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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가 사랑한 학교 - 아이에게 준 최고의 선물, 발도르프 학교
강성미 지음 / 샨티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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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다 읽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상상했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발도르프 교육을 받는다면....,`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져간다. 온 세상을 잠식하고 있는 슬픔, 고독, 탐욕 폭력 등 온갖 마음의 질병들이 서서히 사그러져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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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 로마 최초의 황제
앤서니 에버렛 지음, 조윤정 옮김 / 다른세상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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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헌법의 정부구성은 대통령, 상원, 하원 세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구성은 고대 로마공화정의 구성요소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 로마 공화국의 최대치의 모습을 꿈꾼이가 바로 아우구스투스였다. 

 그것을 실현시킨 그의 원칙은 정말 단순했다. '가장 오래가는 제국 만들기'. 이에 필요한 인격적 조건에는 약간의 눈치와 야비함. 그게 거의 다였고 그리고 약간 애매한 하나, 난 이것을 맹목성이라 부르겠다. 여기서의 맹목성은 무대뽀랑 다르다. 맹목성은 자기완성적인 특성이 있고 모대뽀는 자기몰아적인 특성을 가진다. 그는 그 뭔가를 알고있었다. 순 골치덩이인 공화정체와 원로원을 끝까지 안고 간 것은 단지 그에게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세인들 눈치를 잘 살피던 그에겐 특히 말이다. 

고대 로마의 공화정은 통령(컨슬), 원로원(세나투스), 민회(코뮤티아)로 구성되는 혼합정체로 통령은 군주적 요소, 원로원은 귀족적 요소, 민회는 민주적 요소를 각각 대표하는 것이다. (박홍규의 『누가 아렌트와..,』)

 아우구스투스는 권력의 최정점에서 스스로를 제1시민(프린켑스)이라 칭하며, 한낱 행정관 격인 집정관이란 직함으로 유명유실한 공화국을 끝없이 진화시켜갔다. 그는 시민과 속주민들에게, 그리고 대립관계인 원로원들에게조차 두려움과 동시에 고마움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1500년 뒤에 나타난 마키아벨리즘의 가히 사적 전범이라 할만한데, 로마시민권을 얻기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로마에 안가도 로마법을 따르게끔 로마식 생활방식이 주변국들로 퍼져나갔다. 무엇보다도 근대도시가 갖춰야할 기본 틀을 당시에 세웠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적 창조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개같이는 벌지만 정작 정승같이 쓰는 이는 보기힘들다. 아우구스투스는 정말 개같이 권력을 좇았고 정승같이 지배했다. 어떤 개같음이냐가 문제인데, 저자가 도출한 바로는 폭군이나 전제군주의 살벌함 따위가 아닌 비릿하게도 교활함과 치졸함의 진수만을 드러내고있다.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된 양부 카이사르의 자리를 되찾는다는 명분을 뒷배삼아 그는 배신과 술수를 밥먹듯 일삼는데, 중요한 전투 때마다 딱 맞춰 앓아눕는 신경쇠약성 체질에다가, 반대파들을 현상금을 내걸어 인간살육을 벌이던 비열한이었고, 필요하다면 양아들마저도 제거하는 잔악함까지 보였다. 그런 인물이 어이없게도 친누나를 끔직이도 사랑해 평생을 극진히 보살폈으며 아이를 갖지못한 아내와 50년을 행복하게 결혼생활을 영위한 인물이기도 했다.

어떤 일관성이 없이 여기저기 얼룩진 그의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런 동의와 이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데, 그의 삶 한 켠에는 가면과 연극이란 단어가 줄곧 따라다닌다. 시커먼 간악함과 자애로운 부드러움을 동시에 지녔던 인물이 자신의 생을 한편의 소극으로 바라봤던 것은 어쩜 그가 내릴 수있었던 유일한 결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양부 카이사르가 암살된 그 날부터 자신의 임종의 순간까지 줄곧 두가지의 역을 무리하게 끌고 온 것은 아닐까. 그리스비극의 처절한 운명들을 생각하며, 맹목적인 욕망과 한사람의 여인에게 편히 안주하고 싶은 흐릿한 경계지점에서 허덕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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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지음, 조윤정 옮김 / 다른세상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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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처럼 함께한 가족들과의 식사자리,  가끔씩 식탁위에 생뚱맞게 올려진 특정 야채나 과일을 주요 화두로 삼아 의무적으로 먹어야 하는 일이 생긴다.  "요새 이게 그렇게 몸에 좋다더라, 무슨 기능이 있어가지고서는 어디에 좋고, 뭣에 좋고.., "  다음 주가 되면 그 메뉴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채 다른 재료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20대 후반을 넘어서는 여성들의 수다 중 절반은 주변인 신상정보교환이고 나머지 절반은 건강상식 쏟아내기와 질병에 대한 두려움 전파가 주를 이룬다. 기아, 호환마마를 극복한 재래의 문명인류는 더이상 두려울게 없어보이지만, 매일매일 신종 질환의 두려움을 업데이트하면서 상시적인 불안신경증에 자발적으로 시달리고있다.
이 책은 '우리가 먹는 음식은 어디에서 왔을까'라는 지극히 일차적인 문제제기에서 출발, 음식의 가공, 변태(?)과정을 직접 발로 쫓으면서 고도로 분화되고 구조화된 '음식산업'과 '현대인의 식생활'에 대해 고뇌하고, 고찰, 고발한 책이다.  

모든 것을 먹을 수가 있어, 도대체 무엇을 먹어야할지 끊임없이 고민하게된 잡식동물들의 딜레마를 인간은 선대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전통음식문화를 통해 자연적으로 해결해왔지만, 자본주의시대 소비주의 식품산업의 발달은 편리하게 가공된 완성식을 쉽게 구매할 수 있는 대형마트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만들어 현대인의 식사양식을 전통문화와 철저히 절연시켜버렸다. 


 소비자의 고유 권한이었던 '음식 선택의 권한'은 전적으로 마트에 어떤 상품을 진열할 것인가 계산기를 두들기는 식품산업주체에게 달려있다.  이 산업주체에게 식품을 만드는 기준은 국민건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값비싼 광고와 값싼 원자재값에 더 큰 영향을 받게된다. 정부는 기업원조 없이는 다음 선거를 낙관할 수 없기에 대체로 이들 기업의 이익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정부는 가공된 제품을 파는 기업들에게 특히 협조적인데 이 기업들을 위해서 값싼 원자재를 외국에서 들여와 자국 농산물 가격을 땅에 떨어뜨리고, 자국 농업이 완전히 망하지는 않게 정부보조금을 통해 근근이 연명하게 만들어서 비상식적으로 저렴한 원자재값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정부의 이같은 친기업정책이 결국 부실한 농업정책을 야기하게 된다. 생산비보다 언제나 밑도는 농산물가격을 생산량 증가로 메우려다보니 옥수수는 과잉으로 넘쳐나게되고 이 넘쳐나는 옥수수를 정부가 대거 사들여 각종 가공식품산업에 무제한 공급하게 되니, 되지도 않은 곳에 옥수수가 들어가게되고 심지어 가축사료로 둔갑되어 소에게 강제투여되고 배탈이 난 가축에게 항생제와 진정제를 투여하는 비극적 현상과 급기야 옥수수로 대체에너지를 만듭네 어쩌네 하는 법석까지 벌이는 지경을 만들어다. 푸코는 '근대 이전과 근대 이후의 차이 중 하나가 국가공권력의 개별인간에 대한 생사여탈권에서 국민전체의 건강 관리통제 시대로 이행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미국을 위시한 현대국가는 국민을 상대로 한 소비산업의 관리는 성공했을지 모를지언정, 국민건강에의 통제권을 상실한지는 이미 오래인 것 같다.

책은 총 3부로 나뉘어져 있다. 음식산업이 야기한 전통식사와 영양균형의 초토화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또 하나의 산업이 된 유기농식품과 초유기농 농가에 대한 관망으로 넘어간다. 마지막으로 저자 스스로 음식에 대한 주도권을 회복하는 수렵과 채집의 단계로 음식탐험은 마무리된다. 저자는 직접 사냥으로 멧돼지를 살육했을 당시 느꼈던 원초적인 흥분과 자기안에 내재되어있던 원시적 본능을 솔직하게 바라보면서, 그런 자신의 모습(사진)을 제3자의 시각에서 다시 봤을 때 생기는 구역질과 혐오감을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함을 인간 종의 존재양식과 멀어져버린 현대인의 인식의 부조화를 꼬집어 설명하고있다. 그리고 채식주의자나 동물살육에 반대하는 동물애호가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경험주의의 한계를 너머 다양한 인식론을 제시, 비판하고 있다.  인간은 결국 선택가능한 다양한 섭식방법(전통식, 산업식, 유기농식, 수렵식) 중 그 어떤 것이든지 각각에 기회비용과 물량 제한이 따르므로 결국 인간은 영원히 딜레마에 봉착할 수 밖에 없다는 미완의 (열린)결론을 맺고 있다. 

 시원스런 해결책을 얻진 못하지만 현실의 위기상황을 정확히 직시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이 책은 그 맡은바 소임을 다하고 있다. 저자가 책 끝자락에 힘주며 적은 이 문장 하나가 모든 사태와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패스트푸드의 가격은 겉으로는 싼것처럼 보이지만, 그 정확한 비용은 숨겨져 있다. 이 비용은 자연이나 공중보건, 공적 자금, 그리고 미래가 부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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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해석
제드 러벤펠드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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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초부터 세간의 화제이기도 했거니와, 슬로베니아학파에 의해 다시 부활하기 시작한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의 증폭, 법학교수이기도한 저자의 프로이트, 셰익스피어에 대한 소싯적부터의 열렬한 애정과 열정의 결실이란 점, 그 밖에 실존인물을 내세워 극화한 팩션이란 것 등이 이 책에 대한 엄청난 호기심을 유발시켰다.
 
임상심리학자인 '심영섭' 씨가 서평에서 언급했듯이,  소설속 공간적 배경이나 인물들의 호칭, 대화들 속에 숨겨진 기호들이 독자로 하여금 무의식적 연상작용을 꾀하는 장치들로서 전체내용을 암시한다는 점이 재미를 더한다.  소설은 두가지 내러티브로 진행이 되는데,  살인사건을 풀어가는 형사의 이야기와  프로이드를 중심으로 학계의 갈등과 학문적 내분을 다룬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며 약간 평이한 수준의 작법으로 전개된다. 
 
 소설의 주제인 정신분석에 대한 이론적인 소개와 접근의 효과는 120% 달성했다고 보여진다.  보통 정신분석 관련 책들을 볼때도 먼저 찾아보게되는 그 흥미진진한 임상사례들을 더군다나 약간의 픽션을 더해 서사구조로 재구성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매력적인 읽을거리로 무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 프로이트와 융 사이에 벌어진 '성적병인론(외디푸스,일렉트라 콤플렉스)'에 대한 논쟁과 갈등은 정신분석학이 지닌 탁월함과 치명적인 약점을 균형감 있게 제시하고 핵심 고갱이만 가려냈다는 점에서 정보전달력을 높였다.
 
그러나 약간의 아쉬움이 드는것은  대사를 통해서 소개되는 유려하고 날카로운 정신분석 이론들이 짧은 대화안에서 충실한 소개로만 그치고 풍부한 임상사례로 발전, 응용되지 못했다는 점과  이야기전개의 중심을 이루는 사건이 새디즘나 마조히즘, 살인충동과 같은 식상하고 뻔한 소재를 다뤄 흥미가 반감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명색이 아마추어 정신분석학도로 출사표를 던진 '제드 러벤펠드' 자신이 소설 말미에 주인공의 입을 빌어 내비친 정신분석학에 대한 나름의 평가는 너무나 성급하고 얄팍하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이 책은 초판이 나오기전부터 영화판권이 팔려나갔다는데 솔직히 영화를 아무리 잘 찍는다 해도, 시쳇말로 별점 4점을 넘기긴 어려울듯 싶다. 자료조사나 현지답사등 꼼꼼한 사전작업과 나름대로 추리소설다운 얽음새를 많이 고민하긴 했지만,  막판에 가서 후다닥 해치우는 벙찐 결말은 앞장까지 잘 유지되던 약간의 서스펜스와 기대감을 무참히 깨트리고 만다.  반전이랍시고 의외의 인물을 범인으로 설정한것 까진 봐줄만 하겠는데 모든 사건의 발단을 겨우 한 개인의 정신병적인 문제로 손쉽게 정리해 버린 것은,  정말 엉성했다. 
 애써 만든 공든탑을 이런식으로 흐지부지 끝낸 이유가 뭘까?  원고마감 시간이 부족했나?  아니면 갈수록 늘어나는 분량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아님 어쩔 수 없는 초짜 소설가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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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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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TV에서 즐겨보는 연속극의 뻔한 설정속의 뻔한 캐릭터들을 숫자의 '정수'로 표현한다면, 실제로 현실속에서 벌어지는 삶은 '무리수'라고 할 수 있다.  정수는 인위적이고 고정관념처럼 굳어져 재미가 없지만, 현실속의 드라마는 무리수처럼 미묘하게 움직이며 문맥적으로 파악된다.  촉촉하게 살아있으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연성을 품고 있다.

 포어 소설의 캐릭터들은 '소수' 같다.  불규칙하게 배열된 우발적인 소수들의 집합이랄까.  소설 초반엔 그 독창적이고 신선한 문체, 인물, 구성으로 독자의 혼을 쏙 빼놓는데, 그러나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강요된 개연성이 구성속에서 연관성을 잃어버리면서 무미건조한 나열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20세기의 전쟁은 기존 19세기까지의 전쟁과는 구별되는,  대량전, 총동원의 양상을 띈다고 '홉스봄'은 지적했다.  20세기의 전쟁은 한 나라의 정부가 선전과 책동(내셔널리즘)으로 자국민 전체를 전쟁에 끌어들여 전시경제체제로 탈바꿈시키는 총동원전이라고 하였다.  1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전쟁의 경험과 후유증은 2,3,40대 남자들만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는 남녀노소 가릴껏 없이 전쟁의 상흔을 지니고있다.  현대의 전쟁에서는 누구도 순수한 피해자로 남아있기는 어려워졌다는 말이다.

  9,11테러를 식상하지 않게 건드리고 외상을 보듬어 안아주는 이 소설은, 그 2차 효과, 정치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주인공 '셀' 집안과 작가'조너선 샤프란 포어'는 유대인이다. 9살 짜리 주인공 '오스카 셀'은 그 위로 아버지, 할아버지까지 3대에 걸친 전쟁 피해자들이다.  '셀'집안은 전쟁과 테러의 참상 한가운데에 처해 있었고 그들의 피해의식은 되물림되고 있었다.  이 책은 9,11테러로 시신까지 사라진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만나며 돌아다니는 오스카와,  2차 세계대전때 첫번째 가족이 몰살된 후, 삶의 의미를 상실한채 급기야 두번째 가족까지 내처 떠나게된 오스카 할아버지와 그 2차 피해자인 할머니 사이의 침묵으로 이루어진, 두가지 내러티브로 진행되는 소설이다.     

책의 뒤 겉표지에 각 언론, 비평가들의 상찬으로 꾸며진 광고성 글 중에서 '센티멘탈에 빠질 위험을 무릅쓰고...,' 란 문구가 있었다.  내가 느끼기엔 이 책의 후반부는 그야말로 감상주의에 빠진 작가의 종작없는 넋두리로 인해 독자를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그러나 미국인 독자들에겐 이 후반부의 감수성이 적중했나보다.  유대인 특유의 고립된 자아의식과 피해의식이 급기야 미국인들에게까지 전염된 것 같다.

 전쟁과 테러의 폭력의 근원은 이 유대인과 미국의 '외부'에 위치해 있다.  9,11 테러를 직간접적으로 겪은 모든 미국인들은 마치 외부에서 날아온 정체불명의 돌멩이에 의해 혼란에 빠진 호수의 부유물처럼 묘사된다.  누가 돌을 던졌는가?  왜 돌을 던졌는가?  눈물의 정당성은 과연 누구의 소유인가?  이런 질문들은 이젠 별 필요도 없어보인다.    이들에겐 무엇보다 자신들의 상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자신을 동정하고 위로하고 싶어 안절부절 어쩔줄을 모르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자신들의 상처를 자위하고 재생하고자 하는 손쉬운(?) 자리에 서있다. 

 '포어'가 만들어낸 소설속의 가상의 피해자는 기존의 9,11 피해자 명단에 추가의 피해자를 얹혀놓았다.  이 책을 읽는 이들이 많아질 수록 9,11 피해자는 무한대로, 무기한으로 양산되고 되풀이될 것이다.  피해자의 상처에 대한 맹목적인 조명과 무비판적인 포커스는 원인보단 결과에 집착하게되면서 '선의의 피해자'란 허위의식을 양산한다.    폭력이란, 그 내부자의 시선으로 보면 가해자의 그것이 아닌 피해자의 그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조너선 샤프란 포어는 자신의 얄팍한 감상주의가 자신들의 눈물이 점점 주먹이 되어가는데 일조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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