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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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TV에서 즐겨보는 연속극의 뻔한 설정속의 뻔한 캐릭터들을 숫자의 '정수'로 표현한다면, 실제로 현실속에서 벌어지는 삶은 '무리수'라고 할 수 있다.  정수는 인위적이고 고정관념처럼 굳어져 재미가 없지만, 현실속의 드라마는 무리수처럼 미묘하게 움직이며 문맥적으로 파악된다.  촉촉하게 살아있으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연성을 품고 있다.

 포어 소설의 캐릭터들은 '소수' 같다.  불규칙하게 배열된 우발적인 소수들의 집합이랄까.  소설 초반엔 그 독창적이고 신선한 문체, 인물, 구성으로 독자의 혼을 쏙 빼놓는데, 그러나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강요된 개연성이 구성속에서 연관성을 잃어버리면서 무미건조한 나열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20세기의 전쟁은 기존 19세기까지의 전쟁과는 구별되는,  대량전, 총동원의 양상을 띈다고 '홉스봄'은 지적했다.  20세기의 전쟁은 한 나라의 정부가 선전과 책동(내셔널리즘)으로 자국민 전체를 전쟁에 끌어들여 전시경제체제로 탈바꿈시키는 총동원전이라고 하였다.  1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전쟁의 경험과 후유증은 2,3,40대 남자들만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는 남녀노소 가릴껏 없이 전쟁의 상흔을 지니고있다.  현대의 전쟁에서는 누구도 순수한 피해자로 남아있기는 어려워졌다는 말이다.

  9,11테러를 식상하지 않게 건드리고 외상을 보듬어 안아주는 이 소설은, 그 2차 효과, 정치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주인공 '셀' 집안과 작가'조너선 샤프란 포어'는 유대인이다. 9살 짜리 주인공 '오스카 셀'은 그 위로 아버지, 할아버지까지 3대에 걸친 전쟁 피해자들이다.  '셀'집안은 전쟁과 테러의 참상 한가운데에 처해 있었고 그들의 피해의식은 되물림되고 있었다.  이 책은 9,11테러로 시신까지 사라진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만나며 돌아다니는 오스카와,  2차 세계대전때 첫번째 가족이 몰살된 후, 삶의 의미를 상실한채 급기야 두번째 가족까지 내처 떠나게된 오스카 할아버지와 그 2차 피해자인 할머니 사이의 침묵으로 이루어진, 두가지 내러티브로 진행되는 소설이다.     

책의 뒤 겉표지에 각 언론, 비평가들의 상찬으로 꾸며진 광고성 글 중에서 '센티멘탈에 빠질 위험을 무릅쓰고...,' 란 문구가 있었다.  내가 느끼기엔 이 책의 후반부는 그야말로 감상주의에 빠진 작가의 종작없는 넋두리로 인해 독자를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그러나 미국인 독자들에겐 이 후반부의 감수성이 적중했나보다.  유대인 특유의 고립된 자아의식과 피해의식이 급기야 미국인들에게까지 전염된 것 같다.

 전쟁과 테러의 폭력의 근원은 이 유대인과 미국의 '외부'에 위치해 있다.  9,11 테러를 직간접적으로 겪은 모든 미국인들은 마치 외부에서 날아온 정체불명의 돌멩이에 의해 혼란에 빠진 호수의 부유물처럼 묘사된다.  누가 돌을 던졌는가?  왜 돌을 던졌는가?  눈물의 정당성은 과연 누구의 소유인가?  이런 질문들은 이젠 별 필요도 없어보인다.    이들에겐 무엇보다 자신들의 상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자신을 동정하고 위로하고 싶어 안절부절 어쩔줄을 모르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자신들의 상처를 자위하고 재생하고자 하는 손쉬운(?) 자리에 서있다. 

 '포어'가 만들어낸 소설속의 가상의 피해자는 기존의 9,11 피해자 명단에 추가의 피해자를 얹혀놓았다.  이 책을 읽는 이들이 많아질 수록 9,11 피해자는 무한대로, 무기한으로 양산되고 되풀이될 것이다.  피해자의 상처에 대한 맹목적인 조명과 무비판적인 포커스는 원인보단 결과에 집착하게되면서 '선의의 피해자'란 허위의식을 양산한다.    폭력이란, 그 내부자의 시선으로 보면 가해자의 그것이 아닌 피해자의 그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조너선 샤프란 포어는 자신의 얄팍한 감상주의가 자신들의 눈물이 점점 주먹이 되어가는데 일조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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