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지점: 초기 근대 철학에서의 응시와 신체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2
미란 보조비치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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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라깡학파 철학자인 미란 보조비치의『암흑지점: 초기 근대철학에서의 응시와 신체』를 읽으면서 머리 속에 맨 먼저 떠올린 단어는 단연코 프로이트의‘섬뜩함uncanny’이었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철학사와 철학자들을 읽어내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보조비치의 필치 아래에 놓인 철학자들-데카르트, 스피노자, 흄, 라이프니쯔, 말브랑슈, 벤섬-의 근엄하고도 경건한 초상은,『암흑지점』의 중요한 철학자인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적 명상의 대상인 아담과 같은 허구적 창조물처럼, 왜 저리도 기괴하면서 또 낯설게 보이는가? 물론 나는 지젝을 통해서 칸트와 헤겔이 어떻게 다시 멋진 창조물로 태어나는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익숙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정말 그랬던가? 그 익숙함과 친근함은 또다시 섬뜩한 불길함으로 바뀌고 있다. 갑자기 내가 바라보는(looking) 저 경건한 기독교 철학자들의 초상이 이제 음산한 이교도의 형상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gazing). 나는 이 응시의 포획에서, 덫에 걸려 절망을 재촉하는 짐승처럼, 아직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 나는 보조비치가 서술한 저 철학자들의 섬뜩한 응시의 암흑지점(an utterly dark spot) 앞에서 망연자실해하고 있다.

누가 당신에게 후근대적 사유에서 철학사와 철학자들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읽어냈던 철학자들 중 단 한 사람만 들라고 한다면, 아마도 당신의 검지손가락은 질 들뢰즈를 가리킬 것이다. 그는 칸트의 등에 업혀 계간(鷄姦)하는 방식으로 칸트로부터 전혀 괴물스러운 철학적 창조물들을 만들어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이 말은 들뢰즈 자신이 애호했던 철학자들-흄, 스피노자, 라이프니쯔, 니체-에게도 그대로 해당하는 사항일 것이다. 이제 슬로베니아 라깡 학파의 철학자들은 들뢰즈와 또 다른, 하지만 더 섬뜩한 방식으로 고전 철학자들의 비밀스러운 사생아를 만들고 있다.

만일 당신이『에티카』를 읽었다면, 그리고 알튀세르, 들뢰즈나 네그리를 따라서 스피노자를 읽고 좋아한다고 말하면, 당신은 혹시 이 구절도 기억하고 있는가.“만일 어떤 자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다고 상상하며, 더욱이 자기는 사랑받을 아무런 원인도 부여하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그는 응답으로 그 사람을 사랑할 것이다.”(스피노자,『에티카』3부, 정리 41)『암흑지점』의 제 3장,「첫 눈에 앞서」는 바로 스피노자의 이 구절에 기초하여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불일치를 통해 역설적으로 발생하는 사랑의 숭고한 순간을 말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스피노자는 라캉의 사랑론의 선구자로 등록한다. 라캉에게 사랑은 사랑받는 자가 사랑받는 대상의 자리에서 사랑하는 주체로의 자리바꿈을 통해 지금까지 사랑하는 자가 행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랑을 되돌려주는 행위가 아니었던가. 아마도 스피노자는 이 점에서 라캉에게 필시 동의했으리라. 그리고 보조비치의 가르침을 따라 당신은『에티카』의 제 3부를‘사랑과 증오의 도착(판본)=(per)version’으로 다시 읽을 수 있으리라.

지젝이『암흑지점』의 서문에서 보조비치의 책이 후근대성의 사회정치적 교착들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읽힐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할 때, 당신은 보조비치의 철학적 서술이 근대 초창기의 철학자들에게 맞춰져 있으면서도 후근대적 사회의 여러 문제의 틀들을 넌지시 암시한다는 사실을 간파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제목‘암흑지점’은 바로 근대의 신체가 투명한 연장된 사물로 환원되면서 필수 불가결하게 남겨졌던 잔여(remainder)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다. 근대의 신체를 앎과 권력의 대상으로 환원하는 기제는 물론 특권화된 시선(look)이며, 보조비치는 서구의 초기 근대철학사에 흩어져있는 세부적인 응시(gaze)의 장면들을 곳곳에 펼쳐놓으면서 근대적 시선(신체를 데카르트적 연장된 사물로 환원시키는 권력기제)이 그 한계를 드러내는 맹점, 암흑지점을 탐사한다. 이 잔여, 혹은 암흑지점은『암흑지점』에서‘숭고한 신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그 무엇이다.『암흑지점』에서 기술되는 모더니티는 보조비치의 서술 아래에서 우리가 포스트모더니티라고 말할 수 있는 증후(symptom)를 분출한다고 볼 수 있다. 

최근 프로이트의‘섬뜩함uncanny’(혹은 라깡의‘외밀함extimate’)에 대한 슬로베니아 라깡학파의 또 다른 인물인 믈라덴 돌라르의 논문을 읽다가 나는 벤섬에 관한 보조비치의 서술 속에서 벤섬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어떤 사람에 대한 그 어떤 유사물, 그 어떤 그림, 그 어떤 조상이라 한들, 그가 자기-아이콘이라는 자격에서 그 자신에게 그러한 것만큼 그를 닮을 수 있겠는가. 동일성이 유사성보다 더 낫지 않은가?”이 구절은 사물 그 자체야말로 그것 자체의 가장 적합한 외양, 재현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아마도 당신은 2001년 9.11 세계무역센터폭파사건을 경악과 동시에 불길하고도 섬뜩한 응시로 그 자리에서 붙박인 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현실 같지 않은 현실을 보고 대다수의 사람들은“마치 영화같아”라고 반응한 적이 있다. 바로 여기에서 당신과 나는 사물이 그것 자체의 가장 적합한 외양을 제공해주는 놀라운 사례를 본 것은 아닌가. 어떤 서구의 예술가가 불경스러운 어조로 세계무역센터폭파사건을 최고의 예술품으로 간주한 것은 바로 벤섬의 위 구절이 아니고서는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뮐라크르의 시대, 증식하는 외양(시뮐라크르, 유사물) 그 자체에 대한 찬양이 대중화되는 시점에서, 또한 분신(double)이라는 유사물의 섬뜩함에만 놀라워하는 바로 지금에 와서야 나는 하나의 사물(인간)이야말로 그 자체로 가장 섬뜩하다는 진실에 접하게 되었다. 나는 필시 저 어리석고 무능한 바보 연인, 사랑하는 X를 마음에 둔 채 X를 가장 잘 닮은 여자를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었던 히치콕의 <현기증Vertigo>의 주인공인 스코티‘같은’남자는 아니었던가. 하지만 나를 가장 잘 재현할 수 있는 남자는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보조비치의『암흑지점』으로 돌아가 말하면, 이 책의 주제에 해당하는 철학자들의 섬뜩한 초상, 그야말로 나에게는 악마적인 분신으로만 보였던 이 철학자들의 초상은, 본래 그 자신들의 사상의 가장‘외밀한’지점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모더니티는 그것의 가장‘외밀한’지점에서 포스트모던하다는 강렬한 역설. 보조비치의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들은 이처럼 무수하다.

이제 당신이 보조비치의『암흑지점』을 가장‘외밀한’지점에서 읽어야할 차례가 왔다. 바로 보조비치(스피노자, 말브랑슈, 벤섬 등등) 안에 있는 보조비치(스피노자, 말브랑슈, 벤섬 등등)보다 더한 어떤 것과 대면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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