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지점: 초기 근대 철학에서의 응시와 신체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2
미란 보조비치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슬로베니아 라깡학파 철학자인 미란 보조비치의『암흑지점: 초기 근대철학에서의 응시와 신체』를 읽으면서 머리 속에 맨 먼저 떠올린 단어는 단연코 프로이트의‘섬뜩함uncanny’이었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철학사와 철학자들을 읽어내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보조비치의 필치 아래에 놓인 철학자들-데카르트, 스피노자, 흄, 라이프니쯔, 말브랑슈, 벤섬-의 근엄하고도 경건한 초상은,『암흑지점』의 중요한 철학자인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적 명상의 대상인 아담과 같은 허구적 창조물처럼, 왜 저리도 기괴하면서 또 낯설게 보이는가? 물론 나는 지젝을 통해서 칸트와 헤겔이 어떻게 다시 멋진 창조물로 태어나는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익숙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정말 그랬던가? 그 익숙함과 친근함은 또다시 섬뜩한 불길함으로 바뀌고 있다. 갑자기 내가 바라보는(looking) 저 경건한 기독교 철학자들의 초상이 이제 음산한 이교도의 형상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gazing). 나는 이 응시의 포획에서, 덫에 걸려 절망을 재촉하는 짐승처럼, 아직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 나는 보조비치가 서술한 저 철학자들의 섬뜩한 응시의 암흑지점(an utterly dark spot) 앞에서 망연자실해하고 있다.

누가 당신에게 후근대적 사유에서 철학사와 철학자들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읽어냈던 철학자들 중 단 한 사람만 들라고 한다면, 아마도 당신의 검지손가락은 질 들뢰즈를 가리킬 것이다. 그는 칸트의 등에 업혀 계간(鷄姦)하는 방식으로 칸트로부터 전혀 괴물스러운 철학적 창조물들을 만들어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이 말은 들뢰즈 자신이 애호했던 철학자들-흄, 스피노자, 라이프니쯔, 니체-에게도 그대로 해당하는 사항일 것이다. 이제 슬로베니아 라깡 학파의 철학자들은 들뢰즈와 또 다른, 하지만 더 섬뜩한 방식으로 고전 철학자들의 비밀스러운 사생아를 만들고 있다.

만일 당신이『에티카』를 읽었다면, 그리고 알튀세르, 들뢰즈나 네그리를 따라서 스피노자를 읽고 좋아한다고 말하면, 당신은 혹시 이 구절도 기억하고 있는가.“만일 어떤 자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다고 상상하며, 더욱이 자기는 사랑받을 아무런 원인도 부여하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그는 응답으로 그 사람을 사랑할 것이다.”(스피노자,『에티카』3부, 정리 41)『암흑지점』의 제 3장,「첫 눈에 앞서」는 바로 스피노자의 이 구절에 기초하여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불일치를 통해 역설적으로 발생하는 사랑의 숭고한 순간을 말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스피노자는 라캉의 사랑론의 선구자로 등록한다. 라캉에게 사랑은 사랑받는 자가 사랑받는 대상의 자리에서 사랑하는 주체로의 자리바꿈을 통해 지금까지 사랑하는 자가 행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랑을 되돌려주는 행위가 아니었던가. 아마도 스피노자는 이 점에서 라캉에게 필시 동의했으리라. 그리고 보조비치의 가르침을 따라 당신은『에티카』의 제 3부를‘사랑과 증오의 도착(판본)=(per)version’으로 다시 읽을 수 있으리라.

지젝이『암흑지점』의 서문에서 보조비치의 책이 후근대성의 사회정치적 교착들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읽힐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할 때, 당신은 보조비치의 철학적 서술이 근대 초창기의 철학자들에게 맞춰져 있으면서도 후근대적 사회의 여러 문제의 틀들을 넌지시 암시한다는 사실을 간파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제목‘암흑지점’은 바로 근대의 신체가 투명한 연장된 사물로 환원되면서 필수 불가결하게 남겨졌던 잔여(remainder)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다. 근대의 신체를 앎과 권력의 대상으로 환원하는 기제는 물론 특권화된 시선(look)이며, 보조비치는 서구의 초기 근대철학사에 흩어져있는 세부적인 응시(gaze)의 장면들을 곳곳에 펼쳐놓으면서 근대적 시선(신체를 데카르트적 연장된 사물로 환원시키는 권력기제)이 그 한계를 드러내는 맹점, 암흑지점을 탐사한다. 이 잔여, 혹은 암흑지점은『암흑지점』에서‘숭고한 신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그 무엇이다.『암흑지점』에서 기술되는 모더니티는 보조비치의 서술 아래에서 우리가 포스트모더니티라고 말할 수 있는 증후(symptom)를 분출한다고 볼 수 있다. 

최근 프로이트의‘섬뜩함uncanny’(혹은 라깡의‘외밀함extimate’)에 대한 슬로베니아 라깡학파의 또 다른 인물인 믈라덴 돌라르의 논문을 읽다가 나는 벤섬에 관한 보조비치의 서술 속에서 벤섬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어떤 사람에 대한 그 어떤 유사물, 그 어떤 그림, 그 어떤 조상이라 한들, 그가 자기-아이콘이라는 자격에서 그 자신에게 그러한 것만큼 그를 닮을 수 있겠는가. 동일성이 유사성보다 더 낫지 않은가?”이 구절은 사물 그 자체야말로 그것 자체의 가장 적합한 외양, 재현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아마도 당신은 2001년 9.11 세계무역센터폭파사건을 경악과 동시에 불길하고도 섬뜩한 응시로 그 자리에서 붙박인 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현실 같지 않은 현실을 보고 대다수의 사람들은“마치 영화같아”라고 반응한 적이 있다. 바로 여기에서 당신과 나는 사물이 그것 자체의 가장 적합한 외양을 제공해주는 놀라운 사례를 본 것은 아닌가. 어떤 서구의 예술가가 불경스러운 어조로 세계무역센터폭파사건을 최고의 예술품으로 간주한 것은 바로 벤섬의 위 구절이 아니고서는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뮐라크르의 시대, 증식하는 외양(시뮐라크르, 유사물) 그 자체에 대한 찬양이 대중화되는 시점에서, 또한 분신(double)이라는 유사물의 섬뜩함에만 놀라워하는 바로 지금에 와서야 나는 하나의 사물(인간)이야말로 그 자체로 가장 섬뜩하다는 진실에 접하게 되었다. 나는 필시 저 어리석고 무능한 바보 연인, 사랑하는 X를 마음에 둔 채 X를 가장 잘 닮은 여자를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었던 히치콕의 <현기증Vertigo>의 주인공인 스코티‘같은’남자는 아니었던가. 하지만 나를 가장 잘 재현할 수 있는 남자는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보조비치의『암흑지점』으로 돌아가 말하면, 이 책의 주제에 해당하는 철학자들의 섬뜩한 초상, 그야말로 나에게는 악마적인 분신으로만 보였던 이 철학자들의 초상은, 본래 그 자신들의 사상의 가장‘외밀한’지점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모더니티는 그것의 가장‘외밀한’지점에서 포스트모던하다는 강렬한 역설. 보조비치의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들은 이처럼 무수하다.

이제 당신이 보조비치의『암흑지점』을 가장‘외밀한’지점에서 읽어야할 차례가 왔다. 바로 보조비치(스피노자, 말브랑슈, 벤섬 등등) 안에 있는 보조비치(스피노자, 말브랑슈, 벤섬 등등)보다 더한 어떤 것과 대면하면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바람구두 > 우리의 성기를 인정하고, 기억하고, 말하기
버자이너 모놀로그
이브 엔슬러 지음, 류숙렬 옮김 / 북하우스 / 2001년 4월
평점 :
절판


성교육 지침서 『기저귀부터 데이트까지(From Diapers to Dating)』를 쓴 데브라 해프너가 이같은 성교육 지침서를 쓰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오래 전 일인데 생후 18개월 된 딸을 데리고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Geogia O'Keeffe)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갤러리를 둘러보던 중의 일이었다.

오키프의 작품을 보고 있던 그녀의 딸이 갑자기 오키프 대표작 중 하나를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딸의 목소리는 갤러리 안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그녀의 딸은 “엄마, 저것 봐. 벌바(vulva)야!” 라고 외쳤다. “Vulva”가 뭔지 모르는 분들은 영어 사전을 구입하고서도 별로 궁금한 것이 없었던 분들일 게다. 통계 조사된 바는, 물론 없겠지만 통계를 내보면 섹스(SEX)를 제외하고 영어사전 검색 순위 10위 안에 틀림없이 들어갈 만한 단어가 바로 이 말이다. 아직도 이 말의 뜻을 모르는 분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찾아보시기 바란다.

미국의 유명 화가이자 여성인 조지아 오키프의 ‘꽃잎’ 그림들은 본의든 아니든 종종 앞서의 에피소드와 같이 여성의 성기를 묘사한 것으로 간주되곤 한다. 오키프 자신은 자신의 작품이 그와 같은 성적인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비춰지는 것에 대해 그리 신경 쓰지 않았을 뿐더러 그렇게 보이기를 원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데브라 헤프너의 딸의 눈에 비친 것처럼 그녀가 그린 작품들은 간혹 여성의 성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vulva”는 해부학적으로는 여성의 외음부(外陰部)를 의미한다. 이브 엔슬러의 『버자이너 모놀로그(The Vagina Monologues)』의 또 다른 주인공이기도 한 “vagina”는 질(膣), 즉 음문(陰門)을 의미하지만, 이 책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Vagina”는 여성의 복잡한 성기구조 가운데 일부를 차지하는 질이나 음부 자체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어린 소녀가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보지”란 말을 했을 때(“vagina”나 “vulva”는 실감이 안 나므로), 그 어머니가 한 여성으로 느꼈을 당혹감에 대해 상상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남자 아이들의 돌 사진 중에는 성기를 드러낸 사진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데 반해 여자 아이들의 돌 사진에서 그런 사진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물론 최근에는 남자 아이들의 경우에도 가려주어야 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 대세인 듯하다. 이 책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성적인 폭력을 경험했던 저자 이브 엔슬러가 연령과 국적을 불문하고, 뉴욕으로부터 보스니아의 난민촌에 이르기 까지 각계각층의 여성 200여명을 인터뷰한 결과물이다. 만약 이브 엔슬러가 사회학자였다거나 인류학자였다면 책의 내용이나 형식도 달라졌겠지만, 이브 엔슬러는 극작가였다.

그러니까 이 책은 몇 년 전부터 국내의 유명 배우들이 출연한 연극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그 연극의 원대본인 셈이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서문을 통해 나는 영어로 여성의 성기를 표현하는 단어가 우리말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어떤 하나의 사물 혹은 부위에 대해 표현하는 단어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네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친밀한 대상이란 뜻이지만, ‘보지’도 과연 그런가? 스타이넘은 “그런데도 나는 여성의 성기에 대해 정확한 표현을 들어보지 못했고, 긍지를 느낄 수도 없었다.”고 말한다.

이브 엔슬러가 이른바  “보지의 독백”이라고 옮길 만한 파격적인 제목의 책을 쓴 까닭이 거기에 있다. 성별(性別)을 불문하고 어떤 한 인간이 자신의 신체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는 일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열등감이 어떤 한 개인이 지극히 개인적인 까닭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한 성(性)으로 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지니도록 사회적으로 강제되는 것이라면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사회의 문제이다. 페미니즘이 말하는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의 뜻도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브 엔슬러의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가장 정치적인 텍스트이다.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비밀이 됩니다. 비밀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 두려움과 잘못된 신화가 되기 쉽습니다. 나는 언젠가 그것이 부끄럽지도 않고 또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오기를 바라기 때문에 입 밖에 내어 말하기로 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자신과 분리해서 사고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손을 바라보면서 이것이 “나의 손”이라고 느끼는 것, 내 “몸과 마음이 분열”되어 있으며 대상화하여 바라보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 분열이 문화적, 사회적으로 강제되고, 은폐될 때, ‘여성’으로 분류되는 인간뿐만 아니라 그것을 강제하는 ‘남성’사회도 더 크게 느끼지 못할 뿐 왜곡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끝으로 남성의 성기도 공공연히 이야기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 상황인데 어째서 여성들의 성기만이 연극으로 올려지고 이야기되어야 하느냐고 항변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또 그와 반대로 여성의 성기를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며 - 그것이 허락될 만큼 충분히 가까운 사이가 아닌 - 주변의 여성에게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경우를 실제로 본 적이 있다.

전자의 경우, 그것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상황 자체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면 함께 싸우면 될 일이고,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보지’(말하면서도 영 쑥스러운 나 자신을 느끼지만)를 죄의식 없이 느끼도록 하는 정신적/육체적 해방과 동시에 정치적/문화적 해방을 위한 투쟁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엔 좀더 복잡해서 스스로 남성 페미니스트를 자임하는 척하면서 구태여 원치 않는 상대에게 과도한 언어노출을 시도하지는 않는 것이 좋겠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성을 이야기하는 것과 사회적인 차원에서 성을 이야기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중층적인 심층구조(deep structure)란 것도 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우리가 이제는 우리의 성기를 인정하고, 기억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들 자신의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란 것은 확실하다.  독백을 극복하는 건 대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wasulemono > 경계선에서 생각하기
도와 로고스
짱 롱시 / 강 / 1997년 8월
평점 :
절판


현대 사회의 문화와 예술은 다양한 측면의 문제를 함유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언어의 문제로 수렴된다.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이 말과 글자라는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언어의 문제는 인간 문화의 시작과 끝에 가로놓여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도와 로고스라는 동서양 철학의 중심 화두를 각각 대표하는 개념을 표제로 내세움으로써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도가 아니라는 말은 언어의 지시 기능이 지닌 궁극적인 한계와 더불어 이러한 진리의 언명조차 말을 통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함유한 개념이다. 그리고 로고스는 이성 혹은 말을 뜻하는 그리스어로서 데리다식의 해체주의가 서양의 지적 전통을 로고스중심주의로 규정하면서 인구에 회자된 개념이다.

중국과 서양은 판이한 지적 전통을 가진 문화권으로 가정하는 것이 우리 주변의 미숙한 견해거나 선입견이 아닌가 생각된다. 도와 로고스의 대립이 압축적으로 표상하듯이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언어의 한계성에 대한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서양은 적어도 근대 사회 이후로 많은 것들을 언어적 표상으로 포섭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문학의 장에서만 보면 현대의 서구 시인들은 적어도 동양의 도 개념이 함축하는 언어의 함축성, 암시, 신비주의적 현현에 대해서 강한 열망을 드러내 보인다. 말라르메의 순수시나 발레리의 상징시학은 그들이 토해 내는 몇 마디의 언어가 아니라 그 언어가 깔고 있는 여백으로부터 말로는 현현되지 않을 신비주의적 암시를 지향했다.

저자는 양의 동서와 시간의 고금을 종횡으로 옮겨가면서 언어에 대한 서양적 관념과 현상을 중국적 관념과 현상과 비교하면서, 궁극적으로 적어도 언어 문제에 있어서 양의 동서 사이에 선입견으로 놓여 있는 거리를 좁히고자 하는 것같다.

저자의 이런 작업은 별다른 반성 없이 서양의 지적 전통에 기대어, 동양적 현상에 대한 접근을 피하는 지적 안일함에 대해서 반성하게 한다. 조선적인 것은 서양 근대의 개념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비교 접근 대상으로서 미달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암묵적으로 전제하지 않는가 생각된다. 이런 문제는 현대 문학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특히 더 염두에 둬야 할 것같다.

안일한 재생산이 아닌 생기와 활력으로 가득 찬 도전적인 재생산을 충동질하는 이런 책은 새로운 작업을 위한 영감을 제공해 준다. 저자는 중국계 미국인 학자이다. 경계선에 가로놓인 위치가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건 아닌가 싶다. 이상의 시를 번역하고 연구한 월터 류의 위치와 가능성같은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wasulemono > 역자와 출판사에 감사!
영화에 관한 질문들
스티븐 히스 지음, 김소연 옮김 / 울력 / 200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 감상은 즐거운 일이지만, 쇼트나 앵글같은 전문용어를 들먹이며 영화를 해부하는 일은 참 재미없는 일이다. 그것은 전문가의 일이지 평범한 관객이 할 일은 아니다. 영화가 볼거리의 일종으로서 기능해온 역사 속에서 이런 문제는 결코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요, 비단 영화만 아니라 소설이나 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출판에서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누구의 영화 읽기 식의 책은 좀 팔려도 히스의 이런 책들은 영화학도 외에는 관심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나 문화 연구에서 중요한 저작이나 화제작들 중 해외 저작 상당수의 미번역 상태에 놓여 있다. 히스의 이 책이 읽힌다면 그것은 연구실이지, 지하철이나 버스깐이 아니다.

물론 나같은 사람은 번역이 안되면 원서로라도 읽어보겠다는 욕심을 부리는 편이지만, 히스의 이 책처럼 누군가의 노력으로 번역되어 나오면 반갑기 그지없다. 번역된 글을 읽으면서 역자가 상당히 애로가 많았겠구나 하는 마음이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히스의 문체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역자가 번역한 지젝의 <비딱하게 보기>가 선사한 번역서 읽기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한글책 읽는 것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번역서는 많지 않은 법.

꼭 한 번은 읽어보고 싶었던 히스의 이 책을 번역하신 역자와 맹목적 투기(?)의 용기를 낸 출판사에 감사할 뿐이다. 역자의 머릿속에도 있겠지만, 영화 관련 서적 중 아직도 소개되지 않은 책들이 많은 줄 알고 있다. 로레티스나 멀비, 메츠의 책도 번역될 수 있다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wasulemono > 새로운 토포스:판타스틱
영화의 환상성 동문선 문예신서 189
장루이 뢰트라 지음, 김경온 외 옮김 / 동문선 / 200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판타스틱 영화제가 특화된 하나의 영화제로 정착될 정도로 판타스틱 영화라 불리는 일군의 기이하고 독특한 영화에 대한 관심은 날로 높아져가고 있다. 전통적인 서사와 영화 형식에 식상한 사람들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뭔가 좀 더 신선하고 새로운 자극을 찾기 마련이고, 영화 역시 첨단화된 기술적 조작으로 이미지 구사가 용이해짐으로 해서 이와 같은 사람들의 욕구에 조응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킹콩'이나 '투명인간'같은 영화가 보여주는 놀라운 기술에 찬탄을 금하지 못했다는 경험담은 이제 아주 낡은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관객의 기대 수준과 기술적 발전이 지금처럼 근접해 있는 시대도 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영화에 있어서 새로운 기술을 액션 영화에서의 스펙터클을 양념처럼 바르거나 코믹 영화에서 과장된 웃음을 유발할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용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는 단순한 유흥 이상의 지적 텍스트로서, 훌륭한 몇몇 영화들에서 우리는 기존의 질서와 자아정체성으로부터 놀라운 전도와 의심의 계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대체로 전통적으로 관객의 대중적 호응을 받았던 장르 영화보다 공포영화나 미스테리 영화처럼 저급하거나 낯선 장르로 취급받아온 영화에서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리가 우리와 주변 환경을 받아들이는 어떤 합의된 관념을 리얼리티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와 같은 기존 관념에 회의를 품게 하는 다양한 기제들을 총칭해서 판타스틱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기제들은 영화의 공인된 질료인 이미지와 사운드의 차원일 수도 있고, 카메라의 시선이나 편집의 차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일군의 판타스틱 효과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대체로 의식적이지 못하다. 무엇이 그러한 효과를 만들어내는가 하는 질문에 둔감하다는 말이다.

뢰트라의 <영화의 환상성>은 우리에게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공포영화들을 매개로 하여 영화가 발휘하는 환상성이 어떤 차원에서 어떤 기제나 모티프를 중심으로 구성되는지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책 한 권이면 영화의 환상성이라는 테마를 고민하는 데 충분한 단초가 되리라 생각한다. 물론 잘 알지도 못하는 영화들에 대한 서술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읽어내려 하는 것보다는 처음에는 총론 중심으로 읽고 나중에 영화를 구해본다음 관련 부분을 정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영화를 웬만큼 보고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이 책을 찾으려 하지 않겠지만, 이 책은 영화나 문학을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좋은 길잡이가 되리라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