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 - FTA의 지구정치경제학
홍기빈 지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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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골마을에 오래된 우물이 하나 있었다. 그 우물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대대로 내려오던 마을의 공공 식수원이자 주민들의 쉼터였다.
 그런데 몇해 전부터 마을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우물은 바닥이 드러나게 되었고, 마을은 큰 근심에 빠져있었다. 이 소식을 어떻게 알고 왔는지 먼 마을에 사는 유명한 세도가인 이씨 영감이 찾아와 현대식 공법을 소개하며 자기가 공사비를 일부 지원해주겠다며 마을 이장에게 접근해왔다. 이 공사는 가뭄에도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지만 새로 우물길을 뚫고 펌프까지 달아야하는 큰 공사였다. 이씨 영감의 달콤한 설득과 주민들 걱정에 이장은 공사를 하기로 결정한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공사는 끝냈지만 이 우물을 관리하는게 애초 이씨 영감 얘기보다 훨씬 까다로왔고 전기값과 관리비 등 유지비용도 만만치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갑부 이씨 영감에게 우물의 소유권을 팔아 대신 운영을 맡기게 되었다. 
 우물값을 받으며 장사를 시작한 이씨 영감은 몇 달이 지나자 갖가지 이유를 대며 우물 값을 올리기 시작했다. 얼마되지 않아 우물값은 주민 하루벌이 1/3 에 해당할 정도로 값이 뛰어버렸다. 물을 아껴쓰며 힘겹게 버티던 마을사람들은 또다시 가뭄이 들자 도저히 버티기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다행히 단비가 내렸고 마을사람들은 부랴부랴 지붕에 올라가 대야에 빗물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씨 영감이 이장을 찾아와 이 빗물이 모두 자기 우물에 포함된 자원이라며 빗물을 못 받게 협박을 해왔다. 이씨의 입심과 위세가 워낙 막강했던 터라 주민들은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가뭄은 끝났지만 극심한 물부족으로 인해 급기야 마을에 사망자가 나오게 되었고 분노를 참지못한 마을주민들이 낫과 곡괭이를 쥐고 폭동을 일으켰다.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사태 수습에 나선 마을 이장은 되는데로 우물 값을 마련해 이씨에게 쥐어주고 이씨 영감을 마을서 떠나보낸다.

 순순히 도망나온 이씨 영감은 준비된 각본처럼 다음 일을 진행하기 시작한다. 이씨 영감은 이런 일이 미리 터질줄 알고 우물을 사기 전에 계약을 맺어둔 '투자자 - 국가 직접소송제'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이씨는 우물의 소유권을 가진 '투자자'이고 마을은 '국가' 에 해당 됨)

 이 계약에 따르면 이씨는 그 우물의 소유권과 합께, 앞으로 우물을 통해 수십년 동안 벌어들일 수 있는 모든 수입에 대해서 소송을 걸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투자자의 자산(소유물 + 잠재적 교환가치)을 마을이 공권력을 남용하여 부당하게 점유 또는 영업방해를 끼쳐 외부 투자자에게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이 소송은 그 해당 마을(국가)의 제도나 관습, 법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 미증유의 가공할 상商법을 근거로 제3의 전문 중재자를 포함한 3자 대면 형식의 밀실협상으로 이루어진다. 협상은 오직 투자자인 이씨가 입은 금전적 손해만을 따져 배상액을 정하게 된다.  반대로 이씨의 횡포로 인한 마을사람들의 유무형의 피해는 무시된다. 문제는 이 배상액 산정법에 따르면 그 금액이 천문학적 수치에 이른다는 것이다.

 

 위의 이야기는 실제로 미국 벡텔(Bechtel)社 와 볼리비아 간에 있었던 수자원 및 상하수도 시설운영권 분쟁(2000년 2월)을 축약한 것이다. (실제로 벡텔사는 볼리비아 주민들이 빗물을 못받도록 법으로 강제하였고 그 폭동과정에서 175명의 주민이 다치고 6명이 사망하였다.)

 이 '투자자 - 국가 직접소송제'의 위력은 국내법 및 국제법(공법 + 사법)까지 초월하는 막강한 구속력을 지닌채 오직 '외국 투자자'만을 위한 일방적인 보호법이라는데 있다. 문제는 이 소송사건 대부분이 선진국 투자자들에 의한 개발도상국의 일방적인 배상책임으로 끝난 판례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이 무지막지한 조항이 바로 한미 FTA 자유무역협정에 포함되어 있다. 세계 곳곳에서 체결한 각국 FTA협상 이후(2000년) 그 소송건수가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은 극비리에 밀실협상된 여러 소송사건들 중, 폭로된 몇가지 사례와 그 액수이다.

 

  2001년  라우더(방송업체) 對  체코  배상액    = 2억 7,000만 달러

  2004년  옥시덴탈(석유회사) 對  에콰도르    =  7,000만 달러

             CSOB(은행)  對  슬로바키아     =  2,4000만 달러

  2005년  CMS(은행)  對  아르헨티나     = 1억 3,340만 달러

             프랑스투자자 對  레바논     =  2억 6,660만 달러

              미국투자자  對  아르헨티나     = 1억 3,330만 달러

  2006년  유코스(석유회사) 對  러시아     = 330억 달러 !!!!!! 

 
 

 저 배상액 수치는 개발도상국들의 인구수와 국내총생산(GDP) 수준을 감안하면 실제로 그 부담수준은 선진국의 50배 정도라고 한다.(체코에게 2억7천만달러는 독일로 치면 110억 달러치 부담)  단 하나의 기업에 의해 한 나라가 거덜나고 국민 전체가 졸지에 국제채무자가 되버리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결과가 연출되는 것이다.

 문제는 투자자를 끌어온(or 투자자가 침투한) 약소국가의 정부 관료들이 나중에 소송 공격을 받을거란 걸 예측하면서도 투자자들의 영업이익을 방해(수용)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나면 이미 어떤 조처도 취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외국계 기업들은 이 FTA협정 하나만 믿고 합법적으로 온갖 약탈, 전횡을 일삼으며 그 나라의 공공성과 환경, 보건, 안전을 충분히(?) 훼손시키고 난 뒤, 마지막으로 거액의 배상금을 타먹고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다.

 

  FTA 협정에 포함된 이'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에는 투자대상국의 환경, 보건 등의 사안은 애초 제외 조항이기 때문에 투자기업을 상대로 법적 책임을 물거나 배상을 요구하는 어떤 제도적 구제책도 마련되어있지 않다. 게다가 투자유치만이 살길이라며 외국자본 성선설을 부르짖던 정부가 무턱대고 협정을 맺고서 한번 소송에 휘말리게 되면 그 초법권적 위력 앞에 협상주체로서 저자세를 취하게 되고 자국의 공공부문, 노동, 법, 정치, 경제체계 총체를 방어적으로 후퇴시키는 후유증까지 겪게 된다.

 

 저자 홍기빈씨는 책 말미에서 울분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이야기한다. "도대체 일개 기업이 저 약소한 국가들에게 '해코지'를 당하면 얼마나 당했다고 가뜩이나 가난한 이들의 고혈까지 빨아먹는가."

 이런 파국적 국면에 맞서 그는 효과적인 인과응보책을 제시하고 있다.

 이산화탄소 배출감소 협의를 위한 '토교의정서'협약(1997)을  전세계 온실가스의 36% 배출국인 미국이 자국의 산업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내팽게쳤으니깐, 미국과 FTA 나 양자간 투자협정을 맺은 모든 나라들이 똘똘 뭉쳐, 이상기온으로 인해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본 모든 농민, 상인, 시민들이 미국을 상대로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를 준비하자는 것이다.

이 소송제의 유별난 특징 중에 하나가, 하나의 사안을 가지고 여러 투자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소송을 걸 수 가 있어서, 그중에 하나만 승소해도 배상금을 타먹을 수 있는 극악무도한(?) 제도이기에 때문에 우리들이 이길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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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꽃 열림원 이삭줍기 11
노발리스 지음, 김주연 옮김 / 열림원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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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 한줄 읽어나가기가 너무 힘들다.  

마치 초짜인 번역가가 서툰 직역을 한것 같이 껄끄럽고 버겁다. 

좋은 작품으로의 접근을 도와주는게 아니라, 

오히려 읽다가 지쳐 책을 멀리하게 만드는...,

민음사 김재혁 번역본과 한 페이지 정도만 나란히 비교해서 읽어보면 내가 왜 이렇게까지 말하는지 알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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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지점: 초기 근대 철학에서의 응시와 신체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2
미란 보조비치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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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라깡학파 철학자인 미란 보조비치의『암흑지점: 초기 근대철학에서의 응시와 신체』를 읽으면서 머리 속에 맨 먼저 떠올린 단어는 단연코 프로이트의‘섬뜩함uncanny’이었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철학사와 철학자들을 읽어내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보조비치의 필치 아래에 놓인 철학자들-데카르트, 스피노자, 흄, 라이프니쯔, 말브랑슈, 벤섬-의 근엄하고도 경건한 초상은,『암흑지점』의 중요한 철학자인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적 명상의 대상인 아담과 같은 허구적 창조물처럼, 왜 저리도 기괴하면서 또 낯설게 보이는가? 물론 나는 지젝을 통해서 칸트와 헤겔이 어떻게 다시 멋진 창조물로 태어나는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익숙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정말 그랬던가? 그 익숙함과 친근함은 또다시 섬뜩한 불길함으로 바뀌고 있다. 갑자기 내가 바라보는(looking) 저 경건한 기독교 철학자들의 초상이 이제 음산한 이교도의 형상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gazing). 나는 이 응시의 포획에서, 덫에 걸려 절망을 재촉하는 짐승처럼, 아직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 나는 보조비치가 서술한 저 철학자들의 섬뜩한 응시의 암흑지점(an utterly dark spot) 앞에서 망연자실해하고 있다.

누가 당신에게 후근대적 사유에서 철학사와 철학자들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읽어냈던 철학자들 중 단 한 사람만 들라고 한다면, 아마도 당신의 검지손가락은 질 들뢰즈를 가리킬 것이다. 그는 칸트의 등에 업혀 계간(鷄姦)하는 방식으로 칸트로부터 전혀 괴물스러운 철학적 창조물들을 만들어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이 말은 들뢰즈 자신이 애호했던 철학자들-흄, 스피노자, 라이프니쯔, 니체-에게도 그대로 해당하는 사항일 것이다. 이제 슬로베니아 라깡 학파의 철학자들은 들뢰즈와 또 다른, 하지만 더 섬뜩한 방식으로 고전 철학자들의 비밀스러운 사생아를 만들고 있다.

만일 당신이『에티카』를 읽었다면, 그리고 알튀세르, 들뢰즈나 네그리를 따라서 스피노자를 읽고 좋아한다고 말하면, 당신은 혹시 이 구절도 기억하고 있는가.“만일 어떤 자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다고 상상하며, 더욱이 자기는 사랑받을 아무런 원인도 부여하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그는 응답으로 그 사람을 사랑할 것이다.”(스피노자,『에티카』3부, 정리 41)『암흑지점』의 제 3장,「첫 눈에 앞서」는 바로 스피노자의 이 구절에 기초하여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불일치를 통해 역설적으로 발생하는 사랑의 숭고한 순간을 말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스피노자는 라캉의 사랑론의 선구자로 등록한다. 라캉에게 사랑은 사랑받는 자가 사랑받는 대상의 자리에서 사랑하는 주체로의 자리바꿈을 통해 지금까지 사랑하는 자가 행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랑을 되돌려주는 행위가 아니었던가. 아마도 스피노자는 이 점에서 라캉에게 필시 동의했으리라. 그리고 보조비치의 가르침을 따라 당신은『에티카』의 제 3부를‘사랑과 증오의 도착(판본)=(per)version’으로 다시 읽을 수 있으리라.

지젝이『암흑지점』의 서문에서 보조비치의 책이 후근대성의 사회정치적 교착들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읽힐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할 때, 당신은 보조비치의 철학적 서술이 근대 초창기의 철학자들에게 맞춰져 있으면서도 후근대적 사회의 여러 문제의 틀들을 넌지시 암시한다는 사실을 간파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제목‘암흑지점’은 바로 근대의 신체가 투명한 연장된 사물로 환원되면서 필수 불가결하게 남겨졌던 잔여(remainder)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다. 근대의 신체를 앎과 권력의 대상으로 환원하는 기제는 물론 특권화된 시선(look)이며, 보조비치는 서구의 초기 근대철학사에 흩어져있는 세부적인 응시(gaze)의 장면들을 곳곳에 펼쳐놓으면서 근대적 시선(신체를 데카르트적 연장된 사물로 환원시키는 권력기제)이 그 한계를 드러내는 맹점, 암흑지점을 탐사한다. 이 잔여, 혹은 암흑지점은『암흑지점』에서‘숭고한 신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그 무엇이다.『암흑지점』에서 기술되는 모더니티는 보조비치의 서술 아래에서 우리가 포스트모더니티라고 말할 수 있는 증후(symptom)를 분출한다고 볼 수 있다. 

최근 프로이트의‘섬뜩함uncanny’(혹은 라깡의‘외밀함extimate’)에 대한 슬로베니아 라깡학파의 또 다른 인물인 믈라덴 돌라르의 논문을 읽다가 나는 벤섬에 관한 보조비치의 서술 속에서 벤섬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어떤 사람에 대한 그 어떤 유사물, 그 어떤 그림, 그 어떤 조상이라 한들, 그가 자기-아이콘이라는 자격에서 그 자신에게 그러한 것만큼 그를 닮을 수 있겠는가. 동일성이 유사성보다 더 낫지 않은가?”이 구절은 사물 그 자체야말로 그것 자체의 가장 적합한 외양, 재현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아마도 당신은 2001년 9.11 세계무역센터폭파사건을 경악과 동시에 불길하고도 섬뜩한 응시로 그 자리에서 붙박인 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현실 같지 않은 현실을 보고 대다수의 사람들은“마치 영화같아”라고 반응한 적이 있다. 바로 여기에서 당신과 나는 사물이 그것 자체의 가장 적합한 외양을 제공해주는 놀라운 사례를 본 것은 아닌가. 어떤 서구의 예술가가 불경스러운 어조로 세계무역센터폭파사건을 최고의 예술품으로 간주한 것은 바로 벤섬의 위 구절이 아니고서는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뮐라크르의 시대, 증식하는 외양(시뮐라크르, 유사물) 그 자체에 대한 찬양이 대중화되는 시점에서, 또한 분신(double)이라는 유사물의 섬뜩함에만 놀라워하는 바로 지금에 와서야 나는 하나의 사물(인간)이야말로 그 자체로 가장 섬뜩하다는 진실에 접하게 되었다. 나는 필시 저 어리석고 무능한 바보 연인, 사랑하는 X를 마음에 둔 채 X를 가장 잘 닮은 여자를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었던 히치콕의 <현기증Vertigo>의 주인공인 스코티‘같은’남자는 아니었던가. 하지만 나를 가장 잘 재현할 수 있는 남자는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보조비치의『암흑지점』으로 돌아가 말하면, 이 책의 주제에 해당하는 철학자들의 섬뜩한 초상, 그야말로 나에게는 악마적인 분신으로만 보였던 이 철학자들의 초상은, 본래 그 자신들의 사상의 가장‘외밀한’지점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모더니티는 그것의 가장‘외밀한’지점에서 포스트모던하다는 강렬한 역설. 보조비치의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들은 이처럼 무수하다.

이제 당신이 보조비치의『암흑지점』을 가장‘외밀한’지점에서 읽어야할 차례가 왔다. 바로 보조비치(스피노자, 말브랑슈, 벤섬 등등) 안에 있는 보조비치(스피노자, 말브랑슈, 벤섬 등등)보다 더한 어떤 것과 대면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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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우리의 성기를 인정하고, 기억하고, 말하기
버자이너 모놀로그
이브 엔슬러 지음, 류숙렬 옮김 / 북하우스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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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교육 지침서 『기저귀부터 데이트까지(From Diapers to Dating)』를 쓴 데브라 해프너가 이같은 성교육 지침서를 쓰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오래 전 일인데 생후 18개월 된 딸을 데리고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Geogia O'Keeffe)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갤러리를 둘러보던 중의 일이었다.

오키프의 작품을 보고 있던 그녀의 딸이 갑자기 오키프 대표작 중 하나를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딸의 목소리는 갤러리 안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그녀의 딸은 “엄마, 저것 봐. 벌바(vulva)야!” 라고 외쳤다. “Vulva”가 뭔지 모르는 분들은 영어 사전을 구입하고서도 별로 궁금한 것이 없었던 분들일 게다. 통계 조사된 바는, 물론 없겠지만 통계를 내보면 섹스(SEX)를 제외하고 영어사전 검색 순위 10위 안에 틀림없이 들어갈 만한 단어가 바로 이 말이다. 아직도 이 말의 뜻을 모르는 분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찾아보시기 바란다.

미국의 유명 화가이자 여성인 조지아 오키프의 ‘꽃잎’ 그림들은 본의든 아니든 종종 앞서의 에피소드와 같이 여성의 성기를 묘사한 것으로 간주되곤 한다. 오키프 자신은 자신의 작품이 그와 같은 성적인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비춰지는 것에 대해 그리 신경 쓰지 않았을 뿐더러 그렇게 보이기를 원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데브라 헤프너의 딸의 눈에 비친 것처럼 그녀가 그린 작품들은 간혹 여성의 성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vulva”는 해부학적으로는 여성의 외음부(外陰部)를 의미한다. 이브 엔슬러의 『버자이너 모놀로그(The Vagina Monologues)』의 또 다른 주인공이기도 한 “vagina”는 질(膣), 즉 음문(陰門)을 의미하지만, 이 책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Vagina”는 여성의 복잡한 성기구조 가운데 일부를 차지하는 질이나 음부 자체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어린 소녀가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보지”란 말을 했을 때(“vagina”나 “vulva”는 실감이 안 나므로), 그 어머니가 한 여성으로 느꼈을 당혹감에 대해 상상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남자 아이들의 돌 사진 중에는 성기를 드러낸 사진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데 반해 여자 아이들의 돌 사진에서 그런 사진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물론 최근에는 남자 아이들의 경우에도 가려주어야 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 대세인 듯하다. 이 책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성적인 폭력을 경험했던 저자 이브 엔슬러가 연령과 국적을 불문하고, 뉴욕으로부터 보스니아의 난민촌에 이르기 까지 각계각층의 여성 200여명을 인터뷰한 결과물이다. 만약 이브 엔슬러가 사회학자였다거나 인류학자였다면 책의 내용이나 형식도 달라졌겠지만, 이브 엔슬러는 극작가였다.

그러니까 이 책은 몇 년 전부터 국내의 유명 배우들이 출연한 연극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그 연극의 원대본인 셈이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서문을 통해 나는 영어로 여성의 성기를 표현하는 단어가 우리말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어떤 하나의 사물 혹은 부위에 대해 표현하는 단어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네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친밀한 대상이란 뜻이지만, ‘보지’도 과연 그런가? 스타이넘은 “그런데도 나는 여성의 성기에 대해 정확한 표현을 들어보지 못했고, 긍지를 느낄 수도 없었다.”고 말한다.

이브 엔슬러가 이른바  “보지의 독백”이라고 옮길 만한 파격적인 제목의 책을 쓴 까닭이 거기에 있다. 성별(性別)을 불문하고 어떤 한 인간이 자신의 신체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는 일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열등감이 어떤 한 개인이 지극히 개인적인 까닭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한 성(性)으로 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지니도록 사회적으로 강제되는 것이라면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사회의 문제이다. 페미니즘이 말하는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의 뜻도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브 엔슬러의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가장 정치적인 텍스트이다.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비밀이 됩니다. 비밀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 두려움과 잘못된 신화가 되기 쉽습니다. 나는 언젠가 그것이 부끄럽지도 않고 또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오기를 바라기 때문에 입 밖에 내어 말하기로 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자신과 분리해서 사고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손을 바라보면서 이것이 “나의 손”이라고 느끼는 것, 내 “몸과 마음이 분열”되어 있으며 대상화하여 바라보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 분열이 문화적, 사회적으로 강제되고, 은폐될 때, ‘여성’으로 분류되는 인간뿐만 아니라 그것을 강제하는 ‘남성’사회도 더 크게 느끼지 못할 뿐 왜곡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끝으로 남성의 성기도 공공연히 이야기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 상황인데 어째서 여성들의 성기만이 연극으로 올려지고 이야기되어야 하느냐고 항변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또 그와 반대로 여성의 성기를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며 - 그것이 허락될 만큼 충분히 가까운 사이가 아닌 - 주변의 여성에게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경우를 실제로 본 적이 있다.

전자의 경우, 그것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상황 자체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면 함께 싸우면 될 일이고,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보지’(말하면서도 영 쑥스러운 나 자신을 느끼지만)를 죄의식 없이 느끼도록 하는 정신적/육체적 해방과 동시에 정치적/문화적 해방을 위한 투쟁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엔 좀더 복잡해서 스스로 남성 페미니스트를 자임하는 척하면서 구태여 원치 않는 상대에게 과도한 언어노출을 시도하지는 않는 것이 좋겠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성을 이야기하는 것과 사회적인 차원에서 성을 이야기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중층적인 심층구조(deep structure)란 것도 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우리가 이제는 우리의 성기를 인정하고, 기억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들 자신의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란 것은 확실하다.  독백을 극복하는 건 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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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wasulemono > 경계선에서 생각하기
도와 로고스
짱 롱시 / 강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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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대 사회의 문화와 예술은 다양한 측면의 문제를 함유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언어의 문제로 수렴된다.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이 말과 글자라는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언어의 문제는 인간 문화의 시작과 끝에 가로놓여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도와 로고스라는 동서양 철학의 중심 화두를 각각 대표하는 개념을 표제로 내세움으로써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도가 아니라는 말은 언어의 지시 기능이 지닌 궁극적인 한계와 더불어 이러한 진리의 언명조차 말을 통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함유한 개념이다. 그리고 로고스는 이성 혹은 말을 뜻하는 그리스어로서 데리다식의 해체주의가 서양의 지적 전통을 로고스중심주의로 규정하면서 인구에 회자된 개념이다.

중국과 서양은 판이한 지적 전통을 가진 문화권으로 가정하는 것이 우리 주변의 미숙한 견해거나 선입견이 아닌가 생각된다. 도와 로고스의 대립이 압축적으로 표상하듯이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언어의 한계성에 대한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서양은 적어도 근대 사회 이후로 많은 것들을 언어적 표상으로 포섭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문학의 장에서만 보면 현대의 서구 시인들은 적어도 동양의 도 개념이 함축하는 언어의 함축성, 암시, 신비주의적 현현에 대해서 강한 열망을 드러내 보인다. 말라르메의 순수시나 발레리의 상징시학은 그들이 토해 내는 몇 마디의 언어가 아니라 그 언어가 깔고 있는 여백으로부터 말로는 현현되지 않을 신비주의적 암시를 지향했다.

저자는 양의 동서와 시간의 고금을 종횡으로 옮겨가면서 언어에 대한 서양적 관념과 현상을 중국적 관념과 현상과 비교하면서, 궁극적으로 적어도 언어 문제에 있어서 양의 동서 사이에 선입견으로 놓여 있는 거리를 좁히고자 하는 것같다.

저자의 이런 작업은 별다른 반성 없이 서양의 지적 전통에 기대어, 동양적 현상에 대한 접근을 피하는 지적 안일함에 대해서 반성하게 한다. 조선적인 것은 서양 근대의 개념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비교 접근 대상으로서 미달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암묵적으로 전제하지 않는가 생각된다. 이런 문제는 현대 문학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특히 더 염두에 둬야 할 것같다.

안일한 재생산이 아닌 생기와 활력으로 가득 찬 도전적인 재생산을 충동질하는 이런 책은 새로운 작업을 위한 영감을 제공해 준다. 저자는 중국계 미국인 학자이다. 경계선에 가로놓인 위치가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건 아닌가 싶다. 이상의 시를 번역하고 연구한 월터 류의 위치와 가능성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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