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인은 두 계열의 조상을 가졌다. 하나는 주전 722년에 북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에 멸망하면서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남은 백성들이요, 다른 하나는 사마리아를 정복한 앗수르인들이 바벨론과 메대에서데려온 외인 식민지 개척자들이다(왕하 17:24-34은 반사마리아 관점에서이 일을 설명한다).  - P126

북쪽 사마리아인과 남쪽 유대인 사이에는 신학적 대립이 있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예배하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바벨론 유수 이후 사마리아인이 예루살렘의 회복을 가로막은 일, 그리고 주전 2세기에 유대와 전쟁을 벌인 수리아 왕조를 사마리아가 도운일은 남과 북의 대립을 악화시켰다. 주전 128년, 유대의 대제사장은 그리심에 있던 사마리아 성전을 불살랐다. - P126

8절 예수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건네시면서 물을 좀 달라 하신다. 예수는 이미 사회 금기 두 가지를 깨드리셨다.
하나는 낯선 여자에게 공공연히 말을 거신 것이었고 - P127

다른 하나는 나아가 유대인 남자로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건네신 것이었다!  - P128

예수는 21-24절에서 여자에게 이중 반응을 보이신다. 첫째, 역사적 시각에서 보면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나온다 22절 즉 하나님의 구원은 유대인을 통해왔지, 사마리아인을 통해 오지 않았다.
둘째, 그러나 예수는 이제 모든 것을 새로운 신학 원리로 바꿔 놓기 위해, 곧 참된 예배는 예루살렘이나 그리심산이나 다른 어떤민족이 중시하는 물리적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24절 영과 진리로, 진심으로예배받기를 원하신다. 21-24절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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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만큼 사람들이 낙관주의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을지라도 대부분의 현대인들 역시 이 땅의 기술 문명과 사회가 진보하여 살기좋은 세상으로 변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이 땅을 살아갑니다.
- P102

그런데 성경은 그와 정반대의 관점을 보입니다. 세상은 갈수록부패하고 쉽게 썩고 더럽혀지고 비인간화되고 비인격화 되는 방향으로 흘러가리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변질되기 쉬운 세상 가운데 부패와 썩음을 방지하는 기능과 역할을 감당하도록 주님이 우리를 소금으로 두셨다는 것입니다.  - P102

성도는 하나님을 믿으며 내면의 진실한 변화를 경험하는사람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내면의 참된 변화입니다. 속사람이 새롭게 변화되므로 죄를 미워하고 거룩함을 추구하고 선을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저 형벌을 받을까 두려워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 죄 자체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 P103

죄를 대적하고 죄를 거스르기를 원하는 백성이 나오는 것이지요. 그리고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선택하며 선을 행하는, 하나님을 닮은 새로운백성이 나옵니다. - P103

수많은 지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두움에 쌓인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는, 위대한 철학자들이나 석학들, 학문적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밝히 보여주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주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들어 깨닫게 해주는 존재입니다. - P105

 우리는 존재 자체가 빛이고 소금입니다.
평범하는 훌륭하든, 남들이 주목할 만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는 상관없이 우리 존재 자체가 빛이고 소금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 P107

예수를 믿어서 거듭날 때 신앙고백만하고 끝나는 것이아니라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게 되므로 빛 되신 주님과 나사이에 신비한 연합이 일어납니다. 더 이상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연합되어빛이신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되지요. 귀하신 성령님이 오셔서 나의안에 내주하십니다. - P108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절대로 감추어지지 않고 그 정체가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빛인 우리는 이웃을 비추어그들 삶의 잘못된 점을 깨우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밝혀주는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삶을 드러내며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삶을밝혀주는 빛인 것이지요.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 P111

성도가 빛으로 드러날 때, 세상 사람들은 성도에게 주목하지않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빛인 자신을 감출 수없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지요. 빛으로 드러나는데도 사람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만드는 것이 빛 된 성도의 삶의 방식입니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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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일을 이루려함에
때론 고집스러움이 도움이 조금 되련만,

자신의 사사로움에 때아닌 생고집은
결국 패배요, 패망이요
오직 모든이의 죽음을 좌초할 뿐인 것을

연산은 그런 외고집으로 슬슬 미쳐가고 있다
그 주위는 죽음은 그림자만이 짙게 드리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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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연산군은 무오사화로 일단 심사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렇게 강화된 왕권을 국정의 개혁 같은 건설적이고 바람직한 목표에 사용하지 않고 사치 사냥 · 연회 · 음행 같은 말초적인욕망을 만족시키는 데 투입했다.  - P201

이처럼 무오사화 이후 본격화된 연산군의 자의적 왕권 행사는 일반적인 정치 사안들보다 객관적으로 그 문제점이 훨씬 확연했고, 그것을비판할 논리적 근거도 그만큼 타당했다. 그 결과 삼사는 물론 그동안 국왕과 비슷한 입장에서 삼사에 대응해오던 대신들도 점차 강력하고 빈번하게 간언을 제기하기 시작하면서 연산군대 중반 이후 정치 세력의 협력 · 대립관계는 대신과 삼사가 제휴함으로써 국왕이 고립되어가는 중요한 재편을 겪게 되었다.  - P201

고립된 국왕이 대신과 삼사를 포함한 거의 모든 신하들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이고 비이성적인 탄압을 자행한 갑자사화의 양상은 이런 상황적 맥락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 P201

앞서 본 대로 성종의 졸곡 전에 기생과 동침했다는 죄목으로 탄핵받은 윤탕로는 무오사화 직전 다시 직첩을 받고 서반직에 기용하라는 왕명을 받았지만(4.6.29갑오), 삼사는 이전의 죄목을 문제 삼아 계속 반대했다. 간헐적이었지만, 윤탕로에 대한 국왕의 애착과 삼사의 반대는 무려7 년 동안 길항했다(4.9.4 기해. 15경술; 4.10.11계유; 6.9.12계해~14 을축 · 18기사-21 임신 · 27무인; 8.10.10기유; 9.1.8병자~10무인). 갑자사화 직전에도 연산군은 그를한직인 돈녕부에 사용하려고 했지만 삼사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다가(10.1.17기 · 18경진 · 24병술; 10.2.5 정유 · 9신축) 결국 극도의 폭정으로 신하들을 완전히 제압한 뒤인 재위 11 년 초에야 그를 공조참의에 임명함으로써 숙원을 풀 수 있었다(11.1.4 경인). - P203

우의정 성준도 삼사의 탄핵에 시달린 대신이었다. 특히 연산군 5년36후반에 일어난 그와 삼사의 충돌은 무오사화 이후 삼사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산군 5년 10월 성준의손녀가 시댁에 인사 가던 중 사헌부 이속은 그 행렬을 막고 소지품을검사했는데, 당시 금지하고 있던 육류가 발견되자 수행하던 종을 가됐다. 범법 행위를 적발하기는 했지만, 일개 사헌부 이속이 현직 우의정의 손녀를 검문하고 그 종을 하옥시킨 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 P205

끝으로, 홍백경도 삼사의 비판으로 순조롭게 승진하지 못했다. 연산군 8년 1월 삼사는 도덕적인 문제가 있거나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국왕이 내지로 특별 승진시키거나 근거 없이 가자를 남발한다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으며, 가장 문제되는 인물로 지목한 홍백경을 참판에서파직시킨 것이다
그 밖에도 연산군 5년 7월 자신들이 인사 문제에 참여하는 것을 이조가 막고 있다고 비판해 국문을 관철시킨 것도 대간의 영향력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사례다(5.7.15 계유 • 16갑술 · 21기묘).
- P206

연산군 중반에는 홍문관의 위상도 크게 상승했다. 국왕은 대간이 홍문관의 의견을 두려워하며 그들의 영향력은 재상까지 위협하고 있다고파악했다(5.12.14무술). 우의정 이극균도 비슷한 의견을 피력했으며.
(7.11.16경인 · 23정유) 성준 · 한치형 등도 홍문관은 이전의 집현전처럼 자.
문기관에 지나지 않는데도 너무 큰 권력을 행사한다고 지적했다(7.10.25 신미: 7.11.11을유 · 12병술 · 16경인 · 19계사).
- P207

이런 홍문관의 영향력은 실제로도 입증되었다. 연산군 7년 8월 대신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며 대간도 규찰에 힘쓰지 않고 관망만 한다고 홍문관이 탄핵하자 영의정 한치형을 비롯한 주요 대신과 대간이 모두 사직한 것이다(7.8.7일자).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친 결과 삼정승 한치형 · 성준 · 이극균은 일찍이 홍문관을 국가의 동량이며 대간과다름이 없다고 평가한 성종의 판단에 동의하면서 그 위상을 인정하게되었다(7.11.17신묘) - P207

치세 중반 삼사의 발언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당시 국왕이 가장집중하던 사안인 사치와 패행이었다. 국왕의 주요 업무가 곧 국무라면,
국왕과 삼사는 거의 모든 국무에서 충돌한 것이었다. 일일이 거론할 수없을 정도로 수많은 상소에 담긴 삼사의 주장은 요컨대 국왕에게 본연의 임무인 정무政務에 좀더 충실하라고 촉구한 것이었다. 연산군 8년 4월홍문관의 상소는 국왕의 불성실과 재정의 악화를 중심으로 한 국정의난맥상을 집약한 대표적인 사례로 생각된다. - P208

그러면서 그는 성종 말년부터 생긴 이런 폐단을 지금 고치지 않으면후세에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9.3.14신사), 앞서도지적했지만, 당시의 가장 큰 적폐라고 판단한 문제의 기원이 성종대에있다는 판단은 부왕에 대한 그의 반감이 모후의 사사라는 감정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판단에서도 발원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 P210

연산군은 홍문관도 압박했다. 그는 인물을 논란하는 것은 홍문관의직무가 아니라면서 그 언론권을 부정했으며(8.10.4계묘) 대간과 연합하는자연스런 관행도 문제 삼았다. "대간과 홍문관은 각각 직무가 있는데,
지금은 대간이 아뢴 일을 홍문관이 그대로 따라서 말하고 있다. 그들은동료와 관련된 일은 거론하지 않지만 대신의 일은 반드시 모두 논쾌한다(7.10.26신미), "홍문관이 궁궐 수리와 잔치를 중지하자고 주청했을 때도 연산군은 서책을 관장하는 부서가 감히 이런 일을 말한다면서 일축했다 - P210

연산군은 선왕 때부터 시행된 일이라는 명분에 따라 서연관이나 삼사를역임한 사람은 윤대에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8.11.4 신유 · 12신사). 물론삼사를 제압하는 가장 빈번하고 일반적인 방법은 그들을 체직시키는 것이었다.  - P210

연산군대에 삼사 장관(대사헌 · 대사간 · 부제학)의 재직 기간이 평균 4.2개월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삼사를 순치시키려는 국왕의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이런 수치는 그 하위 관직으로 내려가면 더욱줄어들 것이다).  - P210

연산군은 그런 허점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그는 7개월 전에 내린 명령의 폐단을 지금에야 아뢴다면서 당시 대간으로 현재까지 재직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하라고 명령했고, "대간은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직책인데 자신들이 먼저 착오를 저지르면 어떻게 남을 바로잡겠는가"라고 질책하면서 죄상을 국문한 뒤 체직시키라고 하교했다 (8.12.4임인), 이것은 충분한 정당성을 지닌 조처였다. 대간이 드러낸 객관적인 문제점을 놓치지 않고 기민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한 이런 사례는 연산군이결코 둔감하지 않은 정치력을 지닌 국왕이었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것이다.  - P211

이때 국왕이 총애하는 측근들에게 물품을 지나치게 하사하고 과도하게 잔치를 베풀었다. 인수대비는 그만두게 하지 못할 것을 알고 한치형에게 비밀리에 당부했다. "주상의 행동이 이런데도 고치지 않으니 경은 사직의 증신으로 죽을힘을 다해 바로잡지 못하면 지하에서 조종의 영혼을 무슨 낮으로 보겠습니까?" 이때부터 한치형은 성준, 이극균과 함께 국왕의 행동을규제하고 간언하는 것이 많았다(8.6.28 무진).  - P214

그해 3월 삼정승 한치형 · 성준·이극균이 올린 시폐 10조는 그 제목대로 당시의 폐단을 집약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83.25 정유).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이 상소의 주청자와 내용을 가장 증오했는데,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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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연산군의 진정한 목적은 이런 정당하고 일반적인 취지와는전혀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벌이는 수많은 유희와 음행이 노출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접근과 시선을 차단하려는 노력이 집중된 장소는 당연히 궁궐(특히 창덕궁)과 그 주변이었다(그뒤금표를 설치하면서 그런 지역은 경기도 일대로 확장되었다).  - P195

국왕은 음탕한 놀이를 무도하게 하고 불시에 나인을 후원에 모아 광란의가무를 매일 즐겼는데, 외부 사람들이 그것을 알까 두려워 궁궐 주변에 접근하는 것을 점차 엄격하게 금지했으며 결국은 산 아래 인가를 철거하기에이르렀다(8.10.21 경신)  - P196

이런 차단 중에서 가장 대대적으로 시행된 조처는 궁궐 주위의 민가를 철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성격상 백성에게 더욱 유해한 폭거였다. 바로 앞서 인용한 사료가 지적했듯이, 민가의 철거는 접근의 차단이 다다른 최종적인 결과였다. - P197

살던 집에서 쫓겨난 백성들은 도성 부근의 빈집을 원하는 대로 임대4해 거처케 했지만(9.11.5무진 6기사) 그들의 고통과 피해는 자명했다. 시험들도 대부분 반대했다. 의정부는 "지금 백성들은 먹고살기도 어려우니철거할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 "쫓겨난 백성들은 돌아갈 곳이 없어 재목을 길옆에 쌓아두고 초막을 지어 살고 있으며 원망과 고통이 매우 크다"
고 진언했다(8.2.25 무진). 사헌부도 100여 채나 되는 민가를 철거한 것은역대에 없던 일이라면서 반대했다(9.11.16기묘).  - P198

이처럼 연산군은 궁궐과 인접한 주요 지역에 통행을 금지하고 민가를 철거함으로써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는 데 충분히 성공했지만 이런물리적인 조처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발언 자체를통제하려는 비상식적인 것이었다. 연산군의 가장 거대한 폭정인 갑자사화는 이런 불가능한 목표를 이루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촉발되었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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