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사소한 구원 - 70대 노교수와 30대 청춘이 주고받은 서른두 통의 편지
라종일.김현진 지음 / 알마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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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정기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모임에 나가지 못하면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책을 쌓아놓고 이것저것 읽으면서도 기록하거나 일기를 쓰지 못했다. 거실 창문으로 보이는 과수원 나무들이 햇살에 뿌옇게 빛나는 걸 보면서 날씨가 이렇게 좋으니 오후엔 산책을 할까 생각하다가도 시간이 되면 쉽게 나가지 못하는 이상한 증상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사람을 만나면 쓸데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끝도 없이 쏟아냈다. 요즘 들어 나는 중독적 성향이 강하고 자기 조절 능력이 취약하다. 뭔가 시작하면 집중을 하는 게 아니라 그 행위에 매여 옴짝달싹 못하고 갇혀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람들을 만나면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렇다-계속해서 지껄이고 있다. 너무 비판적인 이야기나 감정적인 이야기를 필터 없이 다 쏟아내면서 나는 위선적인 사람이 아니다, 라며 합리화를 하는데 집에 와서 볼일을 보다가 문뜩 내가 뭔가에 쫒기 듯 살고 있구나 싶다. 사십이 넘어서면서부터 이제껏 내가 추구해왔던 건 지식과 삶의 의미에 대한 갈망을 해소하는 일이었다. 나와 내 주변에 대해 바로 알자, 라는 생각이 십년이 지나자 너무 한쪽으로만 편향된 균형을 잃었다는 위기감이 든다. 변화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가 온 것이다. 그간 나를 붙잡아 줄 의미의 중력 같은 게 필요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마치 블랙홀처럼 모든 걸 빨아들이고 해부하고 비판하는 내 자신이 싫어진다. 그런 행위가 어떤 선을 넘어 의미를 해체하고 현실성을 잃어간다는 느낌이 든다.

 

<가장 사소한 구원>은 제목에 몹시 끌린 책이다. 또 책이냐고? 그렇지만 어쩌겠냐? 삶에서 못 배우는 아둔함을 책을 읽으면서 어떡하든 깨어 버려야겠으니. 반세기 가량의 나이차가 나는 노교수와 작가의 서른 두 통의 편지글을 접하면서 나는 사소한 것 같지만 깊이 있는 철학적 종교적 지혜를 기대했다. 그건 책의 제목과 표지 때문에도 그랬다. 그런데 책 내용은 생각했던 것보다 현실적이었다. 젊은 작가인 현진은 불우했던 과거의 상처와 비관적인 현실의 무력함 때문에 상처 입은 영혼처럼 보였다. 현진은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로 인해 위축되고 불행했다. 아마도 그녀는 붙잡을 끈이 필요했으리라. 그것이 책이나 종교가 아니라 살아있고 교감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인 것을 이해한다. 풍요롭고 좋은 것에서 빈곤하고 악한 것이 생겨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책과 멘토와 상품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요새 느끼는 거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더 그렇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대학에서 운동권이었고 기독교 신자이면서 집값 폭락의 희생자이며 인문학에 열광하지만 쇼핑을 좋아하는 다중적인 인간이다. 가장 사회의 영향을 격하게 받은 자가 아닌가. 너무 많은 것들로 인해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삶의 가치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복잡다단한 생각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 것 같다. 반성은 잠시이고 현실에서는 그 사이클에 푹 빠져 있는 게으름이라니. 책 내용 중에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한 구절이 있다. “어떤 문제이건 그것이 발생한 차원에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언젠가 고미숙의 <호모 에로스>에서 읽었던 ‘변화하고 싶으면 삶의 차서와 배치를 바꾸라’는 말이 생각난다. 문제를 느끼기는 하지만 삶의 차서와 배치를 바꿀 열정이 부족하니 번뇌가 생긴다. 열정이 부족하다는 건 아무래도 충분히 깨닫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게다가 나의 게으름도 큰 몫 한다. 이제는 아주 많이 가벼워져야 한다. 고질적인 꼰대의 모습, 수다스러운 중년 아줌마, 탐욕스러운 자기만족에서 이제 벗어나야 한다고 나의 심혼은 말해준다. “문제는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크고 작은 상처, 그 상처의 아픔이 아니라 그 아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에 있겠지요.” “저는 우선 자신의 상처를 남에게 드러내 보이거나 반대로 장한 일로 추어올려 앞세우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 자기 탐닉은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천한 일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노교수는 내가 지나쳐버린 작은 실수가 삶에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성찰을 준다. 아프니까 괜찮다는 생각은 분명 합리화다. 노교수의 정신세계는 많은 지식이 있음에도 담백하고 섬세하면서도 균형이 잡혀 있다. 잘 기억하고 잘 보존한다.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한 에너지를 훼손하지 않고 미래를 열어놓고 바라본다. 감상적인 긍정이나 비난을 삼가면서도 인생의 소중했던 시간들을 잘 갈무리해서 삶의 동력으로 활용한다. 그간 책으로 읽었던 지식과 경험을 어떻게 하면 내면화하여 나를 성장할 토양으로 만들 것인가. 가장 굵직한 주제는 기본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에 대한 자긍심과 타인에 대한 자비로운 마음이 기반이 돼야 한다. 그러려면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겠다. 글 서두에 “글로 쓰인 것들은 더 이상 상처가 되지 않는다”라는 말에 동감한다. 부지런히 글을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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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2
오스카 와일드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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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심리학자인 칼 융의 책에 푹 빠져서 살다가 오스카 와일드가 쓴 소설<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생각났다. 심리학 관련 서적을 읽다보면 ‘페르조나’ 라는 말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고대 희극에서 쓰던 ‘가면’이란 말로 현대에는 겉으로 보이는 한 사람의 인격(외적인격)을 의미한다. 도리언 그레이는 젊고 매혹적인 자신의 외모, 페르조나에 집착한 인생을 산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페르조나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무의식의 세계는 그만큼 억압되어 있고 분출되려는 힘도 그만큼 세진다. 그래서 무의식은 가끔 신호를 보내는데 예를 들면 무심코 드는 생각이나 기분, 그냥 나오는 말, 술에 취해 하게 되는 실수, 매일 꾸는 꿈, 정신병 등이 그렇다. 그것을 1854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오스카 와일드가 소설 속에서 정확하게 구현하고 있으니 놀랍다.

 

스무 살의 아름답고 매력적인 청년 도리언 그레이는 선물로 받은 자신의 초상화에 반해 언제까지나 외모가 변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는 사랑했던 소녀가 자신의 비열한 행위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천박한 사람이나 감정에서 벗어나는 데 몇 년씩 걸리는 거예요. 스스로 자제할 수 있는 사람은 즐거운 일을 만들 줄 아는 것만큼이나 슬픔도 쉽게 끝낼 줄 알아요. 난 감정에 좌지우지되고 싶지 않아요. 감정을 이용하고, 즐기고, 지배하고 싶단 말이에요.” 초상화 앞에서 ‘아름다움과 젊음이 변치 않길’ 바라던 기도는 이상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현실에서 죄책감을 느낄 법한 일이 벌어져도 그의 외모는 그대로인데 초상화의 모습은 점점 추악하게 변해간다. 두려움을 느낀 그는 초상화를 은밀한 곳에 숨겨 두고 덮개를 씌워두며 생각한다. “캔버스에 그려진 얼굴은 자줏빛 덮개 아래에서 차츰 짐승처럼 흉측하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더러워질 것이다. 그런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어차피 이 그림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라고. 그는 때로 자신의 이중생활에 의아함을 느끼고 흉측하게 변해가는 초상화를 바라보며 괴로워하지만 점점 더 미칠 듯한 탐욕에 사로잡혀 쾌락적인 삶을 살아간다. 결국 그는 자기기만과 합리화로 타인을 짓밟고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괴물이 된다. 파국 앞에 선 그는 여러 사람은 물론 자신을 파멸시킨 것은 간절히 기도했던 미모와 젊음이었다는 것 깨닫는다. 내면을 돌보지 않고 욕망에 따라 살아온 아름다운(선) 자의 최후는 파멸(악)이었다.

 

사람의 내면은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탁월한 외모를 가진 자라도 내면을 돌보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 그러나 외모가 추한 사람들의 경우,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열등감과 원망의 마음으로 굳어지는 경우도 있다. 의기소침하고 뭐든 믿지 않는 냉소적인 태도가 외모에 덧칠해져서 말이다. 내면과 외모는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어떻게 융합되어 한 사람의 인격으로 완성되는지 미리 알 수는 없다. 노력하고 성찰하는 일, 그것도 운명일까? 내면의 어두운 면을 들여다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다만 그것도 나의 일부라는 것을 이해하고 잘 돌보는 일이 삶의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좋은 소식은 그렇게 할 때, 개인의 의식이 확장되고 인격이 성장하며 행복이 선물로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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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로 읽는 여성성 She - 동연총서 208
로버트 A. 존슨 지음, 고혜경 옮김 / 동연출판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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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시케와 에로스의 신화는 여성의 심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신화는 집단적인 경험과 상상력의 산물로 현대인에게 인간에 대한 통찰을 선사하지만 상상력이나 상징에 대한 감이 없는 나에겐 항상 접근하기 어려운 텍스트였다. 몇 년 전 재미있게 읽었던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의 저자 로버트 존슨이 쓰고 <나의 꿈 사용법>을 쓴 고혜경이 번역한 이 책은 불모지였던 나의 상상의 세계에 형태를 주고 색을 부여해 준다. 총 13개의 장으로 구성된 책은 이야기와 해석이 명료하고 적절하게 연결되어 있어 내용을 이해하고 내 심리에 적용하기가 어렵지 않다. 표면적으로 전개되는 사랑의 이야기는 사실 한 여성이 진정한 자기가 되는 개성화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프시케와 에로스, 아프로디테가 등장인물이다.

 

아프로디테는 무의식에 거주하는 여신으로 해석된다. 여성의 본능적인 특질을 가진 아프로디테는 인간 프시케가 성장하기 위해 꼭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다. 때로 둘 사이에 일어나는 충돌로 여성은 갈등을 겪는다.

프시케는 ‘왕의 딸’같은 여성이다. 그녀는 수려하고 숭고하지만 외롭다. 에로스는 아프로디데의 명령으로 프시케에게 화살을 쏘려 하지만 실수로 자신의 화살에 손가락을 벤다. 에로스는 프시케와 사랑에 빠진다. 에로스와 낙원에 살게 된 프시케는 질투에 싸인 언니들의 사주를 받아 자고 있는 에로스의 정체를 밝히고자 한다.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다른 손에는 칼을 쥔 채. 괴물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은 아름다운 에로스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풀린다. 게다가 에로스의 화살을 건드려 그녀도 사랑에 빠진다. 언니들은 언니 내면에 있는 그림자이다. 그림자로 인해 깨어난 의식은 지옥 같은 외로움을 겪게 된다. 여성은 등불은 남자에게 유용하지만 자신의 내적 판단을 위해서만 사용해야지 남자나 타인을 향해 사용해서는 안 된다.

 

사랑에 빠진 프시케의 에로스를 만나기 위해 아프로디테가 내준 네 가지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자의 내면에 있는 남성적 특질인 아니무스의 도움이 필요하다. 또한 여성이 취해야 할 행동반경이나 따라야 할 지침들이 있다. 과제의 단계들은 모든 에너지와 모든 자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과 신중함이 요구된다. 이 과제를 마친 프시케는 가장 자기다운 모습으로 여신이 되고 에로스와 진정한 사랑에 도달하게 된다.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나에게 적용해보았다. 프시케의 등불은 남자의 의식과 가치를 상승시키는 요인이나, 불평과 잔소리로 묘사되는 '칼'의 경우는 자기를 성찰할 때만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남편에게 하는 습관적인 잔소리에 ‘내가 왜 이러지?’하고 느껴왔었다. 또 하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는 많고 잡다한 관심과 활동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만큼 집중도를 떨어뜨리고 무의식의 힘에 압도당할 위험이 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자기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에너지와 자원을 아끼고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행동으로 에너지가 분산되는 걸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지불식중에 인생에서 성공하고 만족감을 얻으려면 많은 것을 완벽하게 해야 하고 좋은 인간으로 비춰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일침을 놓는 대목이다. 단순하고 명료하며 집중적이고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도 알고 작은 일에 만족하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전문가가 풀어주는 신화 이야기일지라도 애초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탓에 이야기가 품고 있는 넓고 깊은 의미에 감동을 느꼈다. 내가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면 되지, 하는 마음과 왜, 뭐가 문제 길래 삶이 이렇게 꼬일까, 했던 고민들이 좀 다른 차원으로 나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여성성이 내게도 엄연히 작동한다니 놀랍다. 한가지, 살다 보니 무시하고 잃어버린 여성성을 다시 회복하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보물은 자기 내면에 있다는 것, 캐내는 만큼 나는 가장 나다운 매력과 활기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희망이다. 아는 분이 말하길 프랑스 여자들은 아름답고 우아한 페르조나(외적인격)가 있는 것 같다고 한다. 가짜 가면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가는 조형능력자로서의 아름다운 페르조나를 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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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 사회적 트라우마의 치유를 위하여
정혜신.진은영 지음 / 창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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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잃는 고통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것이다. 그건 죽을 때까지 잊혀 지지 않는 지옥과 같은 고통으로 시간의 작용을 비켜 선 아픔이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면, 하고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고 고통을 느꼈다. 아이를 잃은 당사자들은 그러한 상황에서 진상규명을 위해서 싸워야 했다. 국가가 나서서 그 일을 해주지 않을뿐더러 적대자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동시대를 사는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에 소금을 뿌리고 침을 뱉었다. 선의를 가진 대다수의 사람들마저도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서서히 그 사건을 잊었다. 1주기를 맞이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슬픈 일이긴 하지만 더 이상 이야기 하는데 피로를 느낀다, 라는 말을 했다.

참을 수 없는, 치유되기 어려운 고통이라도 제대로 진상규명이 된다면 아이를 떠나보낼 수 있겠는데 그마저 안 되니 유가족의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가까이에서 그들과 함께 치유작업을 하는 이웃이 있다. 정혜신은 세월호 참사 이후 안산에 거주하면서 ‘이웃’의 이웃 치유자로 살아가고 있다. 이 책은 그와 시인으로 문학을 통해 사회적 실천을 이어오고 있는 진은영이 나눈 대화의 기록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상처 입은 자의 참된 이웃이요, 치유자가 될 수 있을까.

 

치유적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상규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을 나누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들에게 ‘이제 정신 바짝 차려서 마음을 정리하고 빨리 나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상처가 된다. 마음껏 슬퍼해야 더 빨리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극심한 고통은 아픈 만큼 파괴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더욱 생생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 치유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먼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잘 아는 것이 치유의 첫 단계다. 아무리 지독한 고통이라도 의미를 찾는다면 인간은 훨씬 더 잘 견딘다고 한다. 고통의 의미를 찾는 일은 철학이나 심리학의 영역이 아니다.

 

정혜신은 ‘일상’의 영역에서 치유가 다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유가족들은 지금 자기가 살던 세상이 모두 깨어진 거잖아요. 자식들을 기르면서 가족끼리 편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전부인 사람들이었는데, 이게 모조리 무너졌어요. 그러니까 이 세계에는 살 수가 없는 거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웃 치유자들을 접하고 그들의 마음을 느끼면서 다른 세상으로 진입하는 거예요. 다른 가치와 관계가 만들어지는 거죠. 이 세계는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그건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지만, 이 세계를 지탱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가 생기기 때문에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거죠. 그게 치유입니다. 그러려면 이런 재난을, 트라우마를 입었을 때 주변에 누가 있느냐가 무척 중요해요.’ 세계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다시 살아가기 위해서 그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야 한다. ‘이웃’에서는 상담은 물론 같이 밥을 먹고 뜨개질을 하며 아이들의 생일상을 차리고 아이들을 충분히 애도함으로 아이들을 천국으로 떠나 보낼 준비를 한다. 애도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으나 혼자의 힘으로는 넘어가기 힘든 부분이 있다. 사람들과 함께 해 나갈 때 치유의 힘이 생긴다. ‘모든 슬픔은 당신이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이자크 디네센)’는 말은 관계 속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정혜신은 ‘모든 인간은 치유적 존재이고, 그것이 치유의 핵심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치유작업을 하는 동안 제가 하는 일은 란 건 결국 그 사람 안에 있는 치유적 요소들, 그 사람이 지닌 온전성, 건강성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스스로 느끼게 해주는 것일뿐’이라고 말한다.

 

이 모든 지옥 같은 고통과 치유의 불가능성, 국가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이 아비규환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서 살 수 있게 되는 원천은 역시 ‘사랑’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가. 나의 구원을 위해서도 이 일은 분명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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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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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작가들의 산문집이 많이 나왔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는 조지 오웰의 말처럼 산문은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경험과 시선이 중요하게 작동한다. 김영하의 산문은 그 점에서 믿을만 하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정보와 영상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뭔가를 ‘본다’고 믿지만 우리는 봤다고 믿는 그 무언가는 홍수에 떠내려오는 장롱 문짝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우리 정신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 일상에서 보고 경험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깊이 생각하고 그것들을 정연하게 써내도록 스스로 강제하게 된다. 그렇게 적은 것을 다시 보고 고치는 것이 그 마지막이다. 이 순환이야말로 한 사회와 세상을 온전히 경험하는 방법이 아닐까.”

 

 

<보다>에서 김영하는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고심하던 20대 청년시절 부터 자신만의 개성과 문체로 독보적인 위치의 작가로 살아가는 최근까지의 경험과 생각들을 흥미롭게 풀어냈다. 개인적인 경험에서부터 사회상에 이르기까지, 또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과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깊은 사유가 간간히 소개하는 영화와 함께 읽는 맛을 더해 준다.

 

 

이 책을 읽으며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정리했다.

‘나는 주어진 시간들의 진정한 주인이고 자유롭게 살고 있는가. 세상이 요구하는 방식대로, 많이 소유하고 많이 여행하고 즐기는 것이 진정한 행복인가. 죽음에 대해 제대로 인식한 자만이 현재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 진심은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잘 설계된 우회로(이야기)가 필요하다. 연극적 자아는 인간의 본성이고 우리가 가장 연기하기 어려운 장면은 부단히 변화하는 일상이다. 우리에게 자기실현적인 암시가 꼭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 내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준비가 됐는가.’ 

 

 

주위의 중년들을 보면 대게 두 개의 분야로 관심이 좁혀진다. 여행과 건강. 이 둘은 마치 행복하기 위한 필요조건처럼 여겨지는 모양이다. 예상치 못한 돈이 생기면 무엇을 할 거냐고 사람들에게 물으면 여행하겠다는 답이 많다. 또, 누구는 어디가 아프고 자신은 이러저러한 증상으로 고생 중인데 역시 건강 검진을 자주 해야 한다는 소리를 일상적으로 귀가 닳도록 듣게 된다. 여행과 건강의 공통분모는 매력적이고 활기찬 육체일 터인데 그러한 육체가 지향하는 ‘행복’은 현대에 강력한 신흥종교가 된 것 같다. 삶의 의미의 중력이 과연 외형적이고 과시적인 이러한 눈요기에 있겠는가. 우리의 시선을 좀 더 높이 멀리 깊게 던져봐야 한다. 가난하고 몸이 아파도 친구가 있고 신앙이 있어 행복한 사람이 있다. 암을 앓기 전보다 삶이 더 소중하고 행복해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책 속에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을 벗어나 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에 대해 나오는데 딱 나 같은 사람이구나, 싶다.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피겨여왕 김연아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다. 영화 <그래비티>는 사고로 우주 공간에 홀로 있게 된(게다가 얼마 전 딸을 잃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스톤박사의 사투를 그린 이야기다. 그녀가 앓고 있는 우울증은 삶의 의지를 약화시키고 죽음을 앞당기려는 위험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은 동료들의 모습을 통해 그녀는 죽음은 죽음일 뿐이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공허와 죽음 앞에서 그녀는 내면에 숨어있던 순수한 생의 의지와 삶에 대한 그리움을 끄집어 내게 된다. 생에 대한 의지를 연료삼아 시도한 지구로의 귀환은 성공한다. 우울함 속에서도 제대로 자신과 세상을 보고 느낄 수 있다면 머지않아 그 우울에서 벗어날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교훈!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가지고 있는 이상한 획일주의와 ‘무슨무슨‘ 열풍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거기에는 치열한 경쟁에서 오는 비교의식과 소비지향적인 삶의 패턴을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도 문제지만 개인의식의 얄팍함과 철학(윤리학)이 없음이 한 몫 한다. 그러기에 “사람을, 세상을, 우리를, ‘다르게’ 보는 것이 필요”하다.  빠르게 지나가는 인생의 시간에 자주 브레이크를 걸고 쉼을 주는 시간 말이다. 지하철에서건 누구를 기다리는 시간이건, 어디서든 책을 읽고 생각을 하고 뭔가르 끄적이는 시간은 우리를 세상과 민감하게 연결시키는 통로가 될 것이다. 김영하의 <보다>가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보다’가 되는데 꽤 매력적인 모델이 될 것 같다. 앞으로 나올 <읽다>와 <말하다>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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