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루된 대상은 내관과 봉보부인이었다. 먼저연산군 2년 1월 12일(신묘) 대간은 상전김효강金孝江이 내수시에서 유점사와 낙산사에 소금을 내려주는 문제를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국왕에게 보고한 것은 매우 잘못된 일로서 내관이 권력을부리는 행위라고 강력히 탄핵했다 - P102

그 과정에서 김효강의 죄목은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가 경기도 광주의 봉안역에 소속된 노비를 역시 승정원에 보고하지 않고 내수사에 소속시켰다는 것이었다(2.9.20계해) - P102

이런 과정이 보여주듯이, 김효강과 관련된 사건은 1년여 간 진행된것이었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논계가 올라왔음을 감안하면, 삼사의 주장은 수백 회에 이를 것이다. 대간 스스로도 환관한 사람이 개입된이 일로 작년 9월부터 지금까지 다섯 달 동안 직무를 접어둔 채 상소하고 있다고 시인할 정도였다(3.1.8경술)  - P103

대간은 환관 조 때문에 멸망한 중국의 진을 선례로 들면서 그런 조짐을 시초부터 막으려는 의도라고 그 까닭을 설명했다(2.11.12갑신). 이런 그들의 의도는 충분히 수긍할 만하지만, 그들의 말대로 이 사안이 그렇게 오랫동안 직무를 폐기한 채 집중해야 할 만큼 중대한 것인가 하는 데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어쨌든 삼사는 국왕을 지근에서 모시는 내시의 독단적 일처리를 오랫동안 집요하게 탄핵한 결과 상당한 성과를 올린 것이었다. - P103

다음으로 논란이 된 사안은 봉보부인의 포상을 둘러싼 문제였다. 봉보부인은 국왕의 유모로 내명부의 종1품직이었다. 이런 높은 품계도 중요했지만, 그 임무상 그는 국왕과의 친밀도가 특히 높았을 것이다.  - P103

연산군은 재위 2년 2월 6일(인) 자신의 봉보부인 최씨와 상궁 보배제에게 각각 노비 7명과 6명을 하사했다. 또 한 달 뒤에는 최씨의 6~7촌 친족 중에서 공·사천이던 62명을 종량하고 국역을 면제시켜주었다(2.3.2경진). 그러나 이것은 성종이 자신의 봉보부인에게 그 동생2 명만을 종량시켜주고, 예종도 4촌에 국한해 27명을 종량해준 것과 비교하면 분명히 과도한 조처였다(2.3.3신사. 8병술).
- P104

삼사는 즉각 반대했으며, 의정부도 그 대상이 너무 많다는 데 동의했다(2.3.9 정해 - 12경인), 연산군은 선례가 있다면서 고집했지만, 결국 6명만을 종량하고 24명을 사천에서 공천으로 변경시켰으며 10명에게는 포로 신공을 납부하도록 혜택을 축소시켰다. 그러나 삼사는 그래도혜택이 크다고 반대했고 의정부도 계속 동의했다 - P104

삼사의 논거는 국왕이 사사로운 은혜를 남발한다는 것이었다. 연산군은 국왕이 일회적인 특은 내릴 수 없냐면서, 이렇게일마다 막는다면 장차 임금을 아무 행동도 못 하게 만들어 신하들이 스스로 사무를 처리하려는 의도라고 진노했다(2.3.19 정유),  - P104

그러나 결국 연산군은 봉보부인에게 주었던 작첩과 녹봉은 물론 친족의 종량도 모두 철회하고 말았다(2.4.25인), 이번에는 의정부도 동참했다는 차이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문제에서도 국왕의 의지는 삼사의 반대로 두 달여 만에 대부분 무산된 것이었다.  - P104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와 관련된 비극적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즉위한 지 넉 달 만의 일이었다. 윤씨가 세상을 떠난 지(성종 13년 8월) 14년 만이었다. 즉 그동안 그 사건은 왕실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금기의 하나였던 것이다. - P105

윤씨는 왕비로 책봉되기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아뢰었다. 연산군은 비로소 윤씨가 죄로 폐위되어 사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 수라 들지 않았다는 짧은 기록은 18세였던 국왕의 충격과 비통을 깊를게 비춰준다.
- P105

연산군이 즉시 폐모의 추숭에 착수한 것은 충분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자신의영원히 고치지 말라는 성종의 엄중한 당부를 생각하면, 그 과정은 순탄치 않을 것이었다.  - P105

우연하게도 이때 연산군은 자신의 의도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신하를 만났다. 그 달 20일(갑술) 전 창원부사 조지서가 폐비의 추숭을건의한 것이었다. 조지서는 연산군의 세자 시절 시강관이었는데 성종22.3.13기), 그런 연유로 국왕의 의중을 잘 헤아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 P105

연산군이 강력한 의지로 추진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던 추사폐비 사당의이업은 그러나 다시 삼사의 반대에 부딪혔다. 정언권이전을 담당하는 당상과 낭청은 성종의 삼년상이 끝난 뒤에 임명해도늦지 않는다고 지적한 것이다(2.5.6임자), 연산군은 다시 한번 대노했다. - P107

대간의 말이라도 들을 만해야 듣는 것이지 모두 따를 수는 없다. 요즘 대간의 형세를 보면 들어줄 수 없는 일이라도 그만두지 않고 강력히 말하며, 주청한 대로 되지 않으면 반드시 내가 간언을 거부한다고 말한다. 내가 즉위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매번 언로가 막혔다고 말하니, 정언 한 사람을 국문하면 언관의 입에 재갈을 채웠다고 사람들이 말할는지 모르겠다.
- P108

대간도 신하인데, 임금이 자신의 말을 모두 따르게 하려고 힘쓰는 것이 옳은가. 그렇다면 권력이 위에 있지 않고 대간에 있는 것이다. 발언을 막는폐단을 권력이 대간에게 귀속되는 근심과 견주면 그 경중이 어떠한가. 나는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 원인은 권력이 아래로 옮겨가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권균의 저의는 국문하지 않을 수 없다(2.5.6임자).  - P108

삼사와 대신의 의견은 갈렸다. 홍문관과 대간은 묘소를 옮기는 데는.
동의했지만 의전을 격상시켜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즉 천장을 관장하는 관서를 도감으로 부르고, 빈의 의례에 따라 석수 · 신주 · 사당 등을 설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예문관봉교 권달수는 연산군이 선왕의 유교를 어기고 비례로 폐비를 높이며, 모후를 성심으로 섬기지 못하고 대간을 존중하지 않는 네 가지 잘못을 한꺼번에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왕이 윤허하지 않자 이번에도 그들은 석 달 넘게 탄원하고 사직했다. - P109

그러나 대신들의 의견은 달랐다. 그들도 폐비가 성종에게 죄를 지었고 성종의 유교도 매우 엄격하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천륜인 모자의정리를 저버릴 수는 없다면서 대의 사은 모두 완전케 해야한다는 절충적인 태도를 보였다(2.4.4신사), 즉 대신들은 일정한 범위의 추승은 현실적으로 타당하다는 데 동의한 것이다. 그런 의견을 가장 적극적으로 개진해 삼사와 충돌한 사람은, 앞서도 언급한 바 있는 전 영의정노사신이었다. 그는 성종의 유교를 다시 해석해야 한다는 상당히 파격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 P109

요컨대 연산군 초반 폐모를 추숭하고 그 친족을 다시 우대하는 시책은 삼사의 치열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있다. 그럴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안의 성격상 연산군이 매우강력한 의지를 보였으며, 대신들도 대체로 협조적이기 때문이었다.  - P111

물론 그 뒤 이 사건은 그 책임의 소재를 추궁하면서 대신과 삼사를 포함한신하 대부분을 처단하는 거대한 숙청의 구실로 작용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시점에서 유의할 사항은 연산군 초반의 폐모 추숭 작업 또한 국왕 · 대신이 협력하고 삼사가 그들과 대립하는 구도 안에서 진행되었으며, 그런 구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 P111

연산군대 대신과 삼사의 충돌 또한 출발부터 대단히 빈번하고 격렬했다. 앞서 유생이나 외척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대신과 삼사는 직간접적으로 대립했지만, 몇 개의 사안을 거치면서 그 범위와 충돌의 수준은점차 확장되었다. 그런 과정의 첫 귀결은 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였다. - P111

여느 상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식적인 내용으로 구성된 이 상소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두 가지였다. 우선 기강의 진작과 관련해서 그는 각관청의 제조를 모두 없애 육조에 분속시키고 해마다 대간을 지방에파견해 행정을 감찰케 하자고 건의했다. 이것은 광범한 부서의 최고직을 겸임하면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대신들의 권한을 줄이고대간의 감찰 기능을 확대하려는 시도였다. - P113

 그러나 연산군은 "대간이가두자면 가두고 놓아주자고 해서 놓아주면 권세가 대간에 있는 것"이라면서 단호히 거부했다(1.11.20기해 · 25갑진). 이때의 사태는 일단 이렇게마무리되었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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