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 100년의 변천 - 혁명에서 ‘신시대’로
이희옥.백승욱 지음 / 책과함께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 -

[중국공산당 100년의 변천]

- 현재에서 과거를 보고 미래를 논하다 -

홍콩의 국가보안법 처리를 앞두고 한국, 호주 등 중국 밖 여러 나라 대학 캠퍼스에서 일어났던 홍콩 독립 지지에 관한 대자보 훼손 사건들이나 중국 내에서 나이키, H&M 상품들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불타는 이 극단적인 모습들을 보게 되었을 때 중국에 대해서 더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즉 소위 21세기 홍위병은 현재 중국의 문화현상을 설명하는 단순한 신드롬이 아닌, 국가 간 마찰을 초래할 수도 있는, 국제사회가 당면할 수도 있는 미래 문제의 잠재적 요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라는 말도 있고, 현재는 과거의 거울이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무엇이 무엇의 거울이 되었든 간에 아무튼 현재나 과거의 상호 긴밀한 연관성을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 현재 직면한 문제에 대해 과거 역사에서 지혜와 교훈을 찾으려는 인간의 시도는 그만큼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내가 중국사를 읽으면서 다른 세계 역사에서도 받지 못했던 충격적인 사건이 2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중국의 '대약진 운동'에 관한 내용이었고, 다른 하나가 '문화대혁명'에 관한 것이었다.

- 대약진 운동 중 일부 -

참새의 생태계 내에서의 역할과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이루어진 제사해 운동 또한 이 기간 내에 장려된 정책이었다. ‘참새가 곡식의 낟알을 쪼아 먹어, 인민의 노동의 결실을 도둑질하니, 해로운 것이다’라는 마오의 말 한마디에 선동된 대중은 합리적 의심 없이 참새를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죽이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새총은 물론이거니와 대량의 독극물을 사용하여 모리, 파리, 들쥐 그리고 참새까지도 멸종시키는데 힘썼고, 각 지방정부와 단위체는 잡아들인 참새의 양과 부피에 따라 포상과 표창하기까지 했다. 참새가 멸종되자, 메뚜기 떼가 전역에서 창궐하였고, 해충이 들끓었다. 자연의 생태학적 균형이 무너지자, 농지는 황폐화가 되었다. 무지한 사람들은 대기근으로 아사자가 속출한 후에야 참새가 곡식의 낟알뿐 아니라, 해충까지 먹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이로운 개체였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 문화대혁명 -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한 번의 실각을 경험했던 마오는 문화대혁명을 계기로 사실상 다시 부활한 셈이었다. 마오는 문화대혁명을 정치적인 성격으로 확대시켜 전개해나갔는데, 그가 지향한, 국민의 삶과 인간의 정신 등 그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개조된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를 당장이라도 이룰 것처럼 급진적이고 맹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 혁명에 동참하려는 자발적인 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마오와 마오의 정책을 보위하고, 마오의 이상향에 심취된 무리, 즉 홍위병(紅衛兵)이었다. 점차 매우 빠른 속도로 그리고 대규모로 결성된 이 조직의 대다수는 마오와 함께 급진적 변화를 추구했던 혈기왕성한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문화대혁명의 구호에 따라 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때려죽이거나, 구태(舊態)로 인식되는 학술자료와 문화재를 파괴하고, 심지어는 공자의 무덤까지 파헤쳐 훼손하기도 하는 등 반달리즘(vandalism)적 행태를 보였다. 또한 반동분자로 낙인찍힌 사람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나타내는 폭력의 과격함과 잔인함은, 이 혁명을 진두지휘하는 당과 마오에게 보이는 충성심의 척도가 되기도 하였다.

하나의 문제로서 '홍위병'은 과거 중국의 기록이 아닌,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사드 경제 보복, 한류 금지 조치, 바이두(Baidu)에 윤봉길 의사의 국적이 중국 조선족으로 되어있는 중국의 동북공정, 김치, 한복에 대한 문제, 1대1로 프로젝트 등 중국이 아닌, 중국공산당이 해왔고, 하고 있는 일들이 턱밑까지 차올라 이제는 우리나라의 정체성까지 흔들어데는데 이르렀기에 중국에 대한 공부와 연구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 말하고 싶다.

이 책의 제목이 '현대 중국 100년의 변천'이 아닌, '중국공산당 100년의 변천'인 것은 집필진이 중국과 중국공산당을 분리해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을 이끌고 움직여가는 것은 하나 된 중국의 모든 사람들이 아닌, 슬로건을 정하고 지침을 내리는 중국공산당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중국 공산당에 대해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범위는 책 제목의 일부이기도 하듯이 1921-2021이다. 중국공산당이 창당된 1921년부터 시진핑 집권 중인 현재 2021까지 중국 공산당의 백 년간 역사를 들여다본다. 이 책의 구성은 논문의 모음집 형식으로 되어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도 논문의 형식을 이루기에 총 10편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각 세부 분야의 전공자이자 전문가이기도 한 10명의 집필진이 각각 다양한 분야에서 중국공산당 역사를 기술, 앞으로를 전망하고 있다.

이 책의 특이점은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듯이 각 논문에서 논의되는 키워드는 다르겠지만 시기는 통일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공산당 100년의 역사를 혁명, 건설, 발전 그리고 신시대로 구분해보고 있다. 중국공산당이 창당하고 난 후 혁명 30년, 사회국가 건설 30년, 등소평에서 시작된 개혁개방 30년 그리고 시진핑 집권기에 선언된 신시대(2017년 제19차 당대회).

또 하나의 특이점은, 이 책의 장점이기도 한데, 중국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견해를 인정하고, 필자들 사이에서 상충되거나 논쟁이 될 수 있는 입장들을 하나의 관점으로 무리하게 통일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현재와 관련하여 '신시대'에 대한 집필진의 다양한 의견을 들어볼 수 있다.

단순히 중국의, 중국공산당의 과거만을 늘어놓은 것이 아닌, 그것(중국공산당)이 현존하고 있는 '오늘날'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이 갖는 의미, 국제사회 안에서의 관계 등 쟁점이 되는 키워드와 함께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중국을 바라볼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국내 여러 대학에 계신 교수님들께서 집필하셨다(이희옥 성균관, 안치영 인천대, 하남석 서울시립대, 서봉교 동덕여대, 장영석 성공회대, 강수정 조선대, 장윤미 동서대, 임춘성 목포대, 김미란 성공회대, 백승욱 중앙대). 중국에 대한 학문적 통찰을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라 생각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로메, 니체를 말하다 - 니체의 작품으로 본 니체 니체 아카이브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 -

[살로메, 니체를 말하다]

- 니체를 보는 또 하나의 방법, 살로메 -

니체, 그의 글들이 대개 비유와 상징, 단편과 잠언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그의 철학을 이해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호기롭게 그의 저서로 바로 돌진하다가도 이해가 막히면 니체의 사상을 풀어놓은 해설서나 입문서를 찾게 된다. 니체의 사상에 접근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브란데스를 통해 보거나 살로메, 하이데거를 통해 보거나.

브란데스는 니체를 대학 강단에 가장 먼저 소개한 인물이다. 그는 니체와 주고받은 서신들, 그의 저서를 통해 학문적 접근을 토대로 니체의 사상을 일찍이 '귀족적 급진주의'로 정리한 바 있다. 이와 달리, 살로메는 잠시나마 니체와 함께 삶을 동반, 니체와의 많은 대화를 통해 그의 사상을 직접 듣고 토론하며 니체의 저서를 12년 동안 탐독하는 등, 브란데스보다는 비교적 지근거리에서 니체를 보고 듣고 느끼는 방식으로 니체의 사상에 접근하였다. [살로메, 니체를 말하다] 이 책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 니체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살로메는 누구? 살로메는 20세기 전후로 유럽 지성사에서는 보기 드문 엘리트 여성이자 학자로 여겨진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여섯 형제 중 막내이자 외동딸로 자란 그녀는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구사하며 17세 때 이미 종교학과 철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을 배우고 많은 철학자들의 저서를 읽었다. 그녀는 일찌감치 지적 능력을 키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살로메의 이력 가운데 눈에 띄는 점은 그녀가 살아생전에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많은 지성인들과 교류했다는 사실이다. 니체는 물론이고, 릴케, 프로이트, 파울 레, 바그너, 하우프트만, 뵐로, 슈니츨러, 호프만슈탈, 톨스토이, 바이츠제커 등 살로메의 삶은 이러한 수많은 지성인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특히 무명에 가까웠던 릴케를 세계적인 시인으로 만드는데 기여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다.

비에르의 소개로 프로이트와 만나게 된 살로메는 그의 밑에서 공부하며 정신 분석학적 통찰과 학문적 토대를 쌓게 되고 마침내 첫 여성 분석가가 되기에 이르렀다. 살로메의 이러한 학문적 소양은 이후 니체의 사상에 접근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 [살로메, 니체를 말하다] 역시 살로메의 정신 분석학적 관점과 학문적 소양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총 3개의 장으로써 1장은 '니체라는 존재', 2장은 '니체의 변화 과정', 3장은 '니체의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특히 1장 '니체라는 존재'부분에서 살로메에 의해 그려지는 니체의 모습은 참으로 흥미로웠다. 니체의 저술들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그의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모습과는 달리, 살로메는 그의 실제 성격에 초점을 맞춰 기술하고 있다. 그의 성격을 드러내는 단어나 문장을 살펴보면 이렇다. "섬세, 조용, 신중, 은둔자, 침묵하는 자, 겸손, 여성적인 부드러움, 침착함, 기품을 좋아하는 사람, 격식을 차리는 사람, 내밀한 고독감, 신비스러운 사람" 등. 나도 <도덕의 계보학>이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느껴지는 남성성으로 말미암아 실제로도 니체가 그런 성격이겠거니 하고 지레짐작했었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니체의 실제 성격을 파악하는 동시에 니체에게 의외의 면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거리에서 니체를 봤을 살로메였기에 그의 성격과 모습을 묘사하는 글은 충분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니체의 실제 성격과 모습 이외에도 이 책에서는 또한 니체의 정신적 사유의 변화 과정과 그의 문제의식을 짚어보고, 그의 사상의 내용과 체계를 살펴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로메, 니체를 말하다 - 니체의 작품으로 본 니체 니체 아카이브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니체를 보는 또 하나의 방법, 살로메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한민국 나침반 역사 속의 위인들 - 외교관의 눈으로 보고 역사학도의 발로 쓴 역사, 리더십 지침서
이강국 지음 / 북스타(Bookstar)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 -

[역사 속의 위인들]

- 광화문광장에서 세종대왕의 정신을 기리며 -

[대한민국 나침반 역사 속의 위인들]이라는 책은 총 8명의 위인을 다루고 있다. 최치원, 서희, 김윤후, 세종대왕, 이순신, 정약용, 백범 김구, 이승만. 다들 위대하신 분들이지만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세종대왕'에 대한 감상을 남겨볼까 한다.

1990년대 그러니까 옛날에는 무엇을 가지고 초중고 교과서를 제작했는지 모르겠다. 정확히 언제 배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렇게 배운 기억은 또렷하다. "세종대왕은 집현전에 지시를 내려 집현전의 학자들로 하여금 한글을 만들게 했다", 뭐 이런 식의 내용으로 한글 창제의 기원을 배웠었다. 이 책 [역사 속의 위인들]이란 책을 읽기까지만 해도 나는 한글은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용을 읽으면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한글은 협업이 아닌, 바로 세종대왕 혼자서 비밀리에 만들었다는 것이다. '혼자' 만들었다는 부분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을 연발했다. 이 책의 내용을 근거로 한다면 내가 학교 다닐 때 배운 한글에 대한 내용은 잘못된 것인 셈이다. 오늘의 독서를 통해 이를 바로잡게 되었다.

이 글에서 '훈민정음'과 '한글'의 차이를 잠깐 바로잡고 가려고 한다. 세종대왕이 오늘날의 한글을 처음 반포한 것은 그 이름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한다. 그것을 가리키기도 하는, 오늘날 이름 '한글'은 조선시대를 지나 1914년,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주시경 선생이 한문 이름인 훈민정음을 '하나이자 크고 바른 글'이라는 뜻으로, 우리글로 된 이름 '한글'이라 지은 것이다.

'훈민정음'이 협업의 결과물이냐 아니냐에 대한, 이 책에 실린 내용은 참으로 흥미로웠다. 저자는 훈민정음이 협업 일수 없는 이유를 4가지를 들어 밝히고 있는데 그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1443년 12월 30일 <세종실록>에 "이달에 상감마마께서 친히 언문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

둘째, 집현전을 약 20년 동안 지키고 있었던, 세종 집권 당시에는 집현전의 수장이었던 최만리가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린 것.

셋째, 세종대왕이 쓴 <훈민정음해례본>의 서문에 해당하는 '예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는 사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었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가엾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p.167 (재인용)

이 부분을 읽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지며 울컥했다. 사실 엄밀히 말해 세종은 지배계층의 최고봉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자리에 올라 있으면 대개 권력을 쥐고 있어도 더한 권력을 탐내거나 사리에 어두워지거나 자신의 안위만 힘쓰거나 여색에 빠지는 등 안일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대부분인데, 역대 왕들 가운데 특히나 세종대왕이 나에게 귀감이 되는 것은 그의 '끊임없는 탐구정신'때문이다.

한글 창제자 세종은 지금의 시각으로 보아도 최고의 학자였다. 학문 차원에서 보더라도 언어학뿐만 아니라 음악학, 천문학 등 새로운 문자 설계에 필요한 학문분야에 정통한 인문학자이자 과학자였고, 디자인과 음악에 정통한 예술가였다.

p.168

한글 창제가 협업일 수 없는 그 마지막 이유는 신숙주의 문집인 <보한재집> 기록에 있다. 거기에는 "상감마마께서 (...) 오직 우리나라만이 제 글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여 언문 자모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셨다"라고 되어있다.

'훈민정음'이 반포되고 나서 모든 백성이 한글을 자유로이 사용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렸다. 특권계층으로서 한자를 고집하던 사대부들의 저항도 있었고, 명나라의 눈치를 봐야 하는 그 당시 분위기도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이 저마다 글자를 알게 해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고, 자신의 생각과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며, 제 언어로서 나라의 정체성을 지켜내려 했던 '세종의 오랜 꿈'은 마침내 실현되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 하나에서 시작된 이 '비밀 프로젝트'는 다시 말해 세종의 애민정신이 없었다면 결코 탄생하지 못했을 우리의 자랑스러운 유산인 것이다.

그 유산을 지금도 실감한다. 빠른 검색과 빠른 타이핑(중국어와 일본어를 배워보고 이를 타이핑해 본 사람이라면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이미 실감해봤을 것이다.) 우리나라 말로 내가 말하고 싶은 바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문자의 자유, 이쁜 글과 말소리... 세종대왕의 크나큰 사랑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기의 음악가들
장옥님 지음 / 형설미래교육원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 -

[위기의 음악가들]

- 유서를 쓰는 사람의 심정이란... -

지금은 코로나 시대에 많이 익숙해져 있는 편이지만, 작년 3~4월만 하더라도 비교적 긍정적인 나에게도 우울한 날들이 많았다. 반 픽션, 반 현실이긴 하지만 전염병에 관한 영화들이 말해주는 여러 가지 상황들, 뉴스를 틀면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 입원실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른다는 사람들... 지난 영상이긴 하지만 전국의 구급차와 구급 대원분들이 대구를 찾은 모습은 그 당시 우리가 지내고 있는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 것이었는지 말해준다. 아무리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런 시국에 의연한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싶다. 코로나 이전 미세먼지가 극악이었던 날조차 마스크 한 번 안사고 안 쓰던 나였는데, 그 이후 마스크가 없어서는 안 될 세상 안의 나... 내가 이런 세상에 살고 있는 게 꿈인지 생시인지 했다.

코로나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했던 작년 봄쯤이었을까. 집에서 평소 즐겨듣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안토니오파파노 지휘, 조성진 연주,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듣고 있었다. 2악장이 시작되고 나오는 피아노의 첫마디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지면서 울컥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베토벤이라는 사람과 베토벤이 만들었던 곡에 더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것 같다. 코로나 전에 그저 위대한 작곡가의 위대한 곡이라는 피상적인 수식어 아래 음악을 듣고 즐겼다면, 코로나 이후 내가 이렇게 힘들어보니 그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궁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베토벤의 삶을 더욱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작년은 마침 베토벤 탄생 250주년 되는 해라고 했다.

나는 클래식 음악만 들어서 모든 음악가를 각각의 손가락만큼이나 똑같이 사랑하지만, 한 줌의 마음을 더해 조금 더 아끼는 음악가가 있다면 그가 바로 베토벤이다. 솔직히 나는 베토벤의 음악을 가장 사랑한다. 음악 전문가가 아니라서 귀로 듣는 예술을 문장으로 술술 풀어내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인간의 감정이란 것이 저 아래까지 떨어지는 깊은 밑바닥에서부터 그 정신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의 개념에 이르기까지, 인간에서부터 인간 이상에 이르는 거대한 스펙트럼을 느낄 수 있어 좋아한다. 사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베토벤의 음악은 뭔가 한 단어나 한 문장으로 특정하기에는 한없이 크게 느껴질 뿐이다.

베토벤이 이 전 시대의 음악가, 이를테면 바흐나 하이든, 모차르트와 구별되는 점은 베토벤 그 자신이 당시 자유계약자, 즉 프리랜서의 신분으로서 예술가의 지위를 한층 더 드높였다는 데에 있다. 이 전 시대 음악가들은 그것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교회나 궁정의 녹을 먹는 사람들이었다. 어느 한 곳에 소속되어 있어 안정적이었다 할 수 있지만, 각자가 지닌 음악에 대한 철학은 교회나 궁정의 의뢰와 가이드라인에 따라 재단될 뿐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이렇지만, 개중에는 그렇지 않은 음악도 있지 않을까 한다.

베토벤은 이전의 선배들과 달리 독립적인 음악가로서 자신이 만든 음악(악보)을 출판사와 네고?, 협의를 통해 팔았다. 아마도 자신이 만든 음악의 가치를 스스로 저울질하며 출판사에 금액을 불렀을 것이다. 예술가라는 신분이 더 이상 종속적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은 베토벤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베토벤과 그의 음악은 인기가 많았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내가 생각할 때 하이든, 모차르트까지의 음악이 약간 관공서에서 만들어진 것 같은 정형화된 즐거움, 쾌활함, 똑똑 떨어지는 터치(스타카토)가 주를 이루는 음악이었다면 여기에 익숙해져 있던 당시 사람들은 베토벤의 음악적 스타일에 신선한 충격을 받으면서 신기해했던 것 같다. 이쁠 리 없는 굉음, 많이 보이는 단조 선율, 쫀득하게 이어 치는 레가토 주법 등이 베토벤의 음악이 주목받을 수 있었던 요인들이지 않나 싶다. 그 이전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스타일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자유계약자 신분으로서 베토벤은 성공적인 삶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잘 나갔다. 그러던 그가 청력에 이상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1796년부터로 추정된다. 1796년부터라고 하면 그의 나이 26세. 청력 이상의 원인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어떤 자료에서는 연주여행을 갔던 베를린에서 발진티푸스에 걸려 심하게 앓고 난 뒤 청각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청력은 서서히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청력 이상으로 인해 베토벤은 작곡과 연주활동에 의기소침해지고 점차 사람들을 기피하며, 예민하며 더럽고 고약한 성격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내가 감기로 며칠 아파봤을 때를 떠올려본다면 충분히 이해 가는 상황이다. 그 가벼운 감기로도 아플 땐 짜증이 나던데 당시 의료기술로는 고칠 수 없었던 청력 이상, 그로 인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정하기 싫은 미래, 그 두려움 앞에선 베토벤을 생각하면...

베토벤은 하일리겐슈타트라는 도시로 요양을 하러 갔다. 이런저런 방법을 써도 나아지는 기색이 없자, 펜을 들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내 동생 카를과 OOO 베토벤에게.

"아, 너희는 내가 심술궂고, 고집불통이며, 인색하다고 말하고 또 그렇게 생각하겠지. 너희는 나를 정말로 오해하고 있다. 너희는 내가 왜 그런 존재로 보이게 되었는지 밝혀지지 않은 이유를 몰라. 어렸을 때부터, 아아, 나의 가슴과 영혼은 부드럽고 선량한 감정으로 가득했고, 위대한 일을 해내려는 결심을 항상 품고 있었지..."

p.114 (재인용)

이것이 그 유명한 베토벤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다. 베토벤은 그의 나이 32세가 되던 1802년 10월 6일에 이 편지를 남겼다. 그러나 이 편지는 동생에게 전해지지 않았고, 그가 죽고 나서 20년 후에야 발견되었다. (베토벤 사망일 1827년 3월 26일)

베토벤은 1796년부터 청각에 이상을 느끼면서 1802년 10월 6일에 이 유서 성격의 편지를 남겼다. 내가 즐겨듣는 그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은 1796년부터 1803년에 걸쳐 작곡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떤 자료에서는 작곡 시작 시기를 1799년부터로 추정하기도 한다. 아무튼 그 범위를 어디서부터 잡더라도 작곡 기간이 청력 이상을 겪은 시기와 겹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베토벤은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남기고 죽지 않았다. 그다음 해에 이곡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200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넘어 2020년에 어떤 한 사람이 이걸 듣고 눈물을 흘렸으니... 시간을 뛰어넘는 이 감동을 어떻게 몇 개의 글자로 말할 수 있으랴.

서평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하며 독서와 서평을 향유하는 삶 가운데 '어느 날 갑자기 눈이 서서히 보이지 않으면 어떨까?'하는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상상을 해본다. 작곡이 업이었던 베토벤에게 듣는 것이란 분명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을 테다. 더 이상 들을 수도, 청중 앞에서 연주할 수도 없었을 때의 심정이란...

그러나 베토벤은 현실적 제약에 굴복하지 않았고, 그에게 주어진 운명에 끝내 저 스스로 무너지지도 않았다. 내가 그의 삶을 들여다본 이상 음악은 이제 나에게 단순히 즐기는 것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음악에 녹아든 삶에 대한 그의 자세를 반추하고 그의 정신을 내 삶에 심어내는 것 또한 베토벤 음악을 진정으로 느끼는 또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한다. 음악을 들으면 즐겁다. 그러나 그의 삶을 알고 들으면 위대하다는 것을 이 책 [위기의 음악가들]이 들려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