잠언에서도 존경을 받는다.
열왕기 저자는 솔로몬 이야기를 서술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랬지, 성전은 참으로 아름다웠지." (아주 자세히 서술하며)
"그랬지, 솔로몬의 부와 지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 (경탄하며 이야기들을하며 "그러나.."
- P87

그는 우리에게 표면 아래를 보라고 권한다. 거기에는 지혜와 부, 심지어아주 아름다운 예배당을 짓는 일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다이면 멸망이 뒤따를 것이다. 야웨의 말씀과 함께 솔로몬이 지혜와 부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기술을 전략적으로 배치한 것은 후대 독자들에게 자기 비출 거울을 주기 위함이다. 솔로몬은 통치자에게 기대되는 모든 행동을 했다.
- P88

그러나 성전을 짓는 데 성공하고 활발한 예배를 드렸음에도 삶의 다른 영역에서는 야훼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다. 내러티브는 무엇이 선한지, 무엇이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실패를 야기하는지숙고하게 해 준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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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은 정말 폭군이었다‘ 알려진 결과보다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비춰져서 각인되어 만들어진
어느새 내 지식속에 자리잡은 돌덩어리보다는

원인,과정의 모습을 잔잔히 들여다보면서
역사는 디테일에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살포시 하게 됩니다.

연산의 성정
연산의 MBTI
사사되어 죽은 어머니
거대해진 삼사

연산의 미친광이 행적의 조각을 하나씩
맞춰가 봅니다.

곧 광란의 죽음 페스티벌의 트리거를
연산은 당길 것 같다.
,
뮈든지 한번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생각을 휠씬 뛰어 넘는
가속도가 붙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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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루된 대상은 내관과 봉보부인이었다. 먼저연산군 2년 1월 12일(신묘) 대간은 상전김효강金孝江이 내수시에서 유점사와 낙산사에 소금을 내려주는 문제를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국왕에게 보고한 것은 매우 잘못된 일로서 내관이 권력을부리는 행위라고 강력히 탄핵했다 - P102

그 과정에서 김효강의 죄목은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가 경기도 광주의 봉안역에 소속된 노비를 역시 승정원에 보고하지 않고 내수사에 소속시켰다는 것이었다(2.9.20계해) - P102

이런 과정이 보여주듯이, 김효강과 관련된 사건은 1년여 간 진행된것이었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논계가 올라왔음을 감안하면, 삼사의 주장은 수백 회에 이를 것이다. 대간 스스로도 환관한 사람이 개입된이 일로 작년 9월부터 지금까지 다섯 달 동안 직무를 접어둔 채 상소하고 있다고 시인할 정도였다(3.1.8경술)  - P103

대간은 환관 조 때문에 멸망한 중국의 진을 선례로 들면서 그런 조짐을 시초부터 막으려는 의도라고 그 까닭을 설명했다(2.11.12갑신). 이런 그들의 의도는 충분히 수긍할 만하지만, 그들의 말대로 이 사안이 그렇게 오랫동안 직무를 폐기한 채 집중해야 할 만큼 중대한 것인가 하는 데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어쨌든 삼사는 국왕을 지근에서 모시는 내시의 독단적 일처리를 오랫동안 집요하게 탄핵한 결과 상당한 성과를 올린 것이었다. - P103

다음으로 논란이 된 사안은 봉보부인의 포상을 둘러싼 문제였다. 봉보부인은 국왕의 유모로 내명부의 종1품직이었다. 이런 높은 품계도 중요했지만, 그 임무상 그는 국왕과의 친밀도가 특히 높았을 것이다.  - P103

연산군은 재위 2년 2월 6일(인) 자신의 봉보부인 최씨와 상궁 보배제에게 각각 노비 7명과 6명을 하사했다. 또 한 달 뒤에는 최씨의 6~7촌 친족 중에서 공·사천이던 62명을 종량하고 국역을 면제시켜주었다(2.3.2경진). 그러나 이것은 성종이 자신의 봉보부인에게 그 동생2 명만을 종량시켜주고, 예종도 4촌에 국한해 27명을 종량해준 것과 비교하면 분명히 과도한 조처였다(2.3.3신사. 8병술).
- P104

삼사는 즉각 반대했으며, 의정부도 그 대상이 너무 많다는 데 동의했다(2.3.9 정해 - 12경인), 연산군은 선례가 있다면서 고집했지만, 결국 6명만을 종량하고 24명을 사천에서 공천으로 변경시켰으며 10명에게는 포로 신공을 납부하도록 혜택을 축소시켰다. 그러나 삼사는 그래도혜택이 크다고 반대했고 의정부도 계속 동의했다 - P104

삼사의 논거는 국왕이 사사로운 은혜를 남발한다는 것이었다. 연산군은 국왕이 일회적인 특은 내릴 수 없냐면서, 이렇게일마다 막는다면 장차 임금을 아무 행동도 못 하게 만들어 신하들이 스스로 사무를 처리하려는 의도라고 진노했다(2.3.19 정유),  - P104

그러나 결국 연산군은 봉보부인에게 주었던 작첩과 녹봉은 물론 친족의 종량도 모두 철회하고 말았다(2.4.25인), 이번에는 의정부도 동참했다는 차이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문제에서도 국왕의 의지는 삼사의 반대로 두 달여 만에 대부분 무산된 것이었다.  - P104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와 관련된 비극적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즉위한 지 넉 달 만의 일이었다. 윤씨가 세상을 떠난 지(성종 13년 8월) 14년 만이었다. 즉 그동안 그 사건은 왕실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금기의 하나였던 것이다. - P105

윤씨는 왕비로 책봉되기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아뢰었다. 연산군은 비로소 윤씨가 죄로 폐위되어 사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 수라 들지 않았다는 짧은 기록은 18세였던 국왕의 충격과 비통을 깊를게 비춰준다.
- P105

연산군이 즉시 폐모의 추숭에 착수한 것은 충분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자신의영원히 고치지 말라는 성종의 엄중한 당부를 생각하면, 그 과정은 순탄치 않을 것이었다.  - P105

우연하게도 이때 연산군은 자신의 의도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신하를 만났다. 그 달 20일(갑술) 전 창원부사 조지서가 폐비의 추숭을건의한 것이었다. 조지서는 연산군의 세자 시절 시강관이었는데 성종22.3.13기), 그런 연유로 국왕의 의중을 잘 헤아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 P105

연산군이 강력한 의지로 추진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던 추사폐비 사당의이업은 그러나 다시 삼사의 반대에 부딪혔다. 정언권이전을 담당하는 당상과 낭청은 성종의 삼년상이 끝난 뒤에 임명해도늦지 않는다고 지적한 것이다(2.5.6임자), 연산군은 다시 한번 대노했다. - P107

대간의 말이라도 들을 만해야 듣는 것이지 모두 따를 수는 없다. 요즘 대간의 형세를 보면 들어줄 수 없는 일이라도 그만두지 않고 강력히 말하며, 주청한 대로 되지 않으면 반드시 내가 간언을 거부한다고 말한다. 내가 즉위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매번 언로가 막혔다고 말하니, 정언 한 사람을 국문하면 언관의 입에 재갈을 채웠다고 사람들이 말할는지 모르겠다.
- P108

대간도 신하인데, 임금이 자신의 말을 모두 따르게 하려고 힘쓰는 것이 옳은가. 그렇다면 권력이 위에 있지 않고 대간에 있는 것이다. 발언을 막는폐단을 권력이 대간에게 귀속되는 근심과 견주면 그 경중이 어떠한가. 나는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 원인은 권력이 아래로 옮겨가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권균의 저의는 국문하지 않을 수 없다(2.5.6임자).  - P108

삼사와 대신의 의견은 갈렸다. 홍문관과 대간은 묘소를 옮기는 데는.
동의했지만 의전을 격상시켜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즉 천장을 관장하는 관서를 도감으로 부르고, 빈의 의례에 따라 석수 · 신주 · 사당 등을 설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예문관봉교 권달수는 연산군이 선왕의 유교를 어기고 비례로 폐비를 높이며, 모후를 성심으로 섬기지 못하고 대간을 존중하지 않는 네 가지 잘못을 한꺼번에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왕이 윤허하지 않자 이번에도 그들은 석 달 넘게 탄원하고 사직했다. - P109

그러나 대신들의 의견은 달랐다. 그들도 폐비가 성종에게 죄를 지었고 성종의 유교도 매우 엄격하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천륜인 모자의정리를 저버릴 수는 없다면서 대의 사은 모두 완전케 해야한다는 절충적인 태도를 보였다(2.4.4신사), 즉 대신들은 일정한 범위의 추승은 현실적으로 타당하다는 데 동의한 것이다. 그런 의견을 가장 적극적으로 개진해 삼사와 충돌한 사람은, 앞서도 언급한 바 있는 전 영의정노사신이었다. 그는 성종의 유교를 다시 해석해야 한다는 상당히 파격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 P109

요컨대 연산군 초반 폐모를 추숭하고 그 친족을 다시 우대하는 시책은 삼사의 치열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있다. 그럴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안의 성격상 연산군이 매우강력한 의지를 보였으며, 대신들도 대체로 협조적이기 때문이었다.  - P111

물론 그 뒤 이 사건은 그 책임의 소재를 추궁하면서 대신과 삼사를 포함한신하 대부분을 처단하는 거대한 숙청의 구실로 작용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시점에서 유의할 사항은 연산군 초반의 폐모 추숭 작업 또한 국왕 · 대신이 협력하고 삼사가 그들과 대립하는 구도 안에서 진행되었으며, 그런 구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 P111

연산군대 대신과 삼사의 충돌 또한 출발부터 대단히 빈번하고 격렬했다. 앞서 유생이나 외척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대신과 삼사는 직간접적으로 대립했지만, 몇 개의 사안을 거치면서 그 범위와 충돌의 수준은점차 확장되었다. 그런 과정의 첫 귀결은 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였다. - P111

여느 상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식적인 내용으로 구성된 이 상소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두 가지였다. 우선 기강의 진작과 관련해서 그는 각관청의 제조를 모두 없애 육조에 분속시키고 해마다 대간을 지방에파견해 행정을 감찰케 하자고 건의했다. 이것은 광범한 부서의 최고직을 겸임하면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대신들의 권한을 줄이고대간의 감찰 기능을 확대하려는 시도였다. - P113

 그러나 연산군은 "대간이가두자면 가두고 놓아주자고 해서 놓아주면 권세가 대간에 있는 것"이라면서 단호히 거부했다(1.11.20기해 · 25갑진). 이때의 사태는 일단 이렇게마무리되었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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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보듯이 이런 노사신의 강경한 태도는 여러 사안에 동일하게나타나면서 연산군 초반의 중요한 쟁점이 되었지만, 이때는 특히 유생들의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생원 조형이 앞장선 유생들은 노사신이 세조대부터 불교를 좋아했다면서 중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1.2병술 · 4무자),  - P96

삼사와 유생들의 반대에는 배불이라는 타당한 사상적 논거가 있었지만, 왕명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연산군은 그런 측면을 정확히 파악했다. 그는 일단 유생들에게 처벌의 초점을맞췄는데, 거기에는 즉위 직후부터 삼사를 직접 처벌하기는 부담스럽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 P96

그러나 사안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삼사와 유생이 왕명에 저항하고 일부 대신들이 그런 행동을 강하게 비판했다는 현상은 또렷하게표출되었다. 이런 징후는 그 뒤 외척의 임용과 포상, 내관의 전횡, 봉보부인奉保夫人에 대한 우대 등 국왕의 권한이나 사적인 측근과 연관된 다양한 사안과 매개되면서 좀더 폭넓게 나타났다. - P97

5월에는 국왕의 처남인 신수근의 임명이 문제되었다. 당시 신수근은 국왕이 가부를 결재할 일이 있으면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자문했기 때문에 왕명이 그에게서 나온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총애받던 인물이었다(1.1.7신),  - P98

가장 대표적으로 지적된 인물은 윤은로尹殷老·윤탕로 형제와 서릉군西陵君한치례韓致禮였다. 먼저 훈련원부정訓鍊院副(종3품)이었던 윤탕로는 연산군 1년 4월 10일(계해 성종의 곡을마치기도 전에 기생집에 출입해 관계했다는 이유로 삼사의 탄핵을 받았다. 42 삼사는 석 달 넘게 윤탕로의 국문을 강력히 요청했다(1.4.28 신사: 1.5.7기축.24 병오.25 정미: 1.6.6정사 · 7무 · 12계해 -13 갑자. 15병인~21임인).
- P99

연산군은 "윤탕로의 추국을 윤허하지 않는다는 단자를 네 번이나내려보냈는데도 따르지 않으니 이것은 나를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것"
이라면서 분노했다(1.6.29경진). 연산군이 윤탕로의 국문을 허락하지 않은까닭은 그가 대비(정희왕후)의 동생이므로 그를 국문하면 대비의 마음을아프게 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1.7.1 임오). - P99

서술에서도 부분적으로 비쳤지만, 지금까지 문제된 사람들은 대간의 지적대로 대부분 외척이라는 특징을 공유했다(1.4.28신사).  이철견은세조비 정희왕후의 조카(그의 어머니가 정희왕후의 동생)였고, 윤탄은 성종비 정현왕후의 숙부(정현왕후의 아버지 윤호의 동생)였다.  - P100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이었고, 윤은로 · 윤탕로는 성종의 처남(정현왕후의 오빠와 동생)이었으며, 한치례는 소혜왕후의 동생이었다. 그러므로 삼사는 외척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주어진 인사상의 특혜와 포상에 반대한다는 합당한 논거를 가졌던 것이다.
- P101

그러나 국왕의 입장에서 보면 삼사의 이런 언론은 즉위 직후부터 왕권을 제약하는 것이 분명했다. 더욱이 삼사가 비판한 대상이 자신과 사적인 친밀도가 높은 외척들이었기 때문에 국왕의 불쾌감은 더욱 컸을것이다.  - P101

삼사의 언론활동에는 중요한 특징이 또 하나 있었다. 나중에 좀더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그것은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짧게는 두 달부터 길게는 1년까지 끈질기게 지속되었으며, 국왕이 일정한 타협안을 제시하거나 부분적으로 요구를 수용해도 자신들의 궁극적인 목표를 완전하게 관철시키려고 시도했다는 것이었다.  - P101

왕권의 자유로운 행사에 남다른 관심과 의지를 지니고 있던 국왕에게는더욱 심각한 폐해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일부 대신들도 국왕의 그런 판단에 공감했으며, 앞서 말했듯이 그들은 그것을 ‘상‘으로 규정했다.
삼사에 대한 국왕과 대신의 그런 문제의식은 몇 개의 사건을 거치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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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것을 상대에게 양보해도 모든 좋은 것의 진정한 원천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좋은 것이 되실 것이다. 아브람에게 나타나신하나님은 아브람이 종으로 횡으로 걷는 모든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아브람의 나그네 걸음걸음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실 땅을 결정한다. 우리가 걸어가는 나그네 세월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풍성함의 원천이 된다. - P165

14장 13절은 아브람을 ‘히브리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구약에서이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강 건너온 사람‘이라는 뜻이며, 옮겨온 사람, 이주민, 떠돌아다니는 사람 등을 의미한다. 아울러 구약성경에서 대부분 이방민족과 연관된 맥락에서
‘히브리 사람‘을 언급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표현은 아브람이 그 지역 사람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외국인임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 P166

그런 점에서 약속의 자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것은, 다른 이의 고통을 보고 가만히 그 자리에 눌러앉지 않는다는의미다. - P168

창세기 14장 15-16절은 아브람이 마침내 단 인근 지역에서 옷을끌고 가던 군대를 만났고 밤을 타서 습격하여 구출했다고 간결하게 서술한다. 아브람은 롯을 구출하였을 뿐 아니라, ‘부녀와 친척도 되찾아왔다(창 14:16). 아마 이 사람들은 롯과 함께 잡혀가던 소돔 사람들이었을것이다(개역개정이 ‘친척‘으로 옮긴 히브리어의 기본 뜻은 ‘백성‘ 혹은 ‘사람들‘이다). 나중에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감사하면서 "사람은 내게 보내고" (창 14:21) 하고 말한 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 P168

하나님의사람의 순종과 용기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열방에까지 미친다. 아브람이 잡혀간 롯을 나 몰라라 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에게주신 모든 것을 이때를 위한 것이라 여기고 투입하여 뛰어들었을 때, 롯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삶을 회복할 수 있었다.  - P169

아브람은 참으로 쩨다카, 즉 공의를 행했다. 부당하게 포로로 끌려간 이들을 구출해냈다는 점에서 미슈파트, 즉 정의를 실행하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아브람이 정의와 공의를 행할 때, 열방에게 복이 임하였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신 목적을 수행하였다. - P169

아브람의 모습과 대조할 수 있는 것은 아브람의 형제 나홀이다.
창세기 24장 10절은 밧단아람에 있는 ‘나홀의 성‘이라 불리는 장소를언급한다. 나홀 역시 데라와 함께, 혹은 데라가 떠난 후에 갈대아 땅을떠났다가 밧단아람에 있는 하란에 머무른듯하다. 나홀이 머무르면서영향력이 커졌기에 그곳이 ‘나홀의 성‘이라 불리었을 것이다.  - P169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가나안까지 가서 평생을 땅 없이 떠돌았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비해, 하란에 정착해서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성까지 이룬 나홀의 성취는 두드러진다. 그런 점에서, 가나안의 아브람과나홀의 성에 거주하는 나홀은 대조적이다.  - P169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아직 그의 이름은 ‘아브람‘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는 사건이 아브라함의 삶에서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말한다(창 17:1-8). 우리는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이름이바뀌면서 육적인 사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하기도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브람일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순종했다. 이름이 아브람이든 아브라함이든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  - P170

이름의 변화는 아브라함의 인격과 삶의 변화라기보다는 하나님이주신 약속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라와 아브라함 사이에 여전히 자녀가 없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열국의 아비‘라는 이름을지어주시면서 믿음으로 바라볼 것을 알려주신다. 그러니 ‘아브라함‘은약속이 담긴 이름이고, 이름이 아브람이든 아브라함이든 그는 오직 하나님과 동행할 뿐이다. - P170

 나그네들에게 발을 씻게 하고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보면 아브라함은 이들을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
나그네를 천사나 하나님의 사자라고 여겼다기보다는, ‘나그네는 하나님의 사자‘라는 인식이 아브라함의 행동 이면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P171

환대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와 무관하게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온 나그네들은 마치 그곳이 원래 자기 자리인 것처럼 환대를 받았다. - P172

모세는 특이하게도 하나님의 높고 뛰어나심을 외모나 뇌물에 좌우되지 않으심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심과 연결한다. 신명기는 결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명령한다(신10:19). 크고 높으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나그네에 대한 사랑으로 결론짓는다. 하나님이 나그네인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으니,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본받는 삶의 본질이다.  - P173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나그네에 대한 환대는 아브라함과 롯에게서 잘 드러난다. 히브리서도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한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 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너희도 함께 갇힌 것같이 너희 갇힌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히 13:1-3).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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