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서 보듯이 이런 노사신의 강경한 태도는 여러 사안에 동일하게나타나면서 연산군 초반의 중요한 쟁점이 되었지만, 이때는 특히 유생들의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생원 조형이 앞장선 유생들은 노사신이 세조대부터 불교를 좋아했다면서 중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1.2병술 · 4무자), - P96
삼사와 유생들의 반대에는 배불이라는 타당한 사상적 논거가 있었지만, 왕명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연산군은 그런 측면을 정확히 파악했다. 그는 일단 유생들에게 처벌의 초점을맞췄는데, 거기에는 즉위 직후부터 삼사를 직접 처벌하기는 부담스럽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 P96
그러나 사안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삼사와 유생이 왕명에 저항하고 일부 대신들이 그런 행동을 강하게 비판했다는 현상은 또렷하게표출되었다. 이런 징후는 그 뒤 외척의 임용과 포상, 내관의 전횡, 봉보부인奉保夫人에 대한 우대 등 국왕의 권한이나 사적인 측근과 연관된 다양한 사안과 매개되면서 좀더 폭넓게 나타났다. - P97
5월에는 국왕의 처남인 신수근의 임명이 문제되었다. 당시 신수근은 국왕이 가부를 결재할 일이 있으면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자문했기 때문에 왕명이 그에게서 나온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총애받던 인물이었다(1.1.7신), - P98
가장 대표적으로 지적된 인물은 윤은로尹殷老·윤탕로 형제와 서릉군西陵君한치례韓致禮였다. 먼저 훈련원부정訓鍊院副(종3품)이었던 윤탕로는 연산군 1년 4월 10일(계해 성종의 곡을마치기도 전에 기생집에 출입해 관계했다는 이유로 삼사의 탄핵을 받았다. 42 삼사는 석 달 넘게 윤탕로의 국문을 강력히 요청했다(1.4.28 신사: 1.5.7기축.24 병오.25 정미: 1.6.6정사 · 7무 · 12계해 -13 갑자. 15병인~21임인). - P99
연산군은 "윤탕로의 추국을 윤허하지 않는다는 단자를 네 번이나내려보냈는데도 따르지 않으니 이것은 나를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것" 이라면서 분노했다(1.6.29경진). 연산군이 윤탕로의 국문을 허락하지 않은까닭은 그가 대비(정희왕후)의 동생이므로 그를 국문하면 대비의 마음을아프게 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1.7.1 임오). - P99
서술에서도 부분적으로 비쳤지만, 지금까지 문제된 사람들은 대간의 지적대로 대부분 외척이라는 특징을 공유했다(1.4.28신사). 이철견은세조비 정희왕후의 조카(그의 어머니가 정희왕후의 동생)였고, 윤탄은 성종비 정현왕후의 숙부(정현왕후의 아버지 윤호의 동생)였다. - P100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이었고, 윤은로 · 윤탕로는 성종의 처남(정현왕후의 오빠와 동생)이었으며, 한치례는 소혜왕후의 동생이었다. 그러므로 삼사는 외척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주어진 인사상의 특혜와 포상에 반대한다는 합당한 논거를 가졌던 것이다. - P101
그러나 국왕의 입장에서 보면 삼사의 이런 언론은 즉위 직후부터 왕권을 제약하는 것이 분명했다. 더욱이 삼사가 비판한 대상이 자신과 사적인 친밀도가 높은 외척들이었기 때문에 국왕의 불쾌감은 더욱 컸을것이다. - P101
삼사의 언론활동에는 중요한 특징이 또 하나 있었다. 나중에 좀더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그것은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짧게는 두 달부터 길게는 1년까지 끈질기게 지속되었으며, 국왕이 일정한 타협안을 제시하거나 부분적으로 요구를 수용해도 자신들의 궁극적인 목표를 완전하게 관철시키려고 시도했다는 것이었다. - P101
왕권의 자유로운 행사에 남다른 관심과 의지를 지니고 있던 국왕에게는더욱 심각한 폐해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일부 대신들도 국왕의 그런 판단에 공감했으며, 앞서 말했듯이 그들은 그것을 ‘상‘으로 규정했다. 삼사에 대한 국왕과 대신의 그런 문제의식은 몇 개의 사건을 거치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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